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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홍 : 사물 뒤의 사물을 보라

윤진섭



안창홍이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49인의 명상>, <사이보그>, <사이보그의 눈물>, <부서진 얼굴>, <봄날은 간다> 등등이다. 이들 중 <봄날은 간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작 형식으로 돼 있다.
<49인의 명상> 연작은 마흔 아홉 명의 초상 사진을 76cmx110cm 크기로 확대한 것으로 원래의 사진 이미지에 가필을 한 것이다. 2004년 부산비엔날레에 처음 선보였던 이 작품은 안창홍의 화력에서 사진을 이용한 것으로는 최초다. 그는 작업 초기에 사진 이미지를 이용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차용한 것일 뿐 사진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근래 사진을 이용한 안창홍의 작품들은 연조로 따지자면 물경 3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캔버스에 사진 이미지를 베껴 그린 것이든 사진을 직접 사용한 것이든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작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작업의 컨셉트이지, 매재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사용했다면 목적에 이르는 수단은 언제나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안창홍에게 있어서 사진의 등장은 작업의 새 장을 여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49인의 명상>연작에 등장하는 인물사진은 문을 닫은 사진관에 보관돼 있던 증명사진의 필름 원판을 이용, 확대 프린트한 것이다. 작가는 익명의 사진을 확대한 이 프린트에 조작을 가하여 원본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49인의 명상> 연작은 원래는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등장인물의 눈을 지워 감은 상태로 변조한 것이다. 명상을 하고 있는 이 인물들의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이 칠해져 있다. 죽은 자의 입술에 붉은 색을 칠하는 풍습은 중국의 어떤 종족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입술에 칠한 이 색깔이 영계(靈界)의 상징으로 설정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전체적으로 노란 색조를 띤 이 흑백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 붉은 색 입술로 인하여 마치 영정처럼 죽음의 내음을 풍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게다가 인물의 얼굴이나 목 등에 그려놓은 나비는 마치 등장인물의 영혼이 변신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나는 실로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이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 주는 사람이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작품을 이렇게도 봐주고 저렇게도 봐주는 관람객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이보그> 연작은 <49인의 명상> 연작에 사용된 같은 필름을 이용하여 다른 스타일의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사이보그> 연작에는 나비가 등장하지 않는 대신, 얼굴이나 목 등의 신체 부위에 전선이 비어져 나와 있으며, 등장인물이 눈을 감고 있는 반면, <사이보그> 연작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인형처럼 푸른빛의 형형한 눈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안창홍은 같은 사진을 이용하여 전혀 다른 느낌의, 두 종류의 작품을 산출하고 있는 것이다. 영계의 인간과 사이보그, 그러니까 둘 다 실제 살아 숨을 쉬는 인간은 아닌 셈이다.

<49인의 명상>이 됐든 <사이보그>가 됐든, 이 두 연작에서 맡을 수 있는 작가의 감정은 냉정함이다. 그것은 <49인의 명상>에서는 ‘영계’의 설정을 위한 노란 색조의 처리로 나타나고, <사이보그>에서는 마치 유리구슬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눈동자와 피부를 찢고 튀어나온 알록달록한 전선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객관적 거리두기는 <사이보그의 눈물> 연작에 와서는 정감적인 태도로 바뀌고 있다.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이 연작은 얼굴을 크게 확대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들에도 <사이보그>에서처럼 피부를 비집고 튀어나온 전선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사이보그>와 다른 것은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눈동자가 우리에게 뭔가 말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이제 막 피부를 뚫고 전선줄에 노출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차이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이 작품들이 전체가 노란 색조로 칠해진 <49인의 명상>이나 <사이보그> 연작과는 달리 다양한 색상의 종이에 직접 육필로 그렸다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사진이 지닌 객관적 사실성은 묘사 과정에서 생략이 나타나는 연필 드로잉 작품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작가가 드로잉 작품에 ‘눈물’이라는 감정(feeling)의 무게를 의도적으로 싣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안창홍의 작가적 탁월성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는 관람객들에게 작품이 야기하는 독특한 감정을 환기시키는데 능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부인이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가서 찍은 단체 사진을 확대한 <봄날은 간다>(400x207cm)는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법한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과거를 회상할 때 사용하는 영화의 기법처럼 노란 색조로 전체를 채색하고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에 수많은 나비와 물감의 흔적을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것이 하나의 그림임을 환기시킨다. 이 절묘함, 그는 역시 뛰어난 작가다.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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