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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기품의 미술평론가, 고(故) 이일 선생을 추모하며

윤진섭

고결한 기품의 미술평론가, 고(故) 이일 선생을 추모하며


윤진섭(미술평론가)



 작년초에 우리는 한 비범한 비평가를 잃었다. 이일(본명 李鎭湜)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32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여 평양고보와 경복중학교(구 6년제)에서 수학하고 서울대 불문과를 중퇴, 1957년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파리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던 선생은, 유학 당시 이미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문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불문과 재학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랭보를 비롯한 프랑스 시인들의 세계를 섭렵하면서 장차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꿈꾸기도 했던 선생은 세련된 서구적 감성과 조탁된 시어로 일찍이 현대미술 비평을 위한 탄탄한 기초를 연마하였다.


 물론 선생이 처음부터 미술비평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던 것은 아니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어떤 계기가 그로 하여금 장차 미술평론의 험난한 길을 걷게 했던 것이다. 선생의 경우에 있어서 그 계기란 다름아닌 프랑스 유학과, 그 도정에서 만난 인물들, 서적, 그리고 대학에서의 전공이다.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동양의 한 학도에게 어느날 미셀 라공의 “추상예술의 모험”(1964)이란 얇은 책자가 우연히 다가왔는데, 바로 이 책이 현대미술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훗날 선생에 의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던 이 책은, 거의 운명적이라고나 해야 할 만남이었다. 시에서 미술비평으로의 전환이 이 책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미술평론가로서 선생의 자질은 귀국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선생이 홍대에 적을 둔 1966년 무렵은 마침 화단을 점유했던 앵포르멜의 열기가 시들해지면서 뭔가 새로운 바람이 절실하던 시절이었다. 선생은 때마침 결성된 [AG]그룹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날카로운 평필을 휘두름과 동시에 [청년작가연립전(무, 신전, 오리진)], [ST] 등 당시 홍익대 중심의 젊은 전위그룹들에게 이론적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의 화단적 정황은 전후세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앵포르멜이 종언을 고하고 세칭 4.19세대에 의한 실험미술의 바람이 범화단적으로 불어닥치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양화단의 최신 정보를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70년대는 한국현대미술의 본격적인 정착 및 확산기였다. [에꼴드 서울], [서울 현대미술제], [앙데팡당] 등 대규모 미술제를 중심으로 모노크롬을 비롯한 다원주의적 경향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명실공히 국제화의 시대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활발한 국제전의 참가속에서 한국미술은 가일층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야말로 선생의 활약과 업적이 돋보이던 때였다. ‘카뉴국제회화제’,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타이페이국제판화비엔날레’ 등 유수의 국제미술제에 심사위원으로 초빙됨과 동시에 파리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가하는 등 국제적 활약이 돋보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을 역임하면서(1986-91) 선생은 한국미술비평의 활성화에도 정력을 기울였다. 1986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한국지부를 창설하고 국제교류에 힘쓰는 한편, 이듬해에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기관지격인 ‘미술평단’을 창간, 미술비평인의 권익옹호와 지면확보에 공헌을 남겼다. 


 선생의 비평적 자세는 이론중심의 강단비평이 아니라 미술현장을 중심으로 한 현장비평적 성격이 짙었다. 유려한 문체와 해박한 지식으로 수많은 작가와 그룹 활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비평자세는 다음과 같은 글속에 잘 나타나 있다. 


 “작가와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은 필경 평론가가 작가의 작품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필수적인 것이 작가, 평론가 상호간의 신뢰감이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와 평론가가 동참은 커녕 오히려 작가 따로, 평론가 따로의 판국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러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작가, 평론가 상호간의 불신에서 기인된 것이다.” 


 최근에 환기미술관에서 열린 [故 이일선생 추모전]은 故 이일선생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기 위해 환기미술관 측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전시회였다. 70년대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다룬 서문모음집 ‘이일 미술비평일지’(미진사 刊)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이 전시회의 오프닝 파티에는 평소 고인과 친교를 나누었던 많은 미술계 인사들이 찾아와 고인을 추모하였다. 생전에 친분을 유지했던 작가들의 기증작품을 중심으로 선생의 유품과 업적물이 전시된 전시장은 고인의 생전의 활동과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일생을 한국의 미술발전을 위해 헌신한 미술평론가에 대한 추모의 전통이 자리잡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파리 유학시절을 함께 보냈던 유준상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일찍부터 낭만을 무척 즐겼던 것 같다. 선생은 항상 와인을 옆에 두고 독서와 그림 그리기, 그리고 시작(詩作)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러한 음주습관은 귀국후의 화단생활을 통해서도 계속되었다. 선생의 음주 스타일은 자작의 음미형으로서 유선생의 말 그대로 ‘애주가(愛酒家)’의 전형이었다. 시인 조지훈씨의 분류에 의하건대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다는 음주 9단, 즉 ‘열반주(涅槃酒)’였으니 술과 함께 그 고결했던 인품이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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