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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판즈와 붉은 색의 이미지

윤진섭

쩡판즈(Zeng Fanzhi(1964- )는 중국의 대표적인 제3세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64년 출생이니까 유년시절에 문화대혁명(1966-1976)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중국 현대사에서 일진광풍을 일으킨 문화대혁명을 감성이 예민한 유년시절에 체험했던 작가들이 오늘날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제3세대 작가로 급부상하고 있는 현실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불운이 행운이 되는 ‘새옹지마’의 고사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세대 작가들의 성공담은 자본주의의 유입 이래 중국이 보여주는 한 판의 드라마다. 쟝샤오강, 유에민준, 왕광이로 대변되는 블루칩 작가들의 세계미술계의 입성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작품 가격, 거기에 쩡판즈가 독특한 스타일의 그림으로 합류하고 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세계 굴지의 경매회사가 이들의 작품 가격 상승을 유도하는 도화선인데, 왕광이를 제외한 이들의 공통점은 내면적 페이소스다. 쟝샤오강의 슬픈 미소, 유에민준의 냉소적인 웃음, 쩡판즈의 고독한 눈빛등은 다사다난했던 중국의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면서 내면화된 독특한 정서의 표상들인데, 이 정서적 상징이 상업적 흥행의 주요인이 되고 있는 현실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난한 인민의 후예가 시대가 바뀌면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들게 되고, 그에 따라 부를 누리게 되는 과정은 떠오르는 용의 신화만큼이나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쟝샤오강이나 유에민준 그리고 왕광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년시절에 겪었던 문화대혁명의 충격적인 경험은 쩡판즈 작품의 저변을 형성하는 정서적 공감대다. “예술가라면 사회를 관조해야 한다”는 작가의 발언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쟝샤오강과 유에민준의 작품을 관류하는 내면적 상흔이 쩡판즈의 작품에서도 엇비슷하게 읽혀지는 것은 이들의 작품세계의 바탕이 중국 특유의 정치적 현실로부터 배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갤러리현대에서 전시된 쩡판즈의 작품은 1989년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것들이다. 초기작부터 시작해서 몇 단계를 거치는 시리즈의 대표작이 망라된 만큼 눈길을 끄는 대작들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1989년은 중국 현대미술사상 초유의 아방가르드 미술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해이기도 한데([중국현대미술전], 중국미술관, 1989), 이 무렵에 그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 풍의 구상회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한 <화가와 모델 No.2, 캔버스에 유채, 117x83cm, 1989>, <이발, 캔버스에 유채, 84x55.5cm, 1989>, <신체, 캔버스에 유채, 75x55cm, 1989> 등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쩡판즈의 전체 작품 맥락에서 볼 때 아직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나타나기 이전의, 말하자면 모색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발이라는, 중국의 도시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을 소재로 한 작품이나 모델 혹은 여인의 누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소재가 지닌 진부함만큼이나 회화적 실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 보이는 탄탄한 구성과 천부적인 색채 감각은 미래의 ‘쩡판즈’를 예고하고 있다.

쩡판즈에게 있어서 본격적인 회화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고기(Meat), 캔버스에 유채, 130x95cm, 1992>, <사람과 고기(Man & Meat)> 시리즈에 들어서이다. 이 연작에 사용된 피부의 붉은 색은 <가면(Mask)> 시리즈를 거쳐 근작의 인물화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표현주의 풍의 강렬한 터치와 더불어 붉은 색이 주는 살벌한 느낌은 <고기> 시리즈의 제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오스트리아의 행위예술가 헤르만 니취의 도살된 양을 연상시키는, 거꾸로 매달린 채 핏빛이 선연한 돼지고기 더미()와 고기를 자르는 사람들의 번들거리는 눈빛()에는 묵시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이 광포한 분위기와 쩡판즈가 유년시절에 체험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의 핏발선 민중들의 눈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한 예술가의 작품은 그의 표현에 의해 생겨나고, 그 표현은 그가 살아온 사회적 환경, 그가 밟았던 토양의 냄새, 그를 감쌌던 우주인 것이다.”(갤러리현대, 전시도록, 인터뷰 중에서)


쩡판즈는 인체의 섬세한 세부 묘사에도 능한 작가다. 이는 곧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이 탄탄한 구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고전적인 수련의 깊이가 표현주의의 특징인 생략과 과장으로 연결될 때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기> 시리즈에서 <가면> 시리즈를 거쳐 <초상> 시리즈로 이어지는 바리에이션은 전혀 우연이 아님이 입증된다. 한 시리즈에서 다음 시리즈로 넘어가는 사이사이에 모색의 기간이 존재한다. 공통점은 붉은 색이 약간의 뉘앙스를 달리하면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붉은 색이 바로 쩡판즈의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인 것이다. 그것은 ‘붉은 수수밭’처럼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과의 동일시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어떠한 심볼을 작품에 묘사하여 중국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대신 작품 자체에서 중국의 느낌이 묻어 나왔으면 한다. 내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굳이 중국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다”고.

<가면> 시리즈는 현대의 중국 사회가 겪고 있는 위선과 허장성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통제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개방된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히 전환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들이 겪게 된 가치의 혼란과 계층의 이동에서 파생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가면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고기> 시리즈의 특징인 광포한 이미지는 얼굴과 손에 상징적으로 남겨놓고 배경은 단순하게 처리되고 있다.

<초상> 시리즈는 최근 몇 년간에 걸쳐 제작된 것인데,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연작에 와서 표현주의적 요소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배경이 되는 아사천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가운데 화면의 중앙에 설정된 인물의 포즈나 표정의 묘사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도 얼굴과 손에는 붉은 색으로 처리돼 있으며, 특히 머리 부분을 격렬한 터치로 처리하여 회화적 느낌을 강조한 것이 인상적이다.

쩡판즈 특유의 붉은 색은 대지를 묘사한 <무제(Untitled)>나 <불> 시리즈에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중국 전통 수묵화의 자유분방한 필획을 연상시키는 풀과 나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 이 연작은 중국의 광활한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킨 것이다. <밤(Night)>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의해 비쳐진 도로의 밤 풍경을 그린 것으로 아마도 작가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숲과 불의 이미지, 숲과 새벽의 여명, 숲과 마치 시신처럼 물에 떠있는 인물의 이미지 등등 최근의 회화적 실험은 숲의 이미지를 통한 감정의 이입이란 측면에서 쩡판즈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을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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