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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비엔날레와 미술 인적 인프라의 구축 방안

윤진섭

Ⅰ. 서언:광주비엔날레와 ‘예향’으로서의 광주
광주를 가리켜 흔히 ‘예향’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예술의 고장’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그냥 하는 수사가 아니듯, 광주는 예향으로서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광주는 풍류의 고장이고 가사문학의 요람이며, 음식의 고장이자 판소리와 정자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광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 맛과 멋에 취해 언젠간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 광주는 그 어느 곳보다 강한 흡인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그런 이 빛고을에 1995년 사람들을 놀라게 한 문화적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광주비엔날레의 창설이 그것이다. ‘5.18 정신’을 기본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상징적 보루로서의 광주비엔날레의 창설은 때마침 민주화의 값진 성과를 얻어낸 문민정부의 출범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의의가 있었다. 당시 조직위원 겸 특별전 큐레이터로 참여할 수 있었던 나는 광주에서 일어난 이 세기적 사건을 통해 우리 문화예술의 도약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 개인은 물론이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미술인들이 우리 미술의 세계화를 위한 발신지이자 전진기지로서의 광주에 거는 기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이후 12년이 흘렀다. 그런데 바로 그 발신지이자 전진기지인 광주에 사는 미술인들이 이상한 징후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풍문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을 요약하자면 처음에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했던 당시의 분위기나 기대가 아닌, 어딘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허전함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상실감 내지는 박탈감과 같은 감정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최근에 광주지역의 한 신문은 광주 미술계의 이런 분위기를 스케치하여 보도한 적이 있는데, 이 분석 기사의 논지를 보면 최근 광주의 미술인들이 광주비엔날레를 바라보는 시각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신문은 “광주비엔날레가 외부 큐레이터들의 국제무대 진출을 위한 정거장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최근 몇 년 간 광주비엔날레의 큐레이터나 전시감독을 맡았던 인사들이 광주작가들을 자신들이 기획한 국제전에 전혀 픽업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무등일보, 광주비엔날레 결산-(하) 광주의 동력으로, 조덕진 기자).
그렇다면 이 기사는 단순히 광주 미술인들의 심정적 자조를 바탕으로 씌여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최근의 6회에 이르기까지 본전시에 초대된 광주 작가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면 조덕진 기자의 보도가 더욱 실감날 것이다. 제1회 50개국에 92명, 제2회 35개국에 117명, 3회 46개국에 245명, 4회 31개국에 325명(4개 프로젝트), 5회 41개국에 237명(이상은 광주비엔날레 홈페이지를 참고한 통계임), 6회 32개국 127명(신문보도 참고)등 연인원 약 1천명의 작가가 참가한 역대 비엔날레의 본전시에 초대된 광주 작가들의 숫자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우제길을 비롯하여 신경호, 홍성담, 손봉채, 강운, 박문종, 진시영 등등 극히 미미한 숫자인 것이다. 물론 광주나 호남 출신의 작가들을 추가하거나 제4회 비엔날레처럼 프로젝트에 참가한 작가들을 보탠다면 숫자는 좀더 불어나겠지만, 그래도 전체 비율로 볼 때 미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결과는 과연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성격이다. 역대 광주비엔날레가 모델로 삼았던 베니스비엔날레나 상파울루비엔날레처럼 설치나 영상, 퍼포먼스가 주된 전시 모드로 등장하는 한 광주작가들이 비엔날레의 주류로 진입하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분명한 딜레마가 있다. 그것은 전통과 현대사이의 간극에서 온다. 예향으로서의 광주는 본래 남종화나 문인화, 서예 등 전통적인 장르의 뿌리가 깊은 곳이며, 그만큼 면면히 이어져온 그만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서양화의 경우 인상주의풍의 오랜 전통에 입각한 구상회화가 강세를 보이는 동시에 남도 특유의 향토색 짙은 화풍을 고유의 미적 가치로 승화시킨 고장이 바로 광주인 것이다. 비엔날레의 창설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분야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장르들일 것이다. 현대주의의 거센 열풍에 밀려 오랜 세월 동안 가꿔온 광주의 향토성은 그 특유의 맛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12년에 걸쳐 수백억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한 광주비엔날레의 결과가 전통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고 예향의 멋을 애써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운주사의 동글동글한 석탑이나 강진 무위사의 벽화, 내소사의 꽃문 등은 보기에 따라 얼마나 현대적인가? 나는 남도지방의 절간을 장식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연꽃 등과 최정화의 작품에 큰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에 교환교수로 몇 달간 머물며 호남의 문화와 예술을 관찰한 바 있는 미국의 미술평론가 로버트 모건이 광주비엔날레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런 의미에서 호소력이 있다. 그는 광주와 호남지역의 장인들이 일궈놓은 독특한 문화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 비엔날레에 대해 따가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광주나 남도지방의 독특한 문화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우리의 문화적 자산임에 분명하다. 진도의 씻김굿을 비롯하여 창, 판소리, 전통 음식 등은 비엔날레와 연관하여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색채와 관련된 전통 문화 유산의 탐구는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광주의 젊은 미술학생들에게 권장해 볼 만한 일이다.

Ⅱ. 광주지역 작가의 육성을 위한 전략

광주지역 미술 인재 육성을 위한 방안에는 단기적 방안과 장기적 방안이 있다. 우선 단기적 방안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나는 것을 피력해 볼까 한다. 단기적 방안은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광주비엔날레를 통하여 국제미술의 현장 깊숙이 띄우는 방법이다. 광주의 재능있는 작가를 비엔날레의 본전시나 특별전 형태의 별도의 전시를 통해 비엔날레를 방문하는 국내외의 전시기획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미술행사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성가를 지닌 외국의 미술전문지에 소개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좋은 작가들은 국제무대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광주비엔날레를 광주지역 작가를 비롯한 우리나라 작가들의 국제무대 진출을 돕는 인력시장으로 적극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니스비엔날레를 활용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미국은 1895년에 출범한 베니스비엔날레에 첫 회부터 참가했다. 제1회 베니스비엔날레에는 15개국이 참가했는데 이러한 추세는 1950년까지 이어진다. 30개국을 넘어선 것은 1954년이며, 40개국을 넘어선 것이 1986년이다. 그러니 베니스비엔날레가 얼마나 느린 성장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여기서 참고로 베니스비엔날레에 대한 통계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1회(1895):285명의 작가, 516점의 작품, 224,327의 관람객, 제9회(1907):613명의 작가, 2,036의 작품, 345,851명의 관람객, 제16회(1928):1,043명의 작가, 2,725점의 작품, 172,841명의 관람객, 제30회(1960):342명의 작가, 2,898점의 작품, 150,902명의 관람객, 제44회(1990):217명의 작가, 1,178점의 작품, 125,000명의 관람객:Philip Rylands and Enzo 야 Martino, Flying the Flag for Art-The United States and the Venice Biennale 1895-1991 참조)
아무튼 미국은 자국의 작가를 국제무대에 알리기 위한 집중과 선택의 전략을 적극 구사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네오다다의 대표적 작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다. 컴바인 페인팅으로 유명한 그가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64년에 열린 제32회 베니스비엔날레를 통해서였다. 미국이 저명한 화상인 레오 카스텔리는 자신의 화랑 전속 작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제스퍼 존스를 베니스비엔날레의 미국 커미셔너인 앨런 솔로몬을 통해 베니스비엔날레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38세의 라우센버그는 그 이전에는 미국작가로서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베니스비엔날레 대상을 거머쥠으로써 일약 국제적인 작가로 떠오를 수 있었다(Calvin Tomkins, Off the Wall-Robert Rauschenberg and the Art World of Our Time, Doubleday & Company, Inc. Garden City, New York 1980). 미국은 역대 베니스비엔날레에 같은 작가를 중복 참가시킴으로써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을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많은 재능있는 작가들이 희생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미국은 이 전략에 따라 Willem de Kooning(5회:1950, 1954, 1956, 1978, 1986, 1988), Lyonel Feininger(5회:1926, 1930, 1940, 1948, 1956, 1972), Jackson Pollock(4회:1948, 1950, 1956, 1978), Robert Rauschenberg(7회:1964, 1968, 1970, 1972, 1978, 1984, 1990), Frank Stella(6회:1964, 1968, 1970, 1972, 1978, 1980)<이상 1990년 기준> 등등 현재 국제적인 지명도를 누리고 있는 미국의 작가들을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2001년에 창설 50주년을 맞이한 상파울루비엔날레(Bienal de Sao Paulo)는 베니스비엔날레, 휘트니비엔날레와 함께 흔히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힌다. 이 비엔날레의 창설자인 프란시스코 마타라초 소브린호(Francisco Matarazzo Sobrinho:일명 시실로(Ciccillo, 1989-1977)는 이태리 이민자 출신의 사업가 겸 미술품 소장가로서 주로 아카데믹한 화풍의 고전 미술품들을 주로 수집하던 그가 현대미술에 눈을 뜨게 된 것은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권위있는 비평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미술이 국경을 초월하여 미래의 브라질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매체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마침내 그는 자신의 문화적 협조자인 동시에 부인인 욜란다 펜테아도와 함께 상파울루근대미술관(Museo de Arte Moderna de SaoPaulo)을 설립하게 된다. 상파울루비엔날레가 열리는 이비라푸에라 공원의 거대한 독립건물을 ‘시실로 마타라초’관이라고 명명한 것은 브라질 미술과 문화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에 바치는 브라질 국민들의 경의의 표시이다. 이렇게 해서 태동된 상파울루비엔날레가 지금은 남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포석이자,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미술을 세계에 전파하는 대표적 창구이자 문화적 중추(hub)로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광주도 굳은 사명감과 함께 탁월한 문화 마인드를 지닌 재력있는 인사가 광주미술 아니 나아가서는 한국과 아시아의 미술을 위해 헌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상파울루비엔날레는 각 시기의 현대미술 조류를 즉각적으로 반영하거나, 미술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인지도와 중요성을 높여나갔다. 바넷트 뉴만, 제스퍼 존스, 세자르, 죠셉 앨버스, 앤소니 카로, 바실리 칸딘스키, 시그마 폴케, 필립 거스통, 피에르 만조니, 펭크, 조나단 보로프스키, 재니스 쿠넬리스 등등 미술의 중요한 시기에 등장한 작가들을 초대함으로써 상파울루비엔날레 역사가 곧 현대미술의 역사라는 점을 암암리에 각인시켰던 것이다. 50년의 역사상 24회의 전시에 148개의 참가국, 연인원 10,600명의 초대작가, 56,400점의 출품작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졸고, 상파울루비엔날레에 관한 소고(小考), 현대미술관연구 제13집, 국립현대미술관 발행, 2002, 131-139 참조). 상파울루비엔날레는 이처럼 쟁쟁한 국제적 작가들의 대열에 거의 무명에 가까운 브라질 작가들을 대량으로 끼워 넣는 전략을 구사했다.
광주비엔날레가 지역의 작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작가를 국제무대에 띄우는데 실패한 요인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의 부재에도 그 요인이 있지만, 보다 계획적이고 면밀한 장기적 마스터플랜의 결여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단기적 방안은 광주비엔날레의 개막에 맞춰 광주지역에서 국제아트페어를 개최하는 방안이다. 김대중컨벤션센터와 같은 문화 인프라는 최적의 장소다. 그래서 스위스의 바젤 아트 페어가 베니스비엔날레 오픈에 맞춰 개최됨으로써 패키지 관람을 유도하는 것처럼, 상호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이는 관람객 증대는 물론, 비엔날레가 흡수하지 못하는 광주 미술인들을 참가시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비엔날레에 대한 광주 작가들의 무관심이나 냉소로부터 벗어나 비엔날레에 대한 긍정적 사고와 나아가서는 동참의식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외의 유명화랑들을 적극 유치함으로써 보다 많은 해외 미술전문가들과 보도진 그리고 관람객의 증가를 꾀할 수 있다.
끝으로 제안해 보고 싶은 것은 국제창작스튜디오의 활용이다. 이는 광주시립미술관과 직접적으로 연계된 사안이기도 한데, 현재 시립미술관이 운영하고 있는 창작스튜디오를 확장, 국제적인 수준에 맞게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시설을 투자하여 외국의 수준 높은 작가들을 유치, 광주 작가들과 함께 거주하게 함으로써 국제적 감각을 익히고 서로 교류하게끔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 시급하다. 현재 고양과 창동 두 곳에서 운영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창작스튜디오프로그램은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나 또한 이곳에서 전시기획에 필요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기회가 늘면서 자주 방문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장단기 거주 외국작가들에게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실력 있는 작가들의 신청이 점차 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인적 인프라를 비엔날레가 열리지 않는 해에 비엔날레관을 활용하여 대규모 국제전을 연다면 프레비엔날레의 성격도 띄면서 일거양득의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Ⅲ. 맺음말:광주비엔날레와 국제적 작가의 양성

이쯤에서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나는 이 질문이 매우 때늦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2회나 3회쯤 이런 질문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그 만큼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애석하게도 ‘아니오’이다. 광주 시민들께는 매우 죄송한 말이지만,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없다. ‘국제 작가(international artist)’라는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수준의 문제가 있지만, 세계 유수의 국제전이나 국제적인 성가를 지닌 미술관 및 화랑에 빈번히 초대를 받고, 국제적 수준의 미술전문지에 특집이 게재되는 정도를 가리켜 ‘국제 작가’로 부른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광주 작가는 없다는 말이다. 흔히 백남준을 가리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한국인으로 회자하고 있는데, 백남준을 제외하면 그에 버금가는 한국의 국제적인 작가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를 나는 전략의 부재에서 찾고 싶다. 그동안 광주비엔날레는 국제적인 안목을 갖춘 자체의 전문적인 전시기획자를 육성하는데 실패했고(아니 계획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광주의 랜드 마크가 될 수 있는 국제적 수준의 야외 조각작품을 하나도 확보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무엇보다 전략적 마인드를 지닌 문화기획자나 전시기획자의 육성에 공을 들이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실책이다.
일본의 요코하마미술관은 먼로라는 미국의 큐레이터를 초빙하여 장기간 동안 일본 현대미술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지원하였다. 그 결과가 요코하마미술관에서 열린 [일본의 현대미술-하늘을 향한 절규]인데, 이 전시회는 미국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순회됨으로써 일본의 현대미술을 미국의 주류미술계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광주비엔날레는 현재까지 여섯 차례가 열리는 동안 한국미술은 물론이요, 세계미술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1995년에 열린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그 규모나 예산 면에서 볼 때 베니스나 상파울루비엔날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국제전이었다. 그 후 광주비엔날레는 현재까지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착실히 성장하여 이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 정상급 비엔날레의 반열에 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소요된 예산만 해도 수백 억 원에 달하는 광주비엔날레는 행사를 치룰 때마다 약간의 내홍과 진통을 겪기는 했지만, 광주 특유의 뚝심과 애정으로 잘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무릇 모든 행사는 3회째가 고비라고 하는데,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6회를 넘긴 중견급 국제비엔날레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주변 환경은 많이 변했다. 비엔날레관 건설의 첫 삽을 뜰 당시만 해도 인도트리엔날레와 방글라데시비엔날레 등등 몇몇의 국제전 행사만이 존재하던 아시아의 비엔날레는 10년이 지닌 지금 수많은 후발 비엔날레들의 탄생으로 북적이고 있다. 타이페이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북경비엔날레, 싱가폴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이스탄불비엔날레, 후쿠오카트리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등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각종 비엔날레들은 서로 예민하게 각축을 벌이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현재 광주비엔날레가 지닌 약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있는가?”하는 앞서의 질문과 관련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적인 작가를 양성하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의 부재를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굳이 배구에 비유하자면, 공(광주작가)을 토스(선정)하여 띄우기까지는 했는데(광주비엔날레에서) 강 스파이크(국제무대에 진출시키는)하는 전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비용의 지출에 따른 기대효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비엔날레 무용론과 같은 불만들이 광주화단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광주지역 작가를 국제적인 작가로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의 수립과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남의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벤치마킹의 정신이 그래서 필요한 것인데, 가령 초기의 상파울루비엔날레가 취했던 고도의 전략은 광주를 수준 높은 문화도시로 세계 속에 각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50년의 역사를 통해 유럽과 미국의 정상급 작가들을 대규모로 초청, 국내에는 이름이 있지만 아직 국제적인 지명도를 얻지 못한 국내의 수많은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후광을 톡톡히 이용했다. 지명도의 자연스런 편승을 그들은 노렸던 것이다. 또한 50여 년의 역사에 이르는 비엔날레를 치루는 과정에서 얻은 유무형의 자산은 비엔날레를 치루는 데 투여한 물리적인 비용 이상의 것으로 결코 화폐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묻도록 하자.
광주비엔날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동문화 주최 세미나 발제문

*필자 주: 맺음말 부분은 광주시립미술관 뉴스레터에 기고한 필자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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