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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2>김아타-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몸의 회복

윤진섭

몸에 대해 가장 명료하게 말한 인물은 예수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 살이요, 피다.” 이 식사 장면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그렸지만, 김아타 만큼 디지털 사진기법을 이용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드물다.


길이가 9m에 달하는 대작인 ‘최후의 만찬’(2003년 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작품의 하단부, 즉 빵과 포도주 잔이 놓여있는 식탁이다. 빨간 천으로 덮인 정갈한 식탁 위에는 일곱 덩어리의 빵과 여섯 개의 잔이 놓여 있다. 등장인물은 예수를 포함하여 모두 열세 명. 그렇다면 여섯 덩어리의 빵과 일곱 잔의 포도주가 부족하지 않은가? 아니 빵은 잘라서 나누어 먹는다고 하지만, 잔은 사람 수대로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궁금해서 작가에게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 작품은 모두 다섯 개의 장면이 합해져서 이루어졌다는 것, 그러니까 열세 명의 출연자가 열세 번의 서로 다른 포즈를 취하여 촬영한 화면이 겹쳐진 것이다. 디지털 합성술에 의해 편집된 화면은 마치 영성(靈性)이 나타난 것처럼 겹쳐 포개진 흐릿한 사람의 이미지들로 구성돼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말씀은 곧 로고스(logos)다. 그리고 그것이 육신을 통해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알다시피 육체는 구체적인 형태와 무게를 지니고 있다. 감각기관이 있어서 추위와 배고픔과 아픔 등등의 감각을 느낀다.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년 작)에는 예수가 모진 고문으로 고통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의 고문방법과 도구를 그대로 재현한 이 장면에서 예수는 채찍과 찍개 등등의 끔직한 고문도구에 의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수난을 당한다. 이 영화는 정신력과 육체적 고통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김아타의 ‘최후의 만찬’에는 건강한 한국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열 세 명이란 등장인물의 숫자와 빵, 그리고 포도주가 의미하는 상징성이 없었더라면 그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8년 작)을 패러디한 것인지 언뜻 알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믿어 연꽃 보좌 위에 개를 앉혀놓고 촬영한 김아타에게 있어서 예수와 열 두 제자의 모습이 실존하는 한국 남자들로 치환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해체의 전략을 구사한다. 예수와 부처의 존재가 아이와 개, 젊은 남녀들에게도 그대로 대입됨을 볼 수 있다. 그는 성(聖)과 속(俗)의 교묘한 전복을 통해 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90년대 초반의 ‘해체’ 시리즈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시도한 작품이다. 이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인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말 그대로 ‘자연에 던져짐’ 그것이다. 폐선지 부근, 잡초가 우거진 풀숲, 구불구불 뻗어나간 도로, 구덩이가 깊게 파진 유적지, 한적한 밭 등지의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나체의 인간들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그곳에 인간이 있음으로써 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다.

김아타가 구사하는 이 대비의 전략은 사진이 보여주는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유도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표현을 거꾸로 하자면 “세계와의 탯줄을 잇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을 자연에 돌려보내는 일, 그것의 매개가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몸인 것이다. 그것은 정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몸이 없이 정신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오로지 몸을 통해서, 몸이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만 자연으로 귀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 느끼는 자연의 상큼한 냄새, 눈으로 직접 보는 자연의 색깔, 그리고 손으로 만지는 촉감을 통해 생생한 자연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나의 몸은 세계 속에서 많은 다른 사물들 사이에 낀 한 사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메를로 퐁티의 잘 알려진 표현을 빌리면, “세계의 직물 속에 갇혀 있다.” 인간에 대한 이 숙명적 정의는 몸의 회복 가능성을 열어준다. 퐁티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신체는 스스로를 움직이며 동시에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에 있는 사물들을 붙잡아 놓고 있다.”

김아타의 ‘해체’ 시리즈에 보이는 이 야생적 풍경은 결국 몸의 능동성을 말해주는 일화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신과 몸의 이원론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코기토(cogito)의 명제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근대를 떠받혀온 이성의 우위에 저항하며 등장한 것이 바로 니체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몸이다. 사물과 관련된 우리의 언어는 세계가 다름 아닌 수많은 몸으로 구성돼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산의 등허리, 핏빛 포도주, 며느리발톱(꽃의 이름), 큰 바위 얼굴, 연의 꼬리, 배(船)의 불룩한 배(腹) 등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러한 은유는 사물을 눈으로 볼 수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정화열은 주장한다. “나는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video ergo sum).”

김아타는 인간의 몸을 통해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다. 자연에 널브러진 인간의 나신(해체 시리즈), 박스 속에 갇힌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뮤지엄 프로젝트),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인간과 사물들(온에어 프로젝트)의 모습은 다같이 몸을 화두로 삼아 풀어나간 세계와 인간 사이의 소통의 관계를 보여준다.

2000여 년 전에 예수는 말했다. “이것이 내 살이요, 피다.” 그는 몸의 성인이다. 그가 말한 몸의 비유는 지금도 하나의 상징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쉰다. 근대의 이성이 말살한 몸의 영성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시점이다.

/yoonjs0537@hanmail.net

- 파이낸셜뉴스 2008.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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