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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섭 / 침묵과 포효

윤진섭

침묵과 포효


윤진섭(미술평론가)



오랫동안 김유섭은 ‘검은 그림’에 매료돼 왔다. 그는 십 여 년 이상의 세월동안 검은 색의 드로잉을 비롯하여 검은 색을 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그림은 대개 두터운 마티엘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한 기세를 지닌, 이 검은 색이 주는 침묵과 포효의 느낌은 김유섭의 그림이 지닌 양면성을 대변해 준다. 침묵은 마치 검은 색이 빛의 모든 파장을 흡수하듯이 에너지를 그림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요소이며, 포효는 작가의 내면에 잠재된 예술적 기(氣)가 재료를 통해 외부로 뿜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에너지는 그 만큼 김유섭의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행위에 의한 회화, 즉 신체성이 강조된 회화의 성격이 짙다. 



김유섭의 그림에는 또한 침묵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절규와 같은, 혹은 인간의 본질적 행위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같은 느낌들이 짙게 깔려있다. 그러한 느낌들은 주로 검은 색 물감이 켜켜이 층을 이루는 작품들에서 맡아진다. 불에 탄 목조 가옥의 잔해처럼-물과 재, 기름, 그리고 완전히 연소된 목재의 시커먼 잔해가 뒤범벅이 되어있는-캔버스 위에 두텁게 발라진 검정색 물감의 층은 연속적인 회화적 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물감이 두텁게 발라진 캔버스에 손가락이나 송곳, 나무 주걱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손가락으로 그릴 때 물감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촉감은 물질이 지닌 야생적 느낌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는 물감에 돌가루와 같은 이물질을 섞음으로써 사물이 지닌 물질감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것이 빚어내는 촉각적인 느낌을 전달하고자 노력해 왔다. 돌가루와 같은 재료가 주는 야생적 물질성이 손가락과 만났을 때 그것은 마치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나 진흙 펄에 그려진 그림처럼 원초적인 느낌을 풍기게 되는 것이다. 


베를린의 스티프퉁 슈타트뮤제움(Stiftung Stadtmuseum Berlin) 개인전에 출품한 검은 그림들은 모티브가 대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검정색과 흰색, 회색, 그리고 연한 프러시안 블루 계통의 색이 가미된 이 그림들은 폭포, 산, 들판, 길 등등을 암시하고 있다. 온통 검은 색을 주조로 한 이 그림들은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캔버스에 투사된 강한 회화적 제스처에 있으며, 검은 색의 물감 층이 뿜어내는 강렬한 느낌에서 비롯된다. 



김유섭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 새롭게 변한 자신의 회화 세계를 선보인다. 80x80센티 정방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강렬한 느낌의 색채 추상화다. 검은 색의 그림으로부터 벗어나 색채 추상화로의 과감한 전환을 시도한 이번 출품작들은 화단의 많은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우선 그는 이전 전시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스스로 일정한 크기의 캔버스를 선택했으며, 그것은 마치 색채의 파노라마처럼 전시장을 아름답게 수놓게 될 것이다. 


순수 추상회화 작품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십 수 년 이상의 세월동안 검정색을 비롯한 몇 가지 무채색에 스스로를 제한해 놓고 회화적 실험을 벌여온 김유섭이 유채색으로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빨강, 노랑, 파랑 등 폭발하는 듯한 강렬한 유채색과 검정색의 만남은 화면을 화려한 시각적 잔치의 장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스스로 제조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고 있다. 두터운 마티엘을 내기 위하여 물감에 돌가루를 섞어 사용하는데, 주로 손이나 송곳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건조해서 표면에 광택이 없는 것과 반짝이듯 광택이 있는 것 등 다양한 기법에 의한 시각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보색대비와 한난대비 등 다양한 색채 효과에 주목하여 제작한 이번 출품작은 마치 캔버스에 물감을 퍼붓고 손가락으로 휘저은 듯한 강한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는 동작과 허무는 동작을 반복하는 듯한 그의 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자의 원초적 고뇌에 대한 유비로 읽혀진다. 그것은 또한 그림을 그릴 때 절제와 광포(狂暴), 긴장과 이완, 환희와 침잠 사이를 경험하는 마음의 진자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처절한 싸움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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