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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의 작품세계-존재의 심연

윤진섭

존재의 심연

김희곤의 작품세계



Ⅰ.
한 작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작가의 생, 그 깊은 내면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일을 의미한다. 이때 작품은 그 작가의 심리적 분비물로서 그 내면의 세계를 알기 위해 떠나는 여로의 길목에서 만나는 참고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작품은 작가와 동일시되기도 하며, 작품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작가를 아는 것과 같다는 명제를 낳기도 한다. 작가란 무엇인가. 그는 세계에 대해 말을 거는 자이다. 또한 침묵하는 세계내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다. 의미란 무엇인가. 이해다. 고로 작가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의 그물을 드리우는 투망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자이며, 창조의 고통을 감내하며 사물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이해의 옷을 입히는 자이다.




Ⅱ.
김희곤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검은 색의 필선들이다. 그래서 그 신경질적인 필선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김희곤 작품의 이해에 도달하는 첩경처럼 여겨진다. 그 검은 선의 정체는 그의 작업의 근원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찾아질 수 있으며, 그것은 작가에 대한 이해와도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그 선의 출처는 과연 어디인가.
1998년, 베아트리체 아트홀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한 <자화상>(하드보드에 유채, 102.0x83.3cm)과 <아담과 이브>(하드보드에 유채, 77.2x51.2cm), <자화상>(캔버스에 유채, 390.9x162.0cm) 등등에서 검은 선들의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의 작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으나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이 작품들에서다. 그 가운데서도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두 개의 자화상이다. 편의상 앞의 것을 <자화상1>이라 하고 뒤의 것을 <자화상2>라고 하자.
<자화상1>은 인간 존재의 불안을 주제로 한 것이다. 사람이 느끼는 불안의 감정내지는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성찰이 그림의 배면에 깃들어 있다. 작품의 명제를 ‘자화상’이라고 붙인 것은 비록 이 그림이 작가의 얼굴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나, 내면의 풍경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시된다. 작품의 한 가운데 노란 색 물감으로 표기한 ‘610717-1227108’이란 숫자는 작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이다. 이 숫자는 작가의 사회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사회적 기호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화상이란 명제의 작품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고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놓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대신 사회적 기호인 주민등록번호를 표기함으로써 자화상에 값하는 행위를 한 것은 일종의 ‘거리두기’를 시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객관화의 시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자신의 신체 일부, 즉 얼굴의 묘사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와 관련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란 무엇인가? 나 외의 사람, 즉 타인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불안의 감정은 타인과의 관계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검은 필선은 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의 여기저기에 출몰하고 있는 검은 손들, 어두컴컴한 미지의 공간을 향해 촉수처럼 뻗어 나가는 손들은 내면의 공포를 암시한다. 도깨비 형상의 머리와 몸통의 중앙에 듬뿍 처발라진 붉은 색의 물감 덩어리는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상실된 삶 속에 그림자처럼 누워있는 본질적 자아를 확인하려는 고뇌(구원, 불안, 소외, 공포, 죽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김희곤이 이 작품들을 제작할 무렵의 심경은 매우 암울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암울함은 어느 정도 가정환경에 기인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다운 증후군이란 희귀한 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러한 환경은 필경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배가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그것이 유전적 소인에 의한 삶이든, 신에 의해 미리 계획된 삶이든 지금 나의 삶은 나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다중적 요인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나의 존재를 스스로 문제삼고, 거기에 관심을 쏟는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작업을 계속해 가고 있다.”

불합리한 세계에 대해 말을 건다는 것은 어쩌면 작가에게만 주어진 특권일런지도 모른다. 어떠한 형태로든 그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예술적 표현은 또한 특권이자 천형(天刑)이며. 세계에 대한 작가의 빚이기도 한 것이다. 창작은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화인(火印)처럼 늘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김희곤에게 있어서 창작은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아담과 이브>는 김희곤 특유의 검정색 선묘의 맛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것은 또한 2000년과 2001년, 두 해에 걸쳐 연이어 가진 개인전 출품작들의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검정색 드로잉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그것은 김희곤 회화의 한 전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검정색 선묘는 아직 능숙한 운필의 느낌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다소 뻣뻣하게 느껴지는 검정색 운필의 흔적은 주로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화면 중앙의 짐승에게 집중돼 있다. <아담과 이브>라는 명제가 상징하듯이, 이 작품은 남녀의 사랑과 그러한 사랑이 가져다주는 혼돈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고양이의 머리를 둘로 갈라놓은 지점에 서 있는 벌거벗은 여자와 이를 바라보고 있는 오른편의, 아담일 성싶은 남자의 얼굴. 그 둘 사이에서 빚어졌을 혼돈스런 감정이 화면의 중앙 윗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마구 휘갈겨 지운 듯한 한 다발의 필촉 무더기에 담겨져 있다. 그래피티(낙서화)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김희곤의 검정색 드로잉 연작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Ⅲ.
1990년대 말에서 2000년 초반까지는 김희곤이 검정색 드로잉 작품을 실험한 시기이다. 그는 맹렬하게, 그리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사물을 관찰했다. 그리고 사물의 생생한 존재감을 오로지 검정색 선묘 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아파트의 계단, 선풍기, 피아노, 소파, 흔들의자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이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족, 사랑, 폭력, 기아와 같은, 인간적 주제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물이 지닌 생생한 존재감의 표현이 새로운 주제로 부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주관적인 느낌의 표현보다는 사물이 주는 존재감에 대한 표현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 거리두기에 더욱 적합하다는 의식의 소산일런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는 자잘한 일상의 소품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존재의 생경한 느낌을 검정색 선묘로 표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대상과 의식 사이의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어제의 의자가 오늘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제 오르던 계단의 느낌이 오늘 오를 때의 느낌과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사물의 존재감이 주는 이 현기증을 가리켜 ‘구토’라고 명명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김희곤은 사물의 존재감을 검정색 선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희곤에게 있어서 선묘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해 의식이 투사된 결과물이다. 사물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가마다 다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베르나르 뷔페와 같은 깡마른 스타일의 그림이나 아니면 반대로 페르난도 보텔로와 같은 뚱뚱한 스타일의 그림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희곤의 경우에 있어서 작가적 개성은 검정색 선묘로 집약된다. 그의 작품에서 선묘의 특징은 마치 검정색 녹음 테입을 마구 빼서 펼쳐놓은 것처럼 자유분방하고 즉발적이다. 그의 선묘는 사물의 윤곽선을 흐릿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것들이 우리가 일상을 통해 늘상 접하던 의자며 계단이란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선풍기>(캔버스에 아크릴릭, 116.7x91.9cm, 2000년 작)를 보자.
이 작품은 선풍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화면 가득히 선풍기의 모습을 담고 있다. 흰색 바탕에 옅은 주황색을 칠한 뒤, 그 위에 온통 검정색 필선으로 선풍기를 묘사하고 있다. 선묘는 매우 빠른 필치이며, 다소 신경질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선풍기는 화면의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화면의 구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그런데 화면의 중앙에서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이다. 화면의 한 가운데에 떡 버티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존재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탈의 쾌감과도 비견된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나 정위치에서 벗어날 때의 일탈이 주는 쾌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사물의 희미한 이미지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가리켜 그림자라고 부른 바 있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선풍기라고 하는 일상적 사물의 희미한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 선묘의 흔적만은 실재한다. 그것은 한때 이 작가가 결코 부여잡을 수 없는 사물의 그림자를 영감의 광휘에 휩싸여 순식간에 그려낸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속사(速射)의 예술이다. 그는 존재의 옷자락을 부여잡기 위하여 그것의 이미지를 빠른 필치로 그려냈다. 그런 이유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펄럭이는 존재의 옷자락인 셈이다. 마찬가지 의미로 회화의 경우 관객이 보는 것은 늘상 존재의 펄럭이는 가상일 뿐, 사물의 실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
김희곤이 구사하는 갈필의 효과는 그림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그의 그림은 동양화에서의 파묵법과 유사하다. 그의 그림은 아크릴 칼라가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반복해서 겹쳐 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상을 직접 관찰하며 그리기보다는 기억에 의존해서 그린다. 그 이유는 그의 그림의 목적이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에 있다기보다는 사물의 존재감에 대한 표출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연전에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작품이 의식의 한 투사라고 할 때, 이 말은 김희곤의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의 작품은 의식의 투사의 결과물이다. 근작들은 검은 필선이 주류를 이룬 <자화상> 연작에서 검은 필선의 요소를 더욱 강화한 결과물인데, 의식이 소여된 대상을 다루고 있다. 아파트의 계단, 피아노, 선풍기, 소파, 흔들의자 등등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기물은 작가의 주변에 산재해 있는 것들이다.......흔들의자는 그의 부친이 사용하던 기물이다. 그 어느 것이든 작가의 주변에 실존하는 기물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들은 과거의 작품에 등장했던 소재들처럼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그것들은 때로 실존적 의미로 작가에게 다가오곤 한다. 마치 카뮤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마르셀 뮈르소가 체험했던 강렬한 태양처럼 그것들은 때로 부조리한 모습을 띤다. 일상을 통해 부딪히는 사물의 생경한 이미지는, 그에게 있어서 사르트르의 잘 알려진 표현을 빌면 구토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다. 앞에 인용한 작가의 고백은 실존적 내음을 짙게 풍긴다. 삶이 신에 의해 계획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컴컴한 계단을 오르다 느끼는 현기증 나는 존재감이 실존의 한 양태임은 분명하다. 그것을 가리켜 사르트르의 표현대로 구토라고 해 두자. 김희곤은 그러한 느낌을 날카로운 필선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파도 선풍기도 흔들의자도 작가는 같은 스타일로 사물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가 이제까지 견지해 왔던 부드러운 필치와 색조에서 상당히 변모된 것임에 분명하다. 작가는 유독 계단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컴컴한 의식의 내면풍경이 은연중에 투사된 것은 아닌가 한다.”
(필자, 2000년 개인전 서문에서 인용)


그는 의식의 컴컴한 옷자락을 부여잡고자 애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기억 속에 존재할 뿐, 현실세계에는 부재한다. 아니 현실적으론 존재할 수 있으나 그가 봤던 그 순간에 순간적으로 존재했을 뿐, 그 뒤에는 마치 신기루처럼 섬광처럼 사라져 버린 것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그가 사물에서 느끼는 구토는 존재의 생생한 살결에 대한 인식에 다름 아니다. 로깡땡이 보았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구토를 느끼게 했던 것일까? 김희곤은 한 다발의 검정색 필선으로 이러한 구토감을 표현한다.
김희곤의 <계단>(116.7x91.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0)은 작가가 느꼈을 법한 컴컴한 의식에 대한 한편의 은유로 읽혀진다. 이 작품은 작가의 거처인 아파트의 계단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감정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불길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후미진 계단의 하단부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또한 매일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작품의 실마리를 찾았을지 모른다. 그러던 그 어느 날 불현듯 하나의 영감이 섬광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이 만남의 계기는 언제나 원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광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만남은 쉽게 잊혀지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불쑥 상기되어지는 것이다.
역시 거친 검정색의 갈필을 주조로 해서 그린 이 작품은 계단의 옆모습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검정색 필선 위에 청색의 필선을 덧붙인 까닭에 청색과 검정색의 대비가 시원해 보이는 작품이다. 대담한 필치가 사물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이 사물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는 이유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보다도 오히려 개념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보며 계단을 닮은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계단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는 계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의 이미지를 해체함으로써 계단의 개념을 제시하는 역공법을 쓰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아버지의 의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의자>(116.7x80.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0)는 아버지가 애용하던 흔들의자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흔들의자의 옆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한 작품으로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필선이 대담하면서도 감정의 절제가 돋보인다. 옅은 푸른 색 바탕에 예의 검정색 필선으로 그려진 흔들의자는 화면의 정 중앙에 안정감 있게 배치돼 있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드로잉의 맛이 검정색 갈필을 통해 잘 배어나고 있으며, 운필의 속도감 또한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이 단일한 소재를 다룬 것들이라면, 같은 해에 그린 <아파트 입구>(72.7x60.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0), <비상벨>(116.7x80.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0), <터널>(116.7x91.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0) 등등은 주변적 요소가 덧붙여진, 그래서 일련의 상황성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 일련의 작품들은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보다는 약간 설명적인 것이 특징이다. <아파트 입구>는 주변적 정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비상벨>은 이보다는 덜하나 그래도 어느 정도 비상벨에 대한 상황적 정보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 역시 검은 색 필선에 빨강, 노랑, 주황, 녹색 등등 제한된 색만을 부색(副色)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앞의 계열과 동일한 부류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Ⅳ.
2001년에 김희곤은 한전프라자갤러리에서 또 한 차례의 개인전을 갖게 된다. 이 개인전은 전년도에 가졌던 개인전 출품작들이 일종의 탐색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에 비해 보다 확고한 스타일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전시회였다. 왜냐하면 이 전시회에 이르러 비로소 확고한 작품의 전형을 획득하게 되며, 재료 면에 있어서도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작품들이 아크릴 칼라에 의존하였다면, 이 작품들에 와서는 우선 안면도 산 규사에 천연 옥가루를 배합하여 제조한 미색의 안료를 바탕색으로 설정하고 있다. 또한 검정색 역시 참숯가루에 안료를 배합한 혼합재료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어서 특유의 재질감을 보이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이 무렵 김희곤의 소재는 전년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회전의자, 침대, 촛대, 노트북 컴퓨터, 커피제조기, 카메라, 손전등, 선풍기, 헤어드라이어, 피아노, 탁상시계, 전화기, 오디오, 소화기, 난로 등등이 화면에 등장한다. 이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재료의 특성에서 오는 거친 질감과 이전의 작품에 비해 훨씬 거칠며 격렬한 필치에 있다. 검정색을 주조로 한 필치에 옅은 청색과 노랑, 주황, 보라가 덧붙여진 화면은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대상에게선 해체적인 느낌이 이전의 작품에 비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사물의 특징에 대한 묘사는 이전 작품에 비해 보다 상세하게 나타나 있어서 대상의 식별은 더욱 용이하다. 해체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대상에 대한 식별이 용이하다는 것은 서로 모순된 듯하나 이 둘의 조화는 화면 안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 동화와 이화(異化)의 관계는 김희곤의 조형적 균형감각에서 나온 듯 하다. 적당한 때에 붓을 놓는다는 이 균형감각이야말로 ‘과불급(過不及: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으로 표현되는 동양의 중용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극한, 행위의 극한까지 치닫는,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회화와도 다르며,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는 미니멀 회화와는 더더욱 같지 아니하다. 그의 그림은 그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우리는 거기서 동양적 사유의 한 전형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의 필선의 맛은 동양적 파묵의 수원(水原)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기운생동의 한 예를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

Ⅴ.
“나의 작업은 내용적으로는 부조리성을 지니고 일상을 통제하고 구성하는 힘, 그것에 의해 본래의 정체성에서 파생실재화한 일상의 정체성을 문제삼고, 가리워진 본래의 나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김희곤, 작업노트 중에서, 2003년)


작가노트 속에서 뽑은 한 구절이다. 이 글은 김희곤이 드로잉 작품에서 입체작품으로 옮겨가면서 쓴 것이다. 그는 최근에 와서 입체작품에 부쩍 열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평면작품을 참고로 할 때 당연한 귀결일 성싶다. 그런 전이를 통하여 이제 그는 현대미술사의 두 근간, 즉 평면과 오브제라는 양대 물줄기에 발을 담그는 결과에 도달한 것이다. 그의 입체작업은 형식상 평면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평면적 이미지에서 실제의 오브제로 전환하는 이 과정은 그의 작업의 추이를 볼 때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삼차원 공간에 실재하는 그의 일상적 오브제들은 마치 평면으로부터 뛰쳐나온 것처럼 존재의 온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잇는 끈은 그의 오브제 작품에 늘어져 있는 실제의 검정색 끈들이다. 그의 오브제 작품에서 이전의 평면작품과 상사(相似)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끈 밖에 없다. 이 끈들은 그의 드로잉에서 보이는 검정색 갈필을 연상시킨다. 그의 오브제 작품에 어지럽게 붙어있는 이 끈들은 오브제를 감싸고 있는 투명 비닐과 함께 일상적 사물을 범상치 않은 예술적 오브제로 전환시키는 장치들이다. 왜 그는 일상적 사물을 투명 비닐로 포장하여 전시한 것일까? 일단 그의 작품은 이차원 이미지의 삼차원 공간에 대한 재맥락화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동일한 사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파되며, 그가 유독 검정색 오브제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포착된다.
사물을 투명 비닐로 덮는 행위는 일상적으로는 세탁소에서 흔히 본다. 깨끗이 세탁된 옷을 투명 비닐로 덮어서 배달하는 장면은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바이다. 이 일상적 행위가 예술적 행위로 전환되는 것은 이 행위가 미술의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희곤은 실제 검정색 옷을 투명 비닐로 싸서 전시장에 전시하였다. 물론 그는 옷만을 전시한 것이 아니라 예의 검정색 끈의 다발을 함께 전시하였다. 그 끈은 그의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유일한 단서이자 장치이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전화기를 비롯하여 텔레비전, 의자, 등등을 포장하여 전시하였다. 이들 작품에도 검정색 끈은 동일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일종의 평면적 이미지의 실재인 셈이다.
평면으로부터의 이탈을 통하여 오브제는 비로소 존재론적 실재가 된다. 그것들은 만질 수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몸에 걸치거나 사용할 수 있는 실제의 사물들이다.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이데아의 근원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그림자로서의 실제이다. 한편 그의 오브제 작품은 매우 위험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오브제 작품의 남용에 기인한다. 이미 상투형이 돼버린 오브제 작품들은 탁월한 관점을 지니지 않는 한 별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오브제 설치작품은 이전의 평면작품과의 연관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 평면이나 입체 모두 같은 발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김희곤의 예술적 아우라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점이 우리가 그의 미래에 기대를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 기전미술 2004,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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