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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춘모 / ‘만드는’ 행위와 사물성

윤진섭

‘만드는’ 행위와 사물성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남춘모의 작품은 조각과 회화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그것을 편의상 ‘부조회화’라고 부르자. 그림의 표면으로부터 돌출된 일정한 높이의 띠들은 실상 표면과 연결된 것이며, 그것들은 일정한 크기의 틀에서 생성된다. 남춘모의 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그림이 틀로부터 생성될 수 있다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고 있다. 나무로 ‘ㄷ’자 형태의 틀을 짜 그 속에 단색으로 날염된 천을 깐 다음, 묽게 희석시킨 투명 폴리에스테르를 반복해서 칠하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다.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생성된 작품의 한 단위(unit)는 다시 다른 단위들과 합쳐져 마침내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게 된다. 즉, 전시장에서 관객이 만나는 작품은 각 단위의 조합으로서의 독자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유기체의 세포나 사회의 구성원처럼 기본 단위에서 비롯되는데, 하나에서 출발하여 다(多)로 발전해 나가는 그의 회화의 원리는 작품의 확장을 위한 동력이다. 관객들은 작품의 정면에 서서 거리를 조절해가며 감상하는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점과 거리의 조정을 통해 남춘모의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이 제공하는 감상의 스펙트럼은 한쪽 벽에서 반대편 벽에 이르는 180˚영역이며, 이 구간에서 관객들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작품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화면으로부터 돌출된 띠들은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은은한 중성색 톤과 폴리에스테르의 투명한 재질감이 이루어내는 미적 효과는 띠의 그림자와 겹쳐 평면 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국면을 만들어 낸다. 부조에서 비롯되는 시각적 효과는 일루전이 아니라 그 자체 실재라는 사실, 가령 그림자는 실재로서의 그림자이며, 요철(凹凸)은 실재의 요철이라는 사실이 그의 작품의 특질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만든다’는 속성이 ‘그린다’는 속성보다 더욱 강조된다. 그의 작품은 하나 하나가 독립된 사물(object)이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거기에 존재할 뿐”, 의식적인 개입이나 조작(manipulate)을 허용하지 않는다. 틀에서 떨어져 나온 몰개성적인 하나의 띠는 다른 것들과 합쳐져 중성적인 성격의 사물을 이룬다. 특정한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된 그것은 순수한 물성을 지닌다. 연상을 허용하는 것은 오로지 색이다. 노랑 기미의 색상, 파랑 기미의 색상만이 어렴풋이 어떤 연상을 허용할 뿐이다.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색뿐이다. 관객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주관적으로 어떤 연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색의 영역을 떠나면 일체의 연상은 중지된다. 


 남춘모 작품의 사물성(objecthood)은 ‘만드는’ 행위에서 온다. 그리는 행위가 아닌, 만드는 행위 속에 그의 작품의 사물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는 행위가 범할 수밖에 없는 모사(copy)의 숙명에서 벗어나 사물을 만드는 행위야말로 사물이 세계에 존재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가 천에 직접 색을 칠하지 않고 염색기법을 동원한다든가, 준비된 나무틀에 염색된 천을 깔고 폴리에스테르를 반복적으로 칠해 떠내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 등은 가능한 한 사물이 사물이게끔 하는, 다시 말해서 의식의 투사를 가능한 한 막자는 의도로 읽혀진다. 색의 중성성과 사물의 중성성의 만남은 사물이 지닌 세계의 투명성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요건이다.  신체를 어떠한 의식의 조작 없이 투명하게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생(生)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남춘모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들, 즉 시각적 일루전과 실재와의 미묘한 혼란, 고양된 색의 순수한 지각 체험, 물성의 적나라함 등은 관객의 미적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그의 작품은 단색의 풍부한 뉘앙스를 통해 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제공한다. 투명 수지의 단단한 외피 속에 깃들어있는 색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법(話法)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인식에 이르는 길을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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