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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주 /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윤진섭

내가 김홍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무렵이었다.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3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 있던 이건용 화실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그는 마침 이건용이 이끄는 그룹의 회원이었다. 한국의 유명한 전위그룹으로 한국현대미술사에 등장하는 는 이건용, 박원준, 김문자, 한정문, 여운 등이 1971년에 창립한 학회 성격의 미술단체였다. 미술평론가인 김복영이 이론적인 지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인 윤재명(프랑스 거주)이 이건용의 제자였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무렵 이건용은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신체항]이 현지 언론의 대대적인 찬사를 받아 국내 화단의 스타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추천으로 당시 신분이 미술대학 3학년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용대, 장경호 등과 함께 그룹에 가입을 할 수 있었다.

김홍주를 만난 것은 같은 회원으로서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대학의 대선배이기도 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당시 그룹을 비롯하여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많은 작가들은 온통 개념미술에 빠져 있었다. 논리, 개념, 구조, 현상, 장소, 언어 등등 미술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생경한 단어들이 화가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다. <<서울현대미술제>>, <<앙데팡당>>, <<에꼴드서울>>과 같은 대규모 전시회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석조전)의 드넓은 전시장은 흑백 단색화(Dansaekhwa)를 비롯하여 입체, 설치, 사진,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앙데팡당>>전 디스플레이를 마친 1977년 어느 날 오후, 이건용, 성능경, 김홍주, 김용민, 윤진섭 등 덕수궁을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덕수궁 돌담 밑에서 잠시 땀을 식히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예의 개념이 어떻고 논리가 어떻고 하는 식의 현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정확히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당시 극사실적 경향의 그림에 몰두하고 있던 김홍주는 고집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는 회화관이랄까, 예술관 같은 것을 피력했다. 그것은 당시 화단의 대세를 이루는 내용과는 썩 동떨어진 것이었는데, 그의 그런 모습에서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그룹을 떠난 것은 아마 그 이듬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78년, 김홍주는 서울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서울화랑은 규모가 작고 아담했다. 그는 쓰다버린 중고 창문틀을 비롯하여 경대, 거울, 나무판자 등등 기성의 사물을 이용한 작품을 다수 출품하였다. 당시 개념미술에 빠져 이벤트다 설치다 하며 현학적인 언어게임에 빠져있던 우리는 그런 그의 작품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아 했던 것 같다. 그냥 그의 작품을 당시 유행하고 있던 하이퍼리얼리즘의 한 경향쯤으로 치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의 그런 화풍은 당시 그룹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그의 그룹 탈퇴는 이런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당시 김홍주의 작품은 오늘의 김홍주 회화세계에 대한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나는 해방 이후에 활동한 작가 가운데 걸출한 작품세계를 이룩한 개성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그를 꼽거니와, 그의 일관된 작품세계의 탐구와 천착의 족적은 과연 오늘의 그를 만든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주변에서 구한 기성의 사물에 명주 천을 씌운 판을 결합한 뒤 그 위에 세밀화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당시에는 그 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기성의 사물과 이미지를 결합하는 이 화풍의 그 후 전개 과정은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지난 30여 년간 하나의 거대한 대하를 이루어왔다. 그의 아이디어는 유년기의 추억으로부터도 오고, 언젠가 버스의 차창을 지나쳤을 법한 이 땅의 논과 밭의 모양에서도 오고, 제사 때 치는 병풍 속의 서예 글씨에서도 오고, 석가탄신일에 길거리를 장식하는 조야한 색상의 연꽃에서도 온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그린다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점철돼 있다. 그림은 한 시대의 문화적 형식이란 것,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과 아는 대로 그리는 것 사이의 충돌일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학습의 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김홍주에게 있어서 회화는 하나의 실험실이다. 족자, 프레임의 형태와 같은 형식에 대한 실험에서부터 원근법, 다시점법, 서예, 지도, 평면성, 오브제와 같은, 내용에 대한 실험에 이르기까지, 또는 그림을 그리는 극한적인 행위 자체에 대한 실험도 포함하여 광범위한 실험이 말 그대로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은 개념적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의 그림은 매우 지적이며 냉철하다. 그는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intelligent painter)’이지 ‘가슴으로 그리는 화가(emotional painter)’가 아니다. 분명 쉬지 않고 손을 놀리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데 요구되는 노동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화가이긴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 그는 탁월한 지성인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사물을 다시 보도록 해 주는 안내자다. 또한 우리의 습관적 시각에 대한 교정자인 동시에 문화적 형식이나 해석에 대한 친절한 교사이기도 하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현대 회화는 지루했을 지도 모른다. 판에 박은 그림이 성행하는 오늘의 화단 풍토에서 회화에 대한 질문을 쉼 없이 던지는 김홍주는 분명 이단일 것이며, 그것도 가장 개성 있는 이단아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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