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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 돌아오지 않는 강

윤진섭

돌아오지 않는 강

김영원 조각 40년의 의미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Yoon, Jin Sup(vice president of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rt Critics(AICA))



Ⅰ. 김영원 조각의 세계화 

 2013년 6월 1일, 조각가 김영원은 세계 미술의 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베니스 시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고도(古都) 파도바에서 세계적인 조각가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otti)와 2인전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전시는 2012년에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인 피에트라산타에서 열린 [2012 피에트라산타 한국조각축제]에 출품한 김영원의 작품을 본 피노티의 전격적인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다. SBS T.V와 가진 인터뷰에서 피노티는 “와우, 정말 흥미로운 조각가로군.”라고 작품을 접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작품이 무척 강렬하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김영원의 작업 도정에서 하나의 기념비적인 이정표가 될 이 전시는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김영원의 구상조각이, 바로 그 구상조각의 본고장인 이태리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가 객관적으로 검증되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김영원의 작품이 국제적 보편성과 인지도를 획득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건임에 분명하다. 노벨로 피노티는 베니스비엔날레에 두 번씩이나 초대된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이, 고대 로마시대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마리노 마리니로 이어지는 이태리 구상조각의 계보를 잇는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그와  2인전을 가졌다는 것은 김영원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조각계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전시의 규모 때문이다. 하나의 미술관이나 화랑에서가 아니라 파도바 시청광장을 비롯하여 스크로벤니공원, 에레미타니 시립미술관, 저크만궁 파도바시립미술관, 라 테카 화랑 등 파도바 시 전역에서 약 80일 간에 걸쳐 열린 이 전시는 주최 측인 파도바 시를 온통 축제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다. 플라비오 자노나토 파도바 시장은 높이가 무려 8미터나 되는 김영원의 대작 <그림자의 그림자>를 가리켜 “포모도로 작품이 설치된 이후 시청 앞에 이렇게 큰 대작이 세워지게 된 것은 김영원의 작품이 처음”이라고 말 하면서 영구 소장을 추진했지만 현지 사정으로 인해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 했고, 그 대신 높이 3미터에 달하는 다른 작품이 오페라재단(Fondation Opera Immacolata Concezione)에 소장이 되었다.  




Ⅱ. 국제무대로의 도약 

 인체는 김영원 조각의 근본을 이루는 소재이다. 그는 인체, 그중에서도 군살 없이 쭉 빠진 청년의 몸을 소재로 다양한 인체조각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 기간이 무려 40여 년이다. 그는 1977년에 발표한 <중력 무중력> 연작에 이르러 비로소 사실적인 기법에 토대를 둔 정통 구상조각의 세계에 진입했다. 당시 한국 현대조각의 대세는 추상적 경향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단순한 형태의 매스가 강조되는 미니멀리즘적 경향이 첨단적인 것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는 이종각, 조성묵, 박석원, 심문섭 등 미니멀한 추상조각을 추구한 선배 세대와는 달리, 사실주의적 기법에 뿌리를 둔 구상조각에 심취했는데 이는 사실주의적 구상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을 필두로 윤효중과 윤승욱, 김경승의 뒤를 잇는 계보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경향은 7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국전을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의 대세를 이루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부담이 없지 않았다.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이 가져다 주는 질을 추구하던 모더니즘 조각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정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에 의존한 구상조각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현대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영원은 그러한 상황과 온 몸으로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영원에게는 사실주의적 구상조각을 추구함에 있어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특히 그의 경우, 고대 그리스의 완벽한 비례 관계에 입각한 인체조각의 이상미를 추구하는 전통에 맥이 닿아 있는 관계였기 때문에 고심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한 발을 잘못 들여놓을 경우 진부한 구상조각이라는 레테르가 붙을 수 있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이 때 그가 선택한 것은 ‘상황성’의 부여였다. 단일한 작품이 아니라 다수의 작품을 한 곳에 설치하여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부한 구상조각의 단점을 극복하고 현대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성의 획득은 그때도 마찬가지로 작가들에게는 절박한 문제였다. 이른바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현대성의 문제는 자신의 작업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원이 본격적으로 화단 활동을 시작한 70년대 후반의 상황은 국전 중심에서 국제전 중심으로 관심의 추가 기울던 상황이었다. 작가들은 진부한 국전보다는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와 같은 세계 유수의 국제전에 참가하길 원했다. 

 김영원에게 있어서 국제무대에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1994년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참가였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이비라푸에라 공원 안의 ‘시실로 마타라초’관은 오스카 니메이어의 설계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영원에게 배정된 공간은 개인 부스가 아니라 복도처럼 생긴 긴 공간이었다. 주변에는 장 시오펑을 비롯한 7명의 중국작가들이 포진, 마치 적진에 고립된 것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난국을 극복해 나갔다. 현지에서 점토와 나무 등을 급히 구해 긴 원통형의 구조물을 만든 뒤 그 위에 점토를 두껍게 입히고 <조각-선(禪>이라는 제목의 현장 퍼포먼스를 행한 것이다. 이 작업은 상파울루비엔날레 총감독인 넬손 아퀼라가 “동양의 정신과 현대미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비엔날레 최고의 작가”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현지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김영원은 서서히 국제무대로 발을 넓혀나가게 된다.  



Ⅲ. 돌아오지 않는 강

 작가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회는 언제나 다른 기회를 불러온다. 특히 승부사적 기질이 강한 김영원의 경우에는 늘 그랬다. 밭을 가는 농부처럼 늘 근면한 그는 기회 포착에 능하다. 이는 그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준비된 작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40여 년에 이르는 그의 족적은 사실주의적 구상조각이라는 일관된 자세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는 여러 차례의 변곡점이 존재함으로써 그의 삶이 작품에 대한 고뇌로 충전돼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태생적인 조각가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설치와 영상, 퍼포먼스를 활용한 정도로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는 예술에 대해 그의 자세가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언젠가 나와의 대화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일부를 즉석에서 인용하여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농부처럼 어수룩하게 생겼지만,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나는 이미 세 차례나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긴 작가론을 쓴 바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자리에서 다시 작품에 대한 논의를 부언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이미 거대한 하나의 강줄기를 이루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부기해 둔다. 작가에게 있어서 작품은 강물에 흘려보낸 종이배와도 같다. 종이배가 작가의 손을 떠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순간, 그것은 작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산물로 변신한다. 미술사는 다름 아닌 그것에 대한 의미의 축적사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각가 김영원이 축적한 지난 40년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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