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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5>인간의 수성(獸性)에 대한 고발

윤진섭

■인간이 아름답다? 한 꺼풀만 벗겨보라!

화사하게 핀 꽃은 이울음을 암시하며, 절정은 종말의 씨앗이다. 그래서 극도로 아름다운 것은 때로 음산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다. 이 죽음의 미학이 사람들을 열광시킨다. 왜 사람들은 죽음에 열광하는가. 일본의 저명한 극우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는 사무라이식 할복자살로 젊은 생을 마감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동경대 전공투 학생들과 열띤 토론을 벌인 지 1년 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천황제를 열렬하게 지지했던 그의 신념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일제시대, 국내 최초의 여자 관비유학생이었던 윤심덕의 자살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경우다. ‘사의 찬미’를 불러 대중적 찬사를 한 몸에 모았던 그녀는 아내가 있는 연인 김우진을 사랑한 죄로 그와 함께 현해탄의 검푸른 파도에 몸을 던졌다. ‘설국’의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가스 자살은 죽을 당시 73세에 이른 고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1987년,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그릇된 신앙심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메스컴은 연일 자살을 기사로 다룬다. 인기 절정의 연예인과 정치인, 사회 저명인사들의 죽음,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인터넷의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이 벌이는 ‘죽음의 축제’다. 왜 죽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필자는 특히 자살 사이트 동호인들의 집단적 죽음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아노미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껭(1858∼1919)은 ‘자살론’에서 자살을 사회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자살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데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봤다.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지나치게 많은 쥐들이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경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고 볼 때, 사회의 일정한 자살률에 대한 뒤르껭의 통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는 자체의 존속을 위해 자살이라는 일종의 정화장치를 가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일종의 ‘솎아내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전쟁 또한 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마치 유기체처럼 자체의 존속을 위한 ‘솎아내기’가 그 원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은 생의 종착역이자 몸의 종언을 의미한다. 순장은 영혼의 불멸을 믿는 데서 나타난 인류의 풍습이지만, 죽으면 육신이 썩는다는 자명한 사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다.

한효석의 그림을 보라. 그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얼굴이 한 꺼풀만 벗겨내면 곧 썩을 운명에 처할 고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푸줏간 시렁에 걸려있는 고기 덩어리처럼 검붉은 색을 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썰어놓은 소고기를 연상시킨다. 그는 묻는다. 이것이 너의 본래의 모습이다. 이것이 아름다운가. 아니면 추하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 극도의 아름다움은 극단의 추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언설은 미적 가치나 판단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아도르노는 저서 ‘미학이론’(문학과지성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미가 죽음과 유사한 것은 예술 속에서 소멸하는 생명체의 다양성에 대해 예술이 부여하는 순수한 형식의 이념에 기인한다.”

한효석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유추해 낸다. 나치가 자행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게르만 민족의 순결주의가 그 원인이었다. 히틀러라는 한 광인에 의해 저질러진 이 집단적 광기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솎아내기’의 한 전형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효석의 그림들은 다름 아닌 얼굴의 피부 밑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과 그릇된 야망에 대한 고발장이다. 그는 시뻘겋게 채색된 이 그림을 통해 인간이 지닌 금수와도 같은 속성에 대해 경고음을 발한다.

그러나 아도르노도 말했듯이, 예술은 오직 탄식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무기력한 예술은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끔찍한 만행이나 살육에 대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예술의 비애다. 예술작품이 지닌 환기력은 기껏해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반성을 일깨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강제력이 없다. 강제력이 없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큰 맹점이자 슬픔이 아닌가.

한효석의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눈이다. 이 두 개의 눈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뚫어지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두 눈에 그대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쳐다보라. 그림 속의 두 눈은 뭔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뭔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인간의 오욕칠정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을 응축하고 있는 그림 속의 시선은 마치 내면을 성찰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한효석의 또 하나의 작품 ‘불평등의 균형’은 돼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는 정교한 떠내기(casting) 기법을 이용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 실제의 돼지와 사람의 얼굴을 떠낸 것이다. 이 놀라우리만치 정교한 사실성은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보다 더욱 강도 높게 인간의 야만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돼지만도 못한 놈’이란 욕이 있듯이, 한효석은 이 반인반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몸에 내재된 수성(獸性)을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한효석이 보여주는 이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통해 우리는 그 이면에 감추어진 그 무엇을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과정에서 억압된 것, 개발의 논리에 의해 소외된 것일 수도 있다. 강자의 이익보다는 소수의 비애와 고통, 그리고 가슴을 저미는 슬픔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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