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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율 / 자연과 문명

윤진섭

자연과 문명


윤진섭


 차기율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조(情調)는 묵시적 분위기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밝은 조명보다는 어두운 조명이 그의 작품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번 OCI미술관에서 가진 그의 개인전 역시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이 짙게 깔린 가운데 전개되었다. 약간 암울해 보이기까지 한, 다소 묵시적인 분위기는 <순환의 여행/방주(方舟)와 강목(綱目) 사이>라는 일관된 그의 전시 제목을 받혀주는 작용을 하지 않나 싶다. 작품의 해석과 관련하여 일종의 참조적 기능을 하는 이 제목은 그가 일관되게 사용하는 만큼 연조가 깊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이 일관된 제목의 설정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의 발현체인 작업을 확장해 왔으며, 드로잉, 입체,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구사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왔다.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세계의 종말과 관련시켜 볼 때 일종의 구원론에 대한 상징이다. 따라서 차기율이 작품의 제목에 방주를 포함시킨 것은 명나라 때의 본초학자인 이시진의 저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유래한 ‘강목’과 함께 일종의 ‘치유’를 염두에 두지 않았나 여겨진다. ‘순환의 여행’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의 순환’을 상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차기율이 즐겨 다루는 재료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는 오래전부터 포도나무 줄기, 돌, 흙, 물 등등 자연물을 사용해 작업을 해 왔다. 그는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연의 설정을 통해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그의 드로잉 작품에 등장하는 거꾸로 매달린 새의 이미지는 곧 자연의 죽음에 대한 상징에 다름 아니다. 작품 속에서 식물의 뿌리를 연상시키는 선들은 거꾸로 매달려 죽어가는 새의 몸을 뚫고나가 종래는 인간의 몸에 이른다.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다룬 이 드로잉 연작은 ‘순환의 여행’이 의도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연결돼 있다는, 주역에 기초한 동양적 순환론인 것이며, 문명의 폐해에 대한 대한 치유로서 자연적 영성(靈性)의 회복(강목)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돌을 소재로 한 오브제 설치작업과 드로잉 연작에서 차기율은 물활론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에 영혼과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물활론적(animism) 관점은 사람이나 혹은 동물의 형상을 한 돌을 채취하는 탐석(探石)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그것은 설치작업과 짙은 톤의 검정색 드로잉 연작을 제작하는 것에 연결된다. 차기율이 나무나 돌, 흙 등 자연 재료를 다루는 데 따른 오랜 경험을 통해 장대한 시각적 성과를 낳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작품의 내용 면에서 상황의 설정이나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소 식상한 부분이 없지 않다. 특히 발굴 프로젝트는 70년대의 개념미술 이후 국내외의 유사한 선례가 없지 않아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기율의 이번 전시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몇 몇의 대작이 주는 강한 시각적 흡인력에 있다. 그 중에서도 갯벌의 흙을 떠서 거대한 규모의 판상에 집적한 작업은  스펙타클한 시각적 효과를 자아냈다. 갯벌에 서식하는 게의 구멍(집)을 일정한 직육면체 크기로 떠내서 불에 구워낸 이 테라코타 작업은 얼핏 자연 파괴처럼 보이지만, 생태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업이다. 바닷물의 순환에 의해 게 집은 하루 만에 다시 생성되지만,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갯벌의 황폐화는 바다 생물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차기율의 작업은 환경고발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며 이는 다시 생태 복원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의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는 특히 이 자연 생명의 존중과 생태의 복원 차원에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될 의미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안젤름 라일리(Anselm Reyle)의 개인전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순수한 시각적 측면에서 접근한 사례로 흥미를 끌었다. 40대 중반의 작가인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정전이랄 수 있는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아상블라주, 모노크롬 회화, 발견된 오브제, 라이트 아트 등등을 종횡으로 끌어들이는 가운데 특유의 회화와 설치미술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는 작품의 주재료가 되는 발견된 오브제들 상당부분을 서울에서 조달했다. 다양한 산업 폐기물을 서울 시내의 모처에서 대량으로 가져다 사용하고 전시가 끝난 뒤 되돌려 보낸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안젤름 라일리의 주된 아이디어는 이른바 일상과 예술의 혼융이라는, 이제는 현대미술의 다소 고전적인 수법이 된 방법론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작업을 이끌어가는 감각만큼은 매우 뛰어나다. 그는 특히 재료와 색채를 다루는 데 있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데, 대작에서 오는 스펙타클한 효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Ultracore>에서는 빨강색 형광 물감이 가득 든 소화기를 손에 들고 넓은 벽의 전면에 마구 뿌려대거나, 숫제 커다란 물감 통을 들이붓는 동작도 서슴치 않아 보는 사람에게 시원한 시각적 카타르시스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비록 대작은 아니지만, 안젤름 라일리 작품의 진수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업은 회화와 조각, 라이트 아트, 설치작업 등등 여러 유형이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와 설치, 라이트 아트가 중점적으로 전시되었다. 비록 설치작업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형형색색의 네온 튜브들이 이루어내는 기하학적 형태가 중심이 되고 그 주변에 다양한 산업 폐기물들의 집적이 이루어져 특유의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독일의 작업실에서 가져온 상당량의 채색된 캔버스 프레임들이 겹쳐 쌓아올려진 가운데 현장에서 구한 판재, 직선과 곡선의 선재, 철망 등 낡은 산업폐기물들이 뒤엉켜 마치 프랭크 스텔라의 부조회화 혹은 설치작업을 연상시키는 풍경을 연출하였다.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사이, 포도나무, 자연석, 스테인리스 스틸, 가변설치, 2011


 안젤름 라일리는 자신과 동년배의 작가들과는 달리 과거 모더니즘의 창고에서 공공연하게 다양한 조형적 선례들을 끄집어내는데 익숙하다. 헨리 무어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는가 하면, 쟝 뒤뷔페적인 요소도 있고 그런가 하면 잭슨 폴록 류의 드리핑 회화가 현란한 형광색 물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젤름 라일리의 작업은 가히 ‘모더니즘 미술의 창고’라 불릴 만 하다. 그는 선배들의 작업을 믹싱하여 자기화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처럼 보인다. 여러 명의 조수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그의 작업실은 미술의 실험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이 벌어진다. 실리콘과 합판 등 다양한 건축자재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형형색색의 알루미늄 호일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그의 회화는 조명과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이처럼 빛의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과거 모더니즘 선배들의 작업 유형과 다른 점이다.     


 안젤름 라일리의 작업은 현대 산업사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그가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현대문명에 대해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이를 미적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 산업사회의 부산물들을 자신의 작업의 주재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의성이 돋보인다. 또한 알루미늄 호일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재를 사용하여 탈(脫) 평면을 시도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아무튼 안젤름 라일리의 이번 전시는 그의 조형적 실험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었지만, 장소 관계상 보다 스펙타클한 대작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트인컬처 2014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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