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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 나비의 꿈

윤진섭

내가 이상현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세월의 무상함, 곧 인생무상은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핵심어이기도 한데, 그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화두로 작업을 해왔다. 초기에는 신화적 주제를 가지고 주로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을 병행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진, 드로잉, 레이저 등등 다양한 매체로 표현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베를린 국립조형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조각과 멀티미디어를 전공한 그의 경력은 표현 매체에 있어서 전 방위적 행보를 보이는 활동 반경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현에게는 다른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경력이 하나 더 붙어 다닌다. 몇 년 전에 외설 시비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거짓말’의 주연배우라는 사실이다. 1997년, 나라 전체가 IMF라는 전대미문의 충격에 휩싸였던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는 나이 어린 여자를 데리고 전국의 여관과 여인숙을 전전하며 유랑하는 중년 남자의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의 출연은 그의 전 작품 활동을 놓고 볼 때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이 돼 준다. 그 이전이 과학적 가설에 입각한 공상을 현실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그 이후는 인생의 유적에 대한 문제에 시선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중반기를 보내며 어느 날 나의 90년대를 돌아보며 내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경품에 당선되어 언젠가 상으로 받은 상자를 열어보니 그 상자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내 인생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나의 청춘기도 멀리 가버렸다. 공허한 자본주의 속에서 허장성세의 세월은 무심히 가고 헐리우드 극장에서 ‘초원의 빛’을 본 그날로부터 35년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내게 소포가 하나 배달이 되었다.”(이상현, 작업노트 중에서)

이 무렵엔 ‘거짓말’의 주인공처럼 이상현의 삶도 피폐해 있었다. IMF의 여파는 이상현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던 안양의 작업실을 날려버렸다. 건물주가 부도를 내면서 비롯된 이 뜻하지 않은 불행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그토록 애정을 기울였던 작업을 접고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유랑에 몸을 맡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만든다. 그는 1988년 토탈미술관에서 <안드로메다에서 운명의 여신과의 만남>이란 퍼포먼스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원래 그가 독일에서 발표를 시작했던 <잊혀진 전사의 여행> 4부작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퍼포먼스에 나타난 정서가 바로 유랑이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유랑의 생활, 그 인생유전의 신산한 삶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그는 90년대 중반에 사하라사막에 <떠오르는 지구달> 프로젝트를 실현하려는 야심찬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사하라 사막에 건립될 예정이었던 이 프로젝트는 그러나 언론에 발표되었던 초기 단계에서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지면서 좌초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 프로젝트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떠오르는 지구달>은 호괴르 산괴를 비롯한 6대주의 은밀한 장소에 건립된다. 그것은 하나의 가상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키는 지구달 진지는 직경 400미터의 나선형 형태의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 한 가운데에 직경 20미터인 인공달이 통과할 수 있도록 200미터 깊이의 원통형 궤도가 만들어진다. 달은 주변에 산재한 태양열 집열판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로 발광, 작동된다. 나선형의 원형구조물 위에는 높이 150미터의 반원형 아취가 건립되는데, 그 속에는 공 모양의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와 지그재그 형태의 계단이 갖춰져 있어 관람객의 관람에 따른 이동을 돕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설계의 하일라이트는 나선형 구조물의 외곽을 따라 직육면체 형태로 파들어 가서 그 중의 절반을 투명한 소재로 덮어 지층의 구조를 관찰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시공 상의 난이도를 첨단의 과학기술로 해결하게 될 이 계획은 사각의 각 변과 달의 통로 옆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면서 지층의 단면을 관찰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윤진섭, 가나아트, 1996년 4월호)

불발로 그친 이 프로젝트는 이상현의 상상력과 작가적 야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이 계획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현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천문학적인 건설비용도 비용이려니와 프로젝트의 실현에 따른 외교적 현안 등 선결돼야 할 문제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작가적 상상력과 프로젝트의 실현에 따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갭이 좌절을 낳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현의 실패의 요인은 계획 자체에 이미 내재돼 있었다. 황량한 사하라 사막 한 복판에 우주센터를 방불케 하는 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당시의 현실적 여건을 생각할 때 실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포장작업으로 유명한 크리스토가 치밀한 계획 아래 거대한 토목공사를 완성해 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현이 어려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는 그의 동키호테적인 기세가 꺾인 게 바로 IMF가 터질 무렵이었으니, ‘거짓말’의 출연은 말 그대로 거짓말처럼 그의 인생항로에 찾아 온 복병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 영화의 출연을 계기로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며, 작업의 주제를 과학에서 인생의 유적에 대한 문제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1990년에서 95년에 이르는 5년간은 작가로서 이상현이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시기였다. <<김세중 청년조각상>> 수상(1994)을 비롯하여 프랑스 파리에 있는 동귀화랑(Galerie J&J Donguy)에서의 초대전, 프랑스 피가로지에 의해 ‘차세대 중요작가’ 중 1명으로 선정되는 등 전도가 유망한 작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2000년에 인사아트센터 개관기념초대전으로 열린 <소금사막과 전자유목민> 이후, 이상현은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연락조차 어려워서 몇 년간은 만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성찰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거짓말’의 출연 이후 그는 한동안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짐작컨대 이 시기에 유명세 뒤에 가려진 허상의 의미를 처절하게 깨달았지 않았나 싶다. 요가의 수행에 빠져들어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선 것은 어쩌면 가장 그다운 방식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평소에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커피마저 카페인 성분이 함유돼 있다고 피했던 그를 생각한다면, 요가의 수행은 금욕적인 그의 기질에 가장 잘 맞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그가 발표한 <자아이탈적 명상>(2004)은 이의 산물이다. 직접 여성으로 분장하고 요가를 하는 동작을 촬영한 이 작품은 “인생은 큰 꿈을 꾸는 것, 어찌 삶을 수고롭게 할 것인가.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 허공 속에 앉아 있네.”라는 단상이 말해 주듯이, 현실과 허구, 선과 악, 여성과 남성, 좋음과 싫음 등등 이분법적인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선의 세계에 그의 작품이 맞닿아 있음을 말해준다.

탁월한 상상력을 지닌 이상현은 일찍이 ‘시공간 이동호(Tapacementor:Time+Space+Movement)’와 ‘바람의 마음(The Mind of Wind)’을 고안한 바 있다. 모형으로 전시된 적이 있는 이 비행물체들은 현실적으로는 허공을 날 수 없으나 상상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갈 수 있는 매개체다. 이 비행물체들은 1909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도록에 수록된 낡은 사진들을 이용한 작업인 <조선역사명상열전> 연작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사진들은 그가 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을 선택하여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후 신사복 정장을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삽입, 마치 ‘시공간이동호’나 ‘바람의 마음(風心)을 타고 현재에서 아득한 과거로 회항한 것 같은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폐허가 된 경주의 안압지, 익산 미륵사지의 무너진 탑, 황량한 불국사의 모습, 금강산 신계사 등등이 그가 선택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는 거기에 마치 우주선을 타고 나타난 외계인처럼 홀연히 출몰한다. 그는 유적지의 현장 어딘가에 몸을 숨긴 듯, 합성된 사진에 존재하고 있다. 정장 차림으로 부동자세로 서있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수동적으로 보이는 그의 포즈는 마치 굴종과 오욕으로 얼룩진 조선의 역사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힌 한 많은 조국의 역사적 현장을 타임머신을 타고 찾는다는 이 스토리는 기존에 발표한 여타의 작품과 같은 서사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아뜰리에 사람들 4>전에서 이상현은 퍼포먼스를 발표한 바 있다. 이 퍼포먼스에서 이상현은 여자로 분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 하나의 등장인물인 음악가 김동섭과 함께 협연으로 이루어진 이 퍼포먼스에서 신디사이저, 쎌레민, 카오스 패드 등의 악기가 사용되었으며, 전체적으로는 행위와 함께 대화, 소리, 음악 등이 어우러진 총체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상현은 여자로 분장하고 두 개의 안테나가 동작을 감지하여 음향으로 바꾸는 목제악기인 쎌레민 앞에서 명상자세로 서 있다. 관객들은 명상적인 분위기의 음향 연주를 감상한다. 이 연주가 끝나면 작가는 컴퓨터의 마우스 패드처럼 손가락으로 드래그하는 방법으로 음성을 변조시키는 장치인 카오스패드를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변조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색무위
모든 물질은 부질없다

유전유희
그러나 현실은 돈이 있어야 즐겁네

화양연화
팔짝 핀 인생의 한때는 짧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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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아정은 빼빼로가 꾸는 꿈속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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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협객도 춘정을 못 이기니

도원탐방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어불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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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부동
용이 되기 전에는 움직이지 말고

절대고수
연화사탕삼지창낭자의 무공을 연마하여

한류열풍
잘 나갈 때 앞날을 대비하라
이 모든 것은 필설로 말 할 수가 없는 것

호접지몽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도 모른다네

※ 모두 12개로 이루어진 사진작품 중에서 유독 11번째에만 한문이 빠져있음: 필자 주




<리틀 싯달타-무릉도원>라는 제목의 이 퍼포먼스는 같은 제목을 붙인 12개의 사진 시리즈(각 110x190cm)를 위해 헌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소설과 만화의 인용, 오브제, 퍼포먼스 등등으로 이루어진 공간-시각(space-visual) 작업의 일환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듯, 현대판 무릉도원을 풍자한 것이다. 그는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호화 광고잡지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빗대고 있다. 컴퓨터 합성으로 이루어진 12개의 사진들은 현대인들의 화려한 욕망의 집대성이다. 마치 풀풀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 현대인의 물질과 사치, 그리고 허영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의 상징처럼 보인다. 디지털 프린트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이상현 사진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자아이탈적 명상>에 나타난 신체적 관심에서 시작하여 <조선역사명상열전>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로, 거기서 다시 <리틀 싯달타-무릉도원>에서의 소비문화에 대한 풍자로 이어지는 이상현 사진작업의 전개 속에는 역사와 인생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점이 투영돼 있다. 그는 신기루를 좇는 몽유병자와도 같이 물질적 환상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고 있는 사진작품들은 도발적인 성적 판타지를 지니고 있으며, 화려하고 감각적이다. 그는 말한다.

“2005년, 사람들이 갖고 싶은 욕망의 모든 것들은 대개 럭셔리 잡지 안에 있다. 예쁜 여자, 멋있고 돈 많은 남자, 외제 자동차, 보석, 명품 향수와 악세서리, 파티와 셀러브러티, 야자수 우거진 휴양지, 쿠르즈의 1등 객실, 왕자와 공주들, 안락하고 편안한 휴식처인 하우징씨스템, 행복한 가족사진, 깨끗하고 하얀 욕조, 붉은 립스틱, 고급성형외과 리스트, 신용카드, 맛있는 케이크 등등 정말 없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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