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영섭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윤진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한영섭은 그림을 시작한 이래 평생을 한지와 씨름해 온 천상 한지작가다. 그러나 아직 거기에 걸맞는 국내 화단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 그의 진가를 알아준다. 오사카트리엔날레에서의 연이은 수상은 이의 대표적인 경우다. 한영섭은 일본에 지인들이 많은데,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그의 일본에서의 활동을 후원하고 있으며, 한국의 한지 작업을 일본에 알리는데 공헌하고 있다. 

 60년대 중반, 신세대를 중심으로 한 전위미술의 돌풍이 불었을 때, 한영섭은 ‘논꼴’ 동인의 멤버로 화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무악재 너머의 허허벌판에 있는 논꼴이란 곳에서 강국진, 정찬승, 김인환, 최태신, 양철모, 남영희 등과 함께 젊음을 불태웠다. 그 허허로운 공간에서의 추억은 지금도 그의 가슴에 타다 남은 불씨로 아련히 남아있을 것이다. 아트페어의 유혹도 마다하고 오직 대작 위주의 한지에 대한 실험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의 장인 정신은 필경 이때 겪었던 강한 실험의식이 아직 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일 터이다. 

 한영섭이 현재와 같은 방법론에 처음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광목에 나뭇결을 탁본으로 떠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탁본 기법에 의존한 이때의 작품은 직사각형 속에 또 하나의 직사각형이 들어있는, 다소 정형화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는 강릉의 유명한 고택인 선교장 기둥에서 처음 나뭇결무늬를 탁본으로 떠냈다. 파라핀을 이용하여 수백 년의 풍상을 겪은 나무의 표정을 광목에 재현했던 것이다. 자연의 표정을 떠내는 이 즉물적인 방법은 지금도 그의 작업의 기조가 되고 있거니와, 그 이후 ‘한지와 자연 소재의 만남’은 점차 그의 중심 테마가 되어갔다. 

 광목천을 이용하여 자연의 표정을 담아내는 한영섭의 조형어법은 1979년에 이르러 마침내 한지를 끌어들이게 된다. 그는 둥근 호박돌에 한지를 입혀 탁본을 떠내는 기법을 고안했다. 나무에서 자연석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진 것이다. 강렬한 적색과 청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돌의 생생한 표정을 담아낸 이 연작은 파상(波狀)을 이룬 나뭇결과는 사뭇 다른 오톨도톨한 돌의 표면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Ⅱ. 1970년대 중반이후, 한영섭의 작품 명제는 <관계(relation)>로 일관되고 있다. 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무엇과 무엇과의 관계다. 구체적으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 또는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를 말한다. 혼자서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럴진대, 필경 거기서는 상호작용이 싹트게 마련이다. 그것은 가깝게는 작가와 사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감응일 것이요, 멀게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적 반응일 것이다. 

 한영섭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주목한다. 첫째는 그가 옥수숫대나 들깨나무 줄기와 같은 사물에 눈길을 주는 것이 그것이요, 둘째는 그가 사용하는 나무줄기와 한지가 벌이는 상호간의 반응이 그것이다. 한영섭의 오랜 세월에 걸친 탁본 작업은 바로 사람과 사물, 또는 사물과 사물이 보여주는 상호작용을 요체로 삼고 있다. 

 한영섭의 <관계> 연작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는 명징성이다. 그는 사물의 표정에 어떤 조작을 가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떠낼 뿐이다. 그래서 사물이 지닌 구체적인 표정과 생생한 삶의 결이 있는 그대로 종이에 반영된다. 그가 사물의 표정을 떠나 조작을 가하는 일이란 종이를 물들이거나 떠낸 종이를 오려 콜라주할 때뿐이다. 그의 조형의식이 반영되는 것이 바로 이때인데, 그 외에는 단지 사물이 자신을 이야기하게 그대로 놔둔다.  

 이것은 얼마나 선선한 일인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방임하는 일이야말로 세계에 그대로 육박하는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개입’하지 않는다. 오로지 제시할 뿐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개입과 제시, 이는 한영섭의 작업 전체를 관류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한영섭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행위성’이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 그것의 연장의 결과가 바로 <관계> 연작이다. 옥수수나 들깨나무 더미를 작업대 위에 고르게 펴는 일에서 시작하는 그의 행위는 오랜 두드림을 거쳐 떠내는 일로 마감된다. 두드릴 때 어찌 리듬이 없겠는가. 탁탁, 타다 탁, 마치 북어를 두드리는 것처럼 흥에 겨워 두드릴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순간이다. 마치 아궁이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마른 들깨나무처럼, 방망이에 맞아 납작하게 바스라질 때 내는 들깨나무의 비명소리는 바로 존재감의 생생한 표명인 것이다.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작품은 그렇게 바스라져 간 사물의 생생한 존재감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매개물(vehicle)이다. 납작해진 들깨나무에 먹물을 묻힌 뒤 그 위에 종이를 덮고 사물의 표정을 떠내는 일은 존재감의 흔적을 붙들어 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렌으로 한지 위를 밀 때, 시체처럼 납작하게 누워있던 들깨나무들은 다시 웅얼거리기 시작하며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보인다. 



Ⅲ. 그리하여 우리는 한영섭이 보여주는 조형의 세계에 진입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란  연한 도토리색, 청색, 황토색, 저색(닥나무색) 등등으로 물을 들인 두꺼운 순지 위에 들깨나무의 탁본 조각을 조합한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들깨나무 흔적들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커다란 화면에 균질적으로 펼쳐진 들깨나무의 흔적들은 한영섭이 탁본의 조각을 잘라 이리저리 조합한 결과다. 그가 보여주는 패턴은 선과 점의 중첩이거나 반복이다. 선은 들깨나무 줄기요, 점은 바스라질 때 튕겨나간 잔재들 같아 보인다. 그러니까 단순해 보이는 <관계> 연작의 내용이 사실은 이 두 요소의 복잡한 변형임을 알 수 있다.  

 도토리나 닥나무, 또는 황토에서 우려낸 은은한 바탕색 위에서 검정색의 들깨나무 흔적들이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관계> 연작은 한지특유의 물성의 결과물이다. 한영섭은 그 위에 자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옮긴다. 그것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visible & invisible)’ 사이에서 파생되는 직물이다. 거기에는 바다, 빛, 대지, 소리, 바람 등등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들은 검게 탄 목탄의 파편이나 앙상한 나무줄기를 연상시키는 사물의 흔적의 저 너머에 있다. 그러니까 관객이 해야 할 일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불가시의 것들을 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술가는 자연의 대리인이다. 샤먼처럼 자연의 영성(靈性)을 옮기는 자이다. 영성은 예술가의 몸을 빌려 나타난다. 관객은 예술가의 몸을 통해 자연 혹은 우주의 영성에 접속된다. 

 손이야 말로 인간을 대지로 이끄는 매개물(vehicle)이다. 한영섭의 <관계> 연작이 수많은 손의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조작(manipulation)을 요체로 삼는 이 과학의 시대에 그것이 주는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손과 손의 접촉, 살과 살의 결합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