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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상 / ‘자생성’에 대한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원형상>

윤진섭

일랑 이종상은 우리 미술의 원형성에 대해 오랫동안 깊은 연구를 해 온 작가다. 그의 관점은 늘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우리의 산하가 지닌 기세와 지맥, 그리고 우리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색채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인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학자연하지 않는다. 단지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이와 관련된 많은 글을 쓰고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연구와 관심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자생성’ 혹은 ‘원형상’이란 표제어에 집약돼 있다. 자생성은 한 정의에 의하면, “한국적 미의식과 정체성에 작용하여 방향을 잡아주는 적응력, 즉 우리 미술의 특성을 유지하려는 근원적인 힘”(한국미술의 자생성, 한국미술의 자생성 간행위원회, 한길아트, 1999)이다.

‘원형상’은 일랑 이종상이 19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작해 오고 있는 작품들에 붙인 제목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개의 표제어는 일랑의 작업 전체를 관류하는 키워드인 동시에 50여년에 이르는 화업을 감싸고 있는 하나의 화두라 할 수 있다.

이번에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종상전>은 일랑 개인적으로는 칠순을 기념하는 기념전인 동시에 화단사적으로는 화업 50년을 기리는 회고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두툼하게 제작된 도록에는 6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작업이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돼 있는데, ‘진경’, ‘신벽화’, ‘원형상’이 그것이다.





‘진경편’에는 1963년작인 <여인들>(화선지에 수묵담채, 232x138cm, 연세대학교 박물관 소장)을 필두로 노동현장을 그린 작품들, 도시풍경, 산천풍경, 고사성어도, 독도풍경이 주로 실려 있으며, ‘신벽화편’에는 1960년대 후반에 제작한 <태고>(1968-1969, 혼성벽화, 130x180cm)를 서두로 상감벽화, 프레스코, 첨부벽화, 침윤벽화, 설치벽화 등등 다양한 기법에 의한 벽화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원형상편’이다. 도록의 후반부 전체가 이 부분에 할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원형상’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도록의 편집에 작가의 의견이 반영되는 관례를 염두에 둔다면, 일랑의 ‘원형상’에 기울이는 애정이 매우 깊고 큼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대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원형상> 시리즈는 마치 이 땅의 산하를 단순하게 표현한 고지도처럼 기호적, 상징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적, 청, 황, 흑, 백 등 오방색을 기조로 다양한 기법과 재료적 실험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원형상> 시리즈다. 삼각형 혹은 지그재그 형태의 선묘로 상징화된, 산과 길을 암시하는 점선, 가늘고 긴 필선으로 표현된 내(川) 등등이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재료는 양지에 수묵, 장지에 수묵, 순지에 수묵, 장지에 수묵 천연채, 순지에 수묵 천연채, 화선지에 수묵, 장판에 수묵 천연채, 장판에 유탄, 닥종이에 수묵 천연채, 동판에 유약 등등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약 20여년이란 장구한 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이 다양한 실험들은 비단 평면뿐만이 아니라, 병풍을 이용한 설치와 벽화에 이르기까지 방법론을 달리하며 다채롭게 전개되고 있다.

일랑의 이 실험에서 주목되는 것은 토착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다. 무엇보다 유구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빚어낸 산물들을 이용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각종 한지를 비롯하여 닥종이, 천연채색 재료와 함께 병풍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업들이 그 예다. 그가 늘 주장하며 실천해 온 우리 미술의 ‘자생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한 예이다. 그는 문화가 늘 살아 숨을 쉬며, 동시에 다른 이질 문화와 만나 충돌과 접변을 일으키는 유기체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그가 오로지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자가 아니라 개방된 의식의 소유자이며, 오랜 국제적 경험을 통하여 남의 것과 나의 것을 비교하여 견줄 줄 아는 겹눈의 소유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원형상> 시리즈가 중견작가로서 종합적인 시야를 갖추기 시작한 오십대 초반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러한 진단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20대 중반에 이미 국전을 비롯한 각종 관전의 상을 휩쓸어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가 30-40대에 이르러 ‘진경’의 깊은 의미를 체득하게 된 것은 우리 미술의 자생성에 대한 신념의 단초가 아니었을까. 진경이 단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화선지에 옮기는 단순한 작업이 아닌 이상,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화하는 지난한 작업은 당시의 일랑에게 있어서 막중한 과업이었던 것이다. 이는 미술대학 재학 시절, 애초에 서양화과에 입학했던 그가 뜻한 바 있어 동양화과로 전과를 했던 그의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의 현실을 독자적인 양식으로 담아내는 일이야말로 야심 있고 패기에 찬 그에게는 필생의 과업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70년대 작품에는 그 제재나 재료의 사용, 그리고 방법론에 있어서 80년대 수묵화 운동의 맹아와도 같은 것이 담겨있다.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나 붓끝의 희롱이 아닌, 현실에 주목하여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화면에 담되, 그 뒤에 정신이 살아 숨쉬게 하는 ‘진경’의 선구적인 정신을 몸소 실천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70대 후반에 제작한 일련의 해외 풍경은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역작들이다. 특히 아열대지방의 풍경을 그린 <반자르마신에서>(1979, 화선지에 수묵담채, 35x280cm)는 짜임새 있는 화면구성을 통해 이국적인 정취를 독특한 필치와 색감으로 녹여내고 있어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국의 풍경을 긴 두루마리에 파노라마처럼 담아낸 이 작품에는 원근법적 의미에서의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시점이 여럿이랄 수 있는데, 이는 국내의 풍경을 그린, 횡으로 긴 작품들에서 보이는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이 다시점법의 원용은 <원형상> 시리즈에 빈번히 등장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다. 이것의 요체는 여러 방향에서 보이는 대상의 모습을 하나의 평면에 집어넣는 데 있다. 이 방식은 고대 이집트와 근동의 벽화를 비롯하여 우리의 전통 민화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다신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시방식이 일점소실법으로 치환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세계를 하나의 시점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시각의 합리화를 꾀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고, 그러한 세계관이 개념화된 것이 바로 원근법이었던 것이다. 이 근대적 세계관이 권력화한 것이 바로 서양의 제국주의가 아닌가. ‘서세동점’은 바로 권력화한 서양의 제국주의가 해일처럼 동양의 제국을 덮쳤던 일련의 사건을 상징화한말이다.

일랑 이종상의 ‘자생성’과 <원형상>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리하자면, 잃어버린 우리의 정신과 얼을 되찾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것들이 미학적으로 내면화된 것이 ‘자생성’의 개념이며, 그것에 준거한 일랑 개인의 예술적 실천이 바로 <원형상>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옛 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 맞게 옛 것을 되살리고 새롭게 창조하는 일(법고창신)’을 가리킨다.

일랑은 이 과업의 실천을 위해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꾀해왔다. 대전시립미술관이 주최한 이번 회고전은 50여년에 이르는 그의 회화적 족적을 살펴봄으로써, 특정한 미학에 대한 한 개인의 예술적 실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돼 왔으며, 그 성과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자생성’은 이제 일랑 개인의 호사를 넘어 관심 있는 학자들의 학제적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칠십을 넘긴 일랑 개인에게 떠넘기기에는 그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은 분야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일랑의 이번 전시회는 우리의 것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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