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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미 / '시간의 축적'이란 풀밭위에 펼쳐진 극미(極微)의 세계

윤진섭

'시간의 축적'이란 풀밭위에펼쳐진 극미(極微)의 세계



2009년, 인사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 출품작들을 통해 정준미는수묵화와 의상의 만남을 시도한 바 있다. 동양의 전통 회화 장르 가운데 하나인 수묵화와 현대 의상의만남을 통해 수묵 고유의 맛과 멋을 흐드러지게 풀어냈던 것이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정준미의세련된 붓놀림과 천의 형태에 맞춰 소재를 포치(布置)하는 정준미의기민한 회화적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회색, 검정, 흰색의 면포 위에 먹의 농담(濃淡)을 조절하고 선염과 갈필의 효과를 적당히 섞어 나뭇잎, 연잎, 나비, 풀 등등 자연물을 형상화하는 솜씨가 나이에 비해 유장한 세련미를보여주고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정준미가 이 발표를 끝으로 세필에 의한 대상 묘사로 넘어간 것은 나로선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정준미의 이러한 회화적 스타일은 좀더 시간을 가지고 천착해 들어갈수 있는 여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지란 가령, 완성된옷 위에 그린 그림보다는 옷의 전개도와 같은, 그러나 딱히 옷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오브제로서의 대지(ground) 위에 그린 그림들이 보여주는 여유를 이름이다.

 

이 대지들은 마치 한 편의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처럼독립적이며 유니크한 사물성(objecthood)을 드러낸다. 그것들은연잎이나 연밥을 연상시키지만 딱히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옷을 연상시키지만 옷이라고도 할 수없다. 연잎이 아닌 연잎, 옷이 아닌 옷으로서의 사물성은중간항(中間項)이면서 동시에 미묘한 이중성(ambiguity)을지닌다. 현대적 산수화가 개척해야할 어느 지점에 가까이 다가갔던 정준미는 그러나 돌연 방향을 바꿔 극미의세계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전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은 정준미의 작업의 궤적에서 다시 한 획을긋게 될 새로운 시도이다. 그가 아직 화업(畵業)이 채 10년이 안 된 성장일로에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훗날 이 두 개의 스타일이 어느 지점에서 종합을 이뤄 큰 강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만큼 그는 일필휘지에의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미감 체득과 극미의 세계에 대한훈련을 통해 양 극단을 관통하는 회화적 실험에 전력투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준미의 근작들은 얼핏 보면 대상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토바이, 자동차, 사람, 포도, 인형 등등이 그가 화면에 등장시키는 주 소재들이다. 그것들은 대개검정색 바탕 위에 가위로 오려붙인 듯이 떠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실타래처럼 엉킨풀들의 집합이란 것을 알게 된다. 다양한 색의 실로 수를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은 그가 세필로정교하게 그린 잡풀들의 이미지인 것이다. 


정준미는 자신의 작업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잡풀을 보고소재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한다. 잡풀의 질긴 생명력에 한없이 경이를 느끼며 자신이 비록 여자지만한 사람의 작가로서 강인한 정신성을 표출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넷으로대변되는 이 속도의 시대에 느림의 미학을 관철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그의 그림은 시간의 축적으로이러한 느림의 미학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지극한 공력의 결과물이다. 우리의 옛 여인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수를 놓았듯이 세필로 중첩해서 그린 잡풀들은 그 자체 한 편의 초원을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정준미의 화면은 마치 초원에서 대상의 윤곽선을 가위로 오려내 검정색 대지(ground)에 풀로 붙여놓은 것처럼 선명한 선의 궤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 정준미의 그림은 내용 중심적이기도 하다. 얼핏팝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근작들은 현대인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 가령, 남성들의 로망인 할리 데이빗슨 오토바이, 팔등신 미인을 꿈꾸는 여인들의소망을 대변하는 바비 인형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욕망들은 욕망의 전쟁터인 몸을 통해 드러난다. 거리에 서 있는 여성 군상의 이미지는 욕망의 거소로서의 몸성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축적'이란 정준미의 키워드는 그림을 그리는'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서 나타나는 순간의 미학을 대변한다. 그는 잡풀을 그리느라 몰입하고 있는 순간, 그 몰아(沒我)의 상태를 즐긴다. 겸재 정선의「인왕제색도」를 나름대로 각색한 그림은 시간의 축적을 잘 보여준다. 그의 이 작품은 패러디가 아니라각색의 선명한 예를 보여준다. 잡풀의 다발로 이루어진 묘사를 통해 옛 고전의 고색창연한 느낌을 잘 드러내고있다. 산수화에 대한 그의 갈망이 정선의 옛 그림 속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정준미의 이러한 일련의 실험은 완성태라기보다는 현재진행형이다. 느림의방법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그것은 향후 보다 다각적이며 다채로운 형식실험과 기법의 천착을 거쳐 종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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