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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그 거대한 항모(航母)

윤진섭

한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의 기치를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당시 필자는 중국의 한 고위직 관리를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연수차 서울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필자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긴 대화 끝에 나은 각별한 주문이었다. 그는 중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중국은 거대한 항공모함과 같습니다.”
찻잔에 남은 마지막 차를 천천히 마시고 나서 그가 말했다.
“일단 방향을 잡고 선체를 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그 다음에는 무서운 속도로 나아갈 것입니다.”
말을 끝낸 그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93년 겨울의 일이다. 당시는 한국정부가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마악 중국과의 수교를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필자는 ‘특정국가 방문’이란 푸른 색 스탬프가 찍한 여권을 소지하고 어렵사리 북경을 방문할 수 있었다. 홍콩을 출발한 중국민항 여객기가 북경공항에 착륙한 시각은 밤 9시 무렵. 공항의 밖은 몹시 어두웠고, 중국인들 특유의 억양으로 주변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광장의 건너편 고층 건물 옥상에 우뚝 솟아있는 광고판이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삼성과 엘지(LG)의 상품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북경의 관청에는 팩스가 귀할 때였다. 전시회와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던 필자의 일행은 본국과의 교신 때문에 애를 먹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작가들이 참가한 전시회는 우여곡절 끝에 중국미술관에서 무사히 개막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필자의 기억에 선명한 경구는 “중국에서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라는 것이다.


중국현대미술의 대부 격인 미술평론가 리 시엔팅(栗憲庭)을 비롯하여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참여작가인 왕 광이(王廣義), 당시는 무명이었으나 최근 국제적인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송 똥(宋冬) 등은 중국의 대표적인 언더그라운드 미술인들이다. 당에 복무하는 리얼리즘 미술이 중국정부가 표방하는 공식적인 미술이라고 한다면, 서구 미술의 영향을 받은 소위 전위미술은 대표적인 언더그라운드 미술로 간주되어 중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왔다.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작가들이 힘을 규합하여 도전을 감행한 사건이 바로 1989년 당시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중국현대미술전>이었던 것. 이 전시회의 기획자가 바로 리 시엔팅이었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이 중국사회에 던진 충격은 매우 큰 것이었다. 같은 해에 벌어진 천안문 사태와 함께 이 사건은 중국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일종의 지각변동이었던 것이다. 이 전시회에서는 실제의 권총을 발사한 퍼포먼스가 벌어져 중국 사회를 놀라게 했는데, 중국 고위층의 친척이기도 한 문제의 이 여성작가는 이 일로 인해 해외로 도피하게 된다. 필자는 96년 무렵 호주에서 이 작가를 우연히 만나 그 당시의 긴장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갈망이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 천안문 사태였다고 한다면, 체제 유지를 위한 중국정부의 책략은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의 형태로 나타났다.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를 향한 진압군의 발포와 탱크의 돌격으로 인하여 가까스로 시위는 진압될 수 있었지만, 중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중국 정부의 큰 손실이었다. 이 사태로 인하여 중국 반체제 인사들의 연이은 해외 망명과 함께 많은 수의 문화예술인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지하로 잠적해 들어갔다. 지하로 잠적한 이들은 원명원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당국의 눈을 피해 잠시나마 예술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마침내 1996년 원명원 사태가 터지게 된다. 천안문 사태이후 반체제 문화예술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이 당국에 의해 폐쇄, 해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은 많은 중국의 문화예술인들을 해외로 망명하게 만든 기폭제였다. 미술의 경우, 많은 수의 큐레이터, 작가들로 하여금 파리를 비롯한 서구의 여러 도시로 흩어지게 만든 이 사건이 거꾸로 중국 현대미술의 세계화를 가져온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다. 오늘날 국제적인 큐레이터로 성장한 페이 다웨이(費大爲)를 비롯하여 후 한루 등의 입지는 원명원 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66년, 강청을 비롯한 4인방 시대에 시작하여 1976년 모택동의 서거로 마감하는 문화대혁명은 중국사회를 멍들게 한 커다란 병인(病因)이다.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으킨 이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투쟁을 강조한 대중 운동으로서 인민들의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숙청한 일종의 권력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1950년대 말의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기화로 중국공산당 내부에 발생한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노선대립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중 노선을 강조하였으나,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은 실용주의를 강조, 공업전문가를 중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수정주의를 비판하고 급기야는 반대파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홍위병의 준동으로 혼란의 극에 달한 중국사회에서 혁명기간 동안 숙청된 인원은 약 300만 명에 달하며, 극심한 경제적 피폐와 사회적 혼란, 부정부패의 만연 등이 중국을 낙후시킨 원인이 되었다.
장샤오강(張曉剛:1958- ), 팡 리준(方力鈞:1963- ), 유에 민준(岳民君:1963- ) 등 세 작가는 유년시절에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중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이 작가들은 중국 현대사회의 질곡을 직접 체험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작가들은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국내의 미술애호가들에게도 친숙하며, 4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있다.
이 세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 특징은 사회에 대한 냉소이다. 블랙 유우머를 연상시키는 이 미감적 특징이 바로 중국의 미술평론가 리 시엔팅이 ‘냉소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유년시절에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문화대혁명의 충격은 이들 각자의 뇌리에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령, 장 샤오강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부모가 재판에 회부된 관계로 어린 동생들과 함께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는데, 당시의 암울했던 경험이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회색 혹은 핑크색 단색조로 그려진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초상은 암울하기만 했던 유년시절의 회상록이다.
리 시엔팅에 의하면 냉소적 리얼리즘은 ‘불공스런 유우머와 무관심’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왕 광이로 대표되는 ‘정치적 팝’과 함께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적인 회화양식이다. 이 냉소적 리얼리즘은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사회에 빠르게 번지기 시작한 기만과 반(反) 이념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일반화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또한 중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사상적 경험이었던 문화대혁명이란 집단적 히스테리에 대항하는 힘없는 민중들의 풍자와 자조를 대변하고 있다.

중국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한국에서 이는 중국의 열풍은 공룡과도 같은 중국대륙이 기지개를 켜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그에 따라 진전되는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우위는 이제 우리가 중국을 재평가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공룡의 큰 발자취를 좇아가기에 급급한 한국의 종종걸음이 더뎌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 이제 거대한 항모(航母) 중국은 확실한 방향을 설정하고 발진하고 있다. 그 목표는 과연 어디일까?

- 시사주간지 <차이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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