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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8>이용덕-접촉의 동물로서 인간

윤진섭

■갇힌 벽면서 나와 ‘날좀보소’ 손짓하네

우리는 거리를 지나면서 사람의 물결을 본다. 다가오는 사람의 무리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무리들. 그것은 파도를 닮았다. 그래서 인파(人波)라고 한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물결처럼 보이는 그것이 자세히 보면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여자, 걷는 동작을 멈추고 구두끈을 고쳐 매는 남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소녀 등등 다양한 동작을 취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디 그뿐이랴.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비좁은 거리에 서서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에 열중하는 젊은 여성들, 그들은 대화 중에도 연신 상대방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얼굴에 묻은 뭔가를 떼 내주는 등 자연스런 동작을 쉬지 않고 취한다. 인간이 ‘접촉의 동물’임을 상기시켜주는 대목이다.

데스몬드 모리스는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서로 털을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인간들이 벌이는 이 ‘접촉’의 행위야말로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는 원천이라고 말한다.

신체적 접촉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말을 거는 행위, 컴퓨터로 채팅을 하는 행위,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거나 손을 만지는 행위 등등이 모두 신체적 접촉의 동작들이다. 그것들은 뻑뻑한 사회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다. 생각해 보라. 친구사이인 두 사람이 길에서 오랜 만에 조우했는데, 꾸벅 고개만 숙이고 지나친다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그 때 특별히 할말은 없어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눔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우정을 확인한다. “어이, 잘 있었나?” 혹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와 같은 사소한 말들이 인간을 결속시켜주는 ‘행위(stroke)’인 것이다.

작가 이용덕(서울대 교수)은 조각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신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깅을 하는 소녀,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여성, 걸레질을 하는 여성,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소년들, 누워있는 남자들 등 그의 조각 작품의 소재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들이다. 그들은 단순하게 처리된 배경으로부터 이제 막 불쑥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표현돼 있다. 그것이 어찌나 생동감이 있어 보이는지 마치 금방이라도 다가와 말을 걸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런데 실상 그것들은 판판한 벽면에 새겨진 허상들이다. 그것도 양각이 아니라 깊게 파인 음각이다. 표면으로부터 돌출돼 나온 부조처럼 보이는 그것이 실제로는 안으로 움푹 파인 것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용덕은 양각된 인체의 도드라진 것에 딱 반대되는 그만큼 거꾸로 파 들어가서 이처럼 놀라운 시각적 허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인체의 모습은 일종의 가역적 풍경인 것이다.

그것은 빛 때문에 가능하다. 빛이 그가 보여주는 이 시각적 트릭의 원천이다. 빛이 없었더라면 하나의 구덩이에 불과했을 그의 음각 조각 작품을 빛이 있음으로써, 그 빛이 생동감이 있는 사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불룩 튀어나온 둔덕이건, 움푹 파인 구덩이건 고르게 비추는 빛의 성질이 아니었다면 그의 이 작품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재인가. 사물로서의 작품은 실재한다. 우리의 눈앞에 실제로 버티고 서 있는 이 벽은 만질 수 있고 움푹 파인 구덩이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할 수도 있는 사물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어떤가. 그것은 허상이다. 빛의 도움을 받아 음각된 구덩이의 높낮이와 색깔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합작품인 것이다. 실제로는 움푹 파인 것이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도드라져 보이는 이 시각적 트릭은 그의 작품을 일종의 ‘회화적 조각’으로 만드는 근원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회화인가? 그것은 회화이면서도 조각인 ‘경계’에 위치해 있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그림이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조각임에 분명한 ‘접점’에 그의 작품이 놓여 있다. 그것을 그림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시각적 습관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색채가 결여됨으로써 완벽한 회화적 재현도, 또 하이퍼리얼리즘 조각의 경우처럼 완벽한 신체를 지니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조각적 재현도 아니다. 이용덕은 완벽한 색채나 양각에 의한 재현술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자와 대상 사이에 일종의 거리를 설정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것과 같은 실제성을 결하고 있다. 처녀가 맨 스카프와 그녀가 타고 있는 자전거에는 색깔이 없다. 그것들은 그의 작품이 실제가 아니라는 징표들이다.

이용덕이 뛰어난 작가라는 사실은 그가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고도 회화적 재현을, 환조를 사용하지 않고도 조각적 환영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때 회화와 조각의 접점을 확인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마치 가로와 세로의 가늠자처럼 인간의 시각은 어느 시점에서 회화와 조각의 분리와 결합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신체의 개입, 즉 신체적 접촉에 의존한다. 언젠가 프랭크 스텔라는 말했다.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이다.” 이제 나는 말한다. “당신이 보는 것이 곧 접촉하는 것이다”라고.




이제 우리는 눈으로만 보는 여행을 끝내고 신체를 통해 접촉하는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적 접촉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다. 맹인은 보지 않고도 접촉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 세계의 생생한 존재의 살결을 확인한다. 접촉은 우리의 몸과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교량이다. 이용덕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갇힌 벽면에서 뛰쳐나와 우리를 향해 달려 나오는 것 같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다가간다. 거기에 신체가 있다. 인간은 ‘접촉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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