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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로 비엔날레에 관한 소고(小考)

윤진섭

Ⅰ. 들어가는 말

상파울로 비엔날레(Bienal De Sao Paulo)가 2001년으로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였다. 제25회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원래 창설 만 50주년이 되는 작년에 행사를 열기로 하였으나, 내부 사정에 의해 1년이 연기되었다. 작년(2001)은 브라질 발견 500주년과 비엔날레 창설 50주년이 맞물린 해로서 브라질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5회 행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치루기로 하였으나 사정상 한해를 미루게 되었던 것이다.

흔히 베니스 비엔날레, 휘트니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간주되는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남미권의 대표적인 문화적 중추(hub) 가운데 하나다. 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비엔날레는 가령, 베니스 비엔날레가 유럽을 대표하고, 휘트니 비엔날레가 미국의 미술을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포석이자,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미술을 세계에 전파하는 대표적 창구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창설 배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비엔날레의 창설자인 프란시스코 마타라초 소브린호(Francisco Matarazzo Sobrinho:일명 시실로(Ciccillo, 1989-1977))는 이태리 이민자 출신의 사업가겸 미술품 소장가로서 194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아카데믹한 화풍의 고전 미술품들을 주로 수집하였다. 그가 현대미술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은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권위 있는 비평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현대미술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에 대한 점진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미술이 국경을 초월하여 미래의 브라질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매체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문화적 협조자이자 부인인 욜란다 펜테아도(Yolanda Penteado)와 함께 상파울로 근대미술관(Museo de Arte Moderna de Sao Paulo)을 설립하게 된다.

상파울로 비엔날레가 창설되게 된 것은 1948년에 시실로 마타라초가 브라질 화가 대표단을 이끌고 베니스 비엔날레를 참관하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보면서 브라질에도 이와 유사한 미술행사가 있어야 되겠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시실로 마타라초는 문화계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비엔날레 창설에 필요한 조언을 구했고, 종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이 거창한 프로젝트를 추신해 나갔다. 근대미술관 및 비엔날레의 창설에 이바지함은 물론 현대미술관(Museo de Arte Contemporanea), 영화산업(베라 크루즈 영화사), 건축, 비엔날레상 등에 이르기까지 시실로 마타라초는 브라질 미술의 위대한 후원자였으며, 진정한 문화생산자이자 창조자였다.
상파울로 비엔날레가 열리는 이비라푸에라 공원의 거대한 독립건물을 ‘시실로 마타라초’관이라고 명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열정에 바치는 브라질 국민들의 경의의 표시이다.1)

이 글의 목적은 상파울로 비엔날레가 50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고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데 있다. 이러한 시각은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등 가히 비엔날레의 홍수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각 문화권 내지 각 국은 현재 소리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다. 이른바 문화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실제의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판가름나는 게 특징이지만, 소리 없이 진행되는 문화전쟁은 쉽사리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데 판단의 어려움이 있다.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족적이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한다.




Ⅱ. 남미 문화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정체성

브라질은 우리나라의 정 반대편에 있다. 지구본을 놓고 서울에서 지구의 중심을 향해 약 45。 기울기로 관통하면 브라질에 이른다. 비행기로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이다. 인구가 약 2천만 명에 육박하는 상파울로 시는 뉴욕, 동경, 파리, 모스크바, 북경과 더불어 세계 10대 거대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다.

지구본을 놓고 보면 파나마 운하가 있는 중미를 중심으로 마치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마치 누글누글한 엿판을 양쪽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두 대륙은 엇 대칭의 모습으로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다. 언어상으로 보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대륙은 영어권에,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남미대륙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권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차이는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경영의 소산이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유럽의 군주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새로운 통상로를 개척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15세기에 비롯된 지리상의 발견은 나침반의 사용에 의한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신대륙 발견의 거점이었다. 1500년, 포르투갈의 선장 카브랄(Cabral)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를 따라 인도로 향했으나 갖은 신고(辛苦) 끝에 도착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처음에는 먼저 도착한 스페인 인들에 의해 ‘참다운 십자가의 섬(Vera Cruz)’으로 불렸지만, 그 뒤 그곳에서 나는 특산물의 이름을 따 브라질(Brazil)로 개명되었다. 한편,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제국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이사벨라 여왕의 재정적 후원아래 이태리 출신의 선원인 컬럼버스(1446?-1506)가 1492년에 산 살바도르에 상륙한 이래, 스페인인들은 신대륙 정복을 가속화하여 1519년에 코스테스(Hernando Cortez:1485-1547)에 의해 멕스코의 아즈테크 정복이, 1533년에 피사로(Francisco Pizzaro:1471?-1541)에 의해 잉카제국이 각각 정복되기에 이른다. 이후 스페인은 식민지 경영을 극대화하여 종래는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제국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유럽의 다른 열강에도 영향을 미쳐 영국과 프랑스가 동참하게 된다. 영국은 헨리 7세의 후원하에 카보트 왕자(John Cabot)가 1497년 카나다, 뉴펀들랜드, 라브라도르 등지를 탐험, 영국의 소유권을 확보하였으며, 프랑스의 경우는 1534년에서 41에 걸쳐 까르띠에(Jacques Cartier)가 카나다의 세인트 루이스 지방을 발견하였고, 1604년에는 노바 스코시아(Nova Scotia)에 식민지를 건설, 1608년에 생쁠랭(Samuel de Champlain)이 퀘백을 복속시키게 된다.2)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우는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은 문화적 정체성의 혼미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중남미 국가들은 인종학적 혹은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공통적으로 혼성문화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이 그렇고 이민이 또한 그렇다. 혼혈과 이민은 중남미 문화의 핵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이다. 백인, 흑인, 원주민, 혼혈인, 아시아인들이 뒤엉켜 사는 상파울로 시는 가히 인종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 하며, 이는 뉴욕, 파리, 런던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1998년, 제24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예술감독 파울로 헤르켄호프(Paulo Herkenhoff)가 자국의 역사 속에서 식인풍습의 전통을 추출하여 ‘식인풍습과 역사의 핵으로서의 카니발리즘(Antropofagia and Histories of Cannibalism of the Nucleo Historico)’을 주제로 삼은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는 브라질 원주민들이 행했던 피와 살의 의식(儀式)을 오늘의 국제적 정세에 대입하여 해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육을 먹는 의식은 공동체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고 혼탁해진 영혼과 삶을 정화시키기 위한 기제이다. 그것은 봉헌의식에서 연유한다. 브라질 원주민들은 그러한 식인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헤르켄호프는 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그는 아시아ㆍ아프리카ㆍ라틴 아메리카ㆍ중동ㆍ유럽ㆍ아메리카ㆍ오세아니아 등 각 권역의 큐레이터들에게 식인풍습을 과제로 주어 세계 문화의 새로운 ‘지도그리기(cartographing)’를 시도하였다. 유럽인의 방식에 익숙한 ‘메르카토식’ 지도작성법이 아닌, 자국의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순전히 자신의 시선으로 ‘길(Roteiros)’을 찾아나가자고 제안하였다. 그 결과, 아시아 지역을 큐레이팅한 태국의 미술사가 아피난 포샤난다(Apinan Poshananda)는 카니발리즘을 후기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나섰다. 즉, 인육을 ‘먹는(to eat)’ 카니발리즘의 특성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금융기관이 아시아의 통화(通貨)에 가하는 공략이나 약탈에 비견될 수 있다는 정치적 해석을 가했던 것이다. ‘먹는다’는 가학적 행위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미국의 막강한 금융자본에 의한 무차별적 탐식이 숨겨져 있다는 식이다.

헤르켄호프의 뒤를 이어 제25회 상파울로 비엔날레(2002)를 기획한 알퐁스 후그(Alfons Fug) 역시 남미가 처한 정치ㆍ문화적 현실에 주목한다. 그는 비유럽권의 문화에 기획의 초점을 맞추었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정치ㆍ경제가 분리, 심화되는 현시점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이 막중하다고 역설한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두 개의 반구(hemispheres)를 묶는 본드의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유러피안ㆍ아프리칸ㆍ인디안ㆍ아시아인들이 혼재한 가운데 생산활동을 벌이는 상파울로 시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남-남의 통로(South-South Track)를 따라 비유럽 문화 사이에 다리를 건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후그는 이전 비엔날레보다 더욱 많은 아시아ㆍ아프리카 작가들을 초대하였던 것이다. 3)


헤르켄호프와 알퐁스 후그의 시각의 공통점은 유럽과 미국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비단 중남미뿐만 아니라 아시아 내지 아프리카 제국이 경험했던 뼈아픈 상흔이 존재한다. 소위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수용으로 대변되는 제3세계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모더니즘의 수용사를 돌이켜 볼 때,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역사적 경험은 기묘한 데가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럽과 같은 문화적 뿌리를 지니고 있지만, 후대에 와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해야 하는 역설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의 문화적 뿌리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의 유럽문화이다. 이는 현재 중남미 권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미루어 볼 때 자명한 사실이다.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로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유럽이 이 권역의 문화적 토양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보르헤스와 마르께스는 스페인어로 창작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설 속에는 역사를
통해 배태된 남미 특유의 정신과 문화적 전통이 꿈틀대고 있다.

전통적으로 남미의 문학과 예술에는 작가들의 현실참여 내지 사회의식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19세기 말엽, 독립군주제 하에서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브라질을 제외한 대다수의 라틴 아메리카 제국은 시민전쟁과 폭력, 독재로 얼룩져 있었다. 그 와중에서 시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술상의 테크닉을 차분히 연마하기보다는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술의 현실참여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유럽과 남미의 예술을 비교해 볼 때, 유럽의 예술사가 테크닉의 전승사인 반면, 라틴 아메리카의 그것이 그때 그때마다 섬광처럼 나타나는, 진 프랑코의 표현을 빌리면 ‘신선한 출발(fresh start)’인 까닭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예술이 지닌 독특한 역사와 환경에 기인한다. 이러한 양상은 유럽과 매우 상반되는 것이다. 가령, 유럽의 미술사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단선적 역사이다. 희랍에서 출발하여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를 거치는 동안 유럽의 미술은 선대의 유파가 후대의 유파에 영향을 미쳐 분명한 계보를 형성한다. 알프레드 주니어 바(Alfred Jr. Bar)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유파의 퍼레이드는 마치 덩굴성 식물의 뿌리처럼 후대로 내려올수록 곁가지를 쳐 점점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반면에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한 아시아ㆍ아프리카ㆍ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미술사는 파편화된 미술사이다. 그것은 외부적 충격이나 내부적 동인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불연속선을 이룬다.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얼마 후 또 다른 섬광이 이는 충격의 연속선을 그린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모더니즘, 신세계주의, 인디안주의의 사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적으로 사회적 태도에 기인한다. 4)

기댈 전통이 없다는 사실은 결국 ‘모태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요인이다. 전통의 뿌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반대급부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갈증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경우,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마치 신원을 모르는 고아가 스스로 출생증명서를 만드는 것처럼 힘겹고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Ⅲ.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성공 전략

제1회 상파울로 비엔날레가 열리기 전만 해도 브라질의 미술은 시대적 조류에 뒤쳐져 있었다. 브라질에 추상미술이 수입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였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브라질 미술은 전통적인 아카데미시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미술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의 분수령을 이룬 것은 1951년의 비엔날레 개최였다. 1951년 10월 20일, 비엔날레가 오픈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브라질의 현대미술은 점차 ‘코스모폴리턴’한 시각을 지닐 수 있게 되었고, 여타의 산업국가들과 더불어 현대성에 대한 동반자 의식을 갖게 되었다. 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인 평균적인 감각은 브라질인들로 하여금 적어도 다른 나라에 뒤쳐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관해 1970년 마리오 페드로사(Mario Pedrosa)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 브라질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록 베니스 비엔날레를 본 따 만들기는 했지만, 브라질 미술을 가두고 있던 좁은 틀, 즉 지역적인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비엔날레의 장점이 세계각지에서 미술관계자들이 모여 서로 소통을 하고 친교와 더불어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제1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는 1,854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는데, 프랑스를 대표하여 피카소, 알베르토 쟈코메티, 앙드레 마송 등이 참가했으며, 벨지움의 르네 마그리뜨와 폴 델보의 작품들이 선보였다. 이러한 세계적 거장들의 참가는 미국의 게오르그 그로츠를 비롯하여 리오넬 파이닝거, 에드워드 호퍼, 스튜어트 데이비스, 마크 로드코,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의 작품들과 더불어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브라질이 거둔 실익은 초대작가 부문에 라사 세갈, 칸디도 포르티나리, 에밀리아노 디 카발칸티, 리비오 아브라모와 같은, 당시로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브라질 작가들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개최국이 누릴 수 있는 특혜인데, 이 점은 우리도 깊이 새겨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제1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는 오스트리아, 벨지움, 일본, 캐나다를 비롯한 23개국에서 729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는데, 이 숫자는 건축 32명, 음악 3명, 영화 5명이 포함된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전체 숫자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40 명이 브라질 작가라는 점이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비엔날레의 설립자인 시실로 마타라초와 그의 부인 욜란다는 넬슨 록펠러의 소개에 의해 뉴욕 근대미술관(MoMA)의 멤버가 되었다. 5)

세계적인 명작들을 선보이는 일은 초기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기획 전략이었다. 1953년에 개최된 제2회 비엔날레에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과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초대한 것과 같은 사례가 그것이다. <게르니카>는 이 전시 이후에 안전과 보존을 이유로 현재의 소장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밖을 떠난 적이 없으니, 이 또한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상파울로 시 설립 400주년 기념에 맞춰 2회 행사의 오픈은 1953년 12월로 연기되었다. 장소는 이비라푸에라 공원 안에 오스카 니메이어의 설계로 지은 ‘시실로 마타라초’관이었다. 이후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줄곧 이 전시관에서 개최되게 된다.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세계적 거장들을 위한 특별전시실을 마련하였는데, 2회에는 폴 클레, 피에트 몬드리안, 에드바르 뭉크, 알렉산더 컬더, 제임스 앙소르, 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출품하였다.

이 짧은 지면에 50년에 이르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역사를 기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2회 행사에 초대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왜 상파울로 비엔날레가 세계적인 비엔날레로 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해소하게 된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피카소와 브라크를 비롯하여 후안 그리, 페르낭 레제, 소니아와 로버트 들로네, 마르셀 뒤샹과 같은 입체파의 거장들의 작품 57점을 콘스탄틴 브랑쿠시, 쟈크 립시츠, 오시프 자드킨의 작품들과 함께 제시한 프랑스, 움베르트 보치오니, 카를로 카라, 쟈코모 발라, 루이지 루솔로, 지노 세베리니 등 미래파 작가들의 작품 40여 점을 출품한 이태리, 저명한 미술사학자 허버트 리드가 선정한 헨리 무어의 작품을 출품한 영국 등으로 인하여 비엔날레는 가히 현대미술을 등에 업은 각 국의 경연장을 방불케 하였다.

이상의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각 시기의 현대미술 조류를 즉각적으로 반영하거나, 미술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인지도와 중요성을 높여 나갔다. 바넷트 뉴만, 재스퍼 존스, 세자르, 죠셉 앨버스, 앤소니 카로, 바실리 칸딘스키, 시그마 폴케, 필립 거스통, 피에르 만조니, 펭크, 조나단 보로프스키, 재니스 쿠넬리스 등 미술의 중요한 시기에 등장한 작가들을 초대함으로써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역사가 곧 현대미술의 역사라는 점을 암암리에 각인시켰던 것이다. 50년에 걸친 역사상 24회의 전시에 148개의 참가국, 연인원 10,600명의 초대작가, 56,400점의 출품작이 이 점을 증명해 준다.




Ⅳ. 나오는 말

비엔날레는 이제 의심할 수 없는 세계 문화예술의 각축장 내지는 경연장이 되고 있다. 현재 약 2백여 개에 이르는 세계의 각종 비엔날레는 지금 현재도 열리고 있거나 새로운 행사를 준비하는 중에 있을 것이다. 거기에 발맞춰 소위 비엔날레 특수를 노리는 전문적인 큐레이터들이나 작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엔날레 메뉴는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식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엔날레의 폐해를 우려하는 식자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또한 비엔날레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 서울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전 미디어시티 서울), 대구청년비엔날레 등 비엔날레의 명칭의 과잉은 이제 단순한 유행의 차원을 넘어 경제적 손실이라는 우려마저 낳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그것이 유행이나 경제적 손실이냐를 따지기 전에 과연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예술의 질적 향상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이다. 예술감독을 선정하는 일에서부터 행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진행하는 실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 처리 방식은 보다 합리적인 자세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경우,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바로 그와 같은 합리성의 결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빈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초가집을 불태우는 만용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우리나라 비엔날레의 현 주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장구한 역사는 우리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1) A. Andrea Matarazzo, The Biennial, By Cicillo, Bienal 50 Anos, Fundacao Bienal de Sao Paulo, pp.17-19

2) 차하순, 사양사총론, 탐구당, 1982, pp.289-191

3) 윤진섭, 상파울로비엔날레, 라틴문화의 거점, Art in Culture, pp.135-6

4) Jean Franco, The Modern Culture of Latin America, Praeger, pp.1-2

5) Bienal 50 Anos, p. 78








참고문헌
ㆍBienal 50 Anos 1951-2001, Hundacao Bienal de Sao Paulo, 2002
ㆍ24th Bienal de Sao Paulo, Nucleo Historico:Antropofagia, 1998
ㆍ25th Bienal de Sao Paulo, Iconografias Metropolitanas, Paises, 2002
ㆍ25th Bienal de Sao Paulo, Iconografias Metropolitanas, Cidades, 2002
ㆍ25th Bienal de Sao Paulo, Roteiros, Roteiros, Roteiros, Roteiros, 2002
ㆍ윤진섭, 상파울로비엔날레, 라틴문화의 거점, Art in Culture, 2002. 7월호
ㆍJean Franco, The Modern Culture of Latin America, Praeger, 1967
ㆍ차하순, 서양사총론, 탐구당, 1982
ㆍEdward Mcnall Burns, Western Civilizations-Their History and Their Culture, Sixth Edition, W.W.Norton & Company, 1958


- 출처 / 현대미술관연구 제13집 2002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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