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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美 - 심미적 울림의 투명한 거소(居所)

윤진섭

이동엽은 한국의 단색화 1세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것이 그를 전후 한국 현대미술사에 서 중핵을 차지하는 모더니즘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첫 번째 근거이다. 그는 한국의 모더니즘이 전성기를 향해 나아가던 70년대 초반 [제1회 앙데팡당]전에 <상황> 연작을 출품, 미술계의 비상을 관심을 모은 바 있다. 한국미술협회가 창설한 이 전시회는 말 그대로 ‘독립전’으로서 특히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국제전에 나갈 작가를 선발하는 목적을 겸하고 있었다. 평면, 입체, 설치 등 미술의 첨단적 경향을 망라한 이 전시는 출품료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전시할 수 있어서 당시 젊은 작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 무렵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양국 간 미술 교류를 촉진시키던 재일작가 이우환이 단독 심사를 맡은 이 전시회에서 이동엽은 영예의 1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이듬해의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입체와 설치, 퍼포먼스 등 탈(脫)평면을 지향한 비엔날레의 특성상 회화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비엔날레 집행부가 출품 불가를 통보했던 것이다. 그러자 당시 [앙데팡당]전의 주최측인 한국미술협회는 이동엽을 [카뉴국제회화제]의 출품작가로 선정, 그는 1974년에 열린 [제6회 카뉴국제회화제]에서 영예의 ‘3인 공동 국가상’을 수상하게 된다. 약관 28세에 올린 국제전에서의 첫 개가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72년 당시 [앙데팡당]전을 둘러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에게 발탁되는데, 이는 그가 군(軍)에서 제대를 한 후 약 한 달간 일본에 체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마모토 사장의 집에 머물며 일본에서의 활동을 타진하는 기간을 갖게 된 것이다. 


 야마모토 사장이 그의 작품에 기울인 깊은 관심은 훗날 그를 한국 단색화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 당시 명동화랑 대표였던 김문호와 야마모토 다카시, 한국의 미술평론가인 이일,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 등이 상호 협력하여 만든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에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허황과 함께 공식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일과 나카하라가 서문을 쓴 이 전시회는 한국의 단색화가 해외에 알려지게 되는 첫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나카하라는 서문을 통해 ‘한국에 서양의 것과는 다른 델리키트한 뉘앙스를 지닌 백색 군(群)’이 존재한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이일은 같은 도록의 서문에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이다......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라는 견해를 밝혔다. 


 여기서 이동엽의 백색 회화와 관련시켜 볼 때, 미술평론가 이일의 발언은 매우 암시적이다. 그가 백색을 가리켜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으로 본 것이나 ‘하나의 우주’로 파악한 것은 백색이 지닌 ‘정신적 근원성’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말대로 이동엽 회화의 요체는 우주가 자아내는 공명에 있다. 주지하듯이 공명은 소리와 관련된 자연의 현상이다. 어떤 물체에 타격을 가했을 때 발생하는 소리는 음파의 세기에 따라 각기 존재의 양상을 달리한다. 예컨대 에밀레종의 소리는 처음에는 강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은은해지면서 대기 속으로 잦아든다. 그러한 현상을 염두에 둘 때 초기 이동엽의 그림에 나타나는 회색 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텅 빈 흰색 캔버스에 미묘한 색의 뉘앙스를 지닌 회색 선의 정체는 그것이 다름 아닌 소리를 시각화한 것임을 암시한다. 짙은 회색에서 중간색 톤의 회색을 거쳐 종국에는 흰색의 여백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계조(階調:gradation) 효과는 다름 아닌 소리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동엽이 동양의 미학과 사상에 기울인 높은 관심과 열정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70년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현장에서 이론적 핵심의 요체는 다름 아닌 ‘평면성’의 개념이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창도한 모더니스트 회화론의 요체가 바로 평면성이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 이른바 ‘미적 근대성(aesthetic mordernity)’의 상징으로서의 평면성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대변되는 서구 근대의 정신이 녹아든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근법의 발명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역사는 곧 캔버스에서 이미지를 제거하는 이미지 사상(捨象)의 역사였다. 그 지난한 역사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마네(Edouard Manet:1832-1883)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종결의 단초를 맞이한다. 캔버스의 평면성을 의식했던 마네 이후 서양의 회화는 말레비치를 거쳐 몽드리앙에 이르는 탈(脫)이미지의 역사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평면성으로 대변되는 그린버그의 비평 이론은 바로 이러한 유럽 회화의 역사를 정교하게 논리화한 것이었고, 바로 그러한 이론이 1970년대에 미술평론가 이일에 의해 한국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이동엽의 출세작이자 데뷔작이기도 한 <상황>(1972)은 옵셋 잉크로 그린 1백호짜리 캔버스 세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컵에 담긴 얼음이 녹는 과정을 갈색으로 컵과 얼음의 테두리만 그린 단순한 형태의 그림이다. 속건성의 옵셋 잉크로 10여 차례 이상 칠했기 때문에 캔버스의 전 표면에 작은 균열이 무수히 생겼다. 이 작품이 1972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출품되었을 때 동경화랑의 야마모트 다카시 사장은 그것을 보고 “조선의 백자를 연상시킨다”며 깊은 호감을 표명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질료와 행위의 문제에 고심하고 있던 이동엽은 ‘평면주의로 가야 모던해 진다’고 여겼던 화단의 대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서구의 극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이동엽은 ‘동양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한국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그는 동양 산수화의 특징인 여백의 문제에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잡지를 보면서 컵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리컵의 투명성에 주목하면서 서구적 평면성의 개념이 아닌 직관적 공간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앞서 ‘평면성’ 운운한 그의 발언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당시 평면성에 관한 서구적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캔버스 표면을 흰색으로 칠한 그의 행위는 평면성 개념의 수용과 동시에 이를 다른 차원으로 전이(轉移) 내지는 의미부여하고자 했던 뜻으로 풀이된다. 이른바 여백에 대한 사유인 것이다. 

 주지하듯이 여백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화면에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에서 여백이란 개념은 생성되지 않는다. 예컨대 화면을 회색톤의 물감으로 칠하고 연필로 무수한 빗금을 그은 박서보의 <묘법>에서 여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서구적 평면성의 개념에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대변되는 동양의 정신성을 투사하여 내면화한 것이다. 반면에 이동엽의 그림은 동양의 산수화에서 산이나 구름이 존재해야 여백의 개념이 파생되는 것처럼, 컵과 얼음을 암시하는 형상의 존재가 있기에 그 나머지 공간이 여백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컵의 투명성에 주목한 이동엽은 이를 우주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의식, 곧 마음의 문제를 추구하게 된다. <상황> 연작 이후 현재까지 약 4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가 추구한 예술의 세계는 다름 아닌 ‘비움의 미학’으로 상징된다. 초기의 컵과 얼음을 연상시키는 선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분절되고 파편화되면서 80년대 이후의 <사이> 연작에 이르면 투명한 공간 속으로 소멸된다. 동양화에서 쓰는 평필을 사용하여 붓의 한 면은 횐색 물감을, 다른 한 면은 회색 물감을 묻혀 반복적으로 칠하는 이동엽 특유의 기법은, 그의 말을 빌리면 ‘평면의 추구’를 본래의 목적으로 삼아 고안된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공명’ 즉, 소리가 지닌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의 질서 내지는 자연의 질서를 상기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동엽의 단색화가 작품에 대한 관객의 깊은 관조와 이에 따른 감응을 통해 소통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이의 반증이다. 


 이동엽의 공명에 대한 사유는 어느 날 목탁소리를 들은 체험에서 유래한다. 그는 목탁소리는 그냥 단순히 울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목탁의 구조에 기인한다. 알다시피 목탁에는 구멍이 나있는데 이 특이한 구조는 외부와 내부를 관통하는 상호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공명의 내면화는 그대로 이동엽의 화면에 투사돼 회색조의 계조를 통한 공명의 시각화 내지는 구조화에 이른다. 그의 그림에서 공명의 시각화는 회색의 계조로, 구조화는 상호 대칭을 이루며 흰색의 바탕 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회색의 지대(色域)로 나타난다. 
 

 고(故) 이동엽은 평생을 전업작가로 산 사람이다. 그는 4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채색을 사용한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흰색과 회색만을 부여안고 살았다. 그를 인터뷰한 한 기자는 추운 겨울날 불기도 없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 목격담을 전한 바 있다. 그는 과묵한 편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생활의 불편함과 작업 초기에 누렸던 명성에 비해 상대적인 저평가에서 오는 좌절감, 그리고 생애의 어느 시기에 겪었을 법한 부당한 처사로 비롯된 화단의 특정인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 스트레스 등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80년대 중반에는 원형탈모증으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이상은 그의 소심한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일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처럼 다양한 심리적 소인들에 기인한 정신적 내지는 육체적 고통을 화면을 통해 미적으로 삭혀 나갔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승화’의 미학적 성취를 이룬 그의 화업은 오늘날 1세대 한국 단색화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데 이의가 없게 만든다. 


  이동엽 회화의 요체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대립과 길항관계에서 파생되는 긴장감의 시각적 현시에 있다. 그것은 극미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를 관통하여 순환한다. 따라서 관객이 보는 시각적 현시물은 밖으로 드러난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 그 깊이를 보지 못하면 그것이 가리키는 본체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그림이 마음의 반영물인 이유이다. 작가의 마음(作意)과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이 통할 때 제대로 된 감상이 이루어진다. 이때 이동엽의 그림은 우주의 철리로 통하는 관문이 된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한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즉 ‘도가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며, 이름이나 명칭이 개념화되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관객이 그의 그림에서 굳이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할 때 대개는 감상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다. 그의 그림은 의미의 다발이 아니라 오로지 직관에 의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심미적 울림(共鳴)의 투명한 거소(居所)이기 때문이다.  

  이동엽의 그림은 극도의 비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유비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그림을 감상할 때 관객은 텅 빈 여백의 공간을 보거나 섬세하게 칠해진 옅은 회색의 색역(色域)을 바라보게 된다. 형태심리학에서 말하는 ‘도(圖:figure)’와 ‘지(地:ground)’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도, 즉 형태를 보면 여백을 잊고, 반대로 지, 즉 여백을 보면 형태를 잊는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 즉, 찰나(刹那)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동엽이 이 찰나의 순간에 주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미시적으로 볼 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틈, 즉 ‘사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굳이 장자에 나오는 백정의 고사나 현대 미시생물학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바다. 이동엽이 관심을 기울인 부분이 바로 이 미시의 세계이다. 그것은 아주 긴장을 요하는 끈질긴 작업으로부터 생성된다. 붓 끝의 양쪽에 흰색과 회색의 물감을 묻혀 희색으로 조성된 캔버스의 바탕 위에 극도로 집중해서 반복적으로 바를 때,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무수한 색과 색의 층이 형성되는 동시에 사이(間隙)가 만들어진다. 또한 구조적으로는 하나의 색역과 다른 색역 간에 존재하는 선명한 ‘사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넣기도 한다. 이때 관객이 보는 것은 명백히 드러난 구조로서의 사이, 곧 틈이다. 일상적으로는 ‘문틈으로 밖을 본다’는 문장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 이동엽이 자신의 작품은 곧 ‘몸’이라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밖을 보는 주체로서의 몸이요,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작업에 집중할 때 몸을 잊는다는 의미에서의 몸이다. 이동엽의 경우, 이때의 구조화는 곧 사물의 질서에 다름 아니다. 

 이동엽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심미적 의미는 심리적 안정과 이를 통한 치유의 효과이다. 지극히 금욕적인 그의 화면은 이를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분히 가라앉은 평정심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화면을 상하 혹은 좌우 대칭적으로 가른 구조적 특징에 기인하는 것 같다. 또한 뚜렷이 구분된 경계로부터 점진적으로 엷어져가는 회색 톤의 계조가 주는 심리적 효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초월적인 명상의 경지는 오랜 기간에 걸쳐 획득된 작가의 내공에 기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기존의 그의 작업에 대해 내려진 ‘매너리즘’과 같은 언사는 온당치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히려 득공(得功)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색과 형에 관한 극도의 절제를 통해 심오하며 숭고한 미의 영역을 확립한 이동엽의 단색화는 ‘스펙타클’한 물질위주의 현대인의 가치관에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그의 작품은 ‘채움’보다는 ‘비움’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기호의 욕망에 대한 덧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미술계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오늘날의 각종 전시회에 범람하고 있는 스펙타클한 거대 물량주의와 그 아래 서식하고 있는 작가들의 인기영합주의, 자본의 침투와 이에 따른 상업화의 폐해에 대해 경고음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7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긴 기간을 고독하게 작업에 몰두하다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이 세상에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학고재갤러리 이동엽전 도록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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