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윤진섭의 문화탐험] <9> 윤진섭-새로운 시작,행위예술의 세계

윤진섭

■70∼80년대 ‘침묵의 거리’ 몸으로 말하다

이번 호에는 필자의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사실 ‘몸’에 관해서는 나 자신 할 말이 좀 있는 편이다. 197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당시 첨단의 전위미술 단체로 잘 알려진 ‘S.T그룹’에 참가하게 되면서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회장인 이건용을 비롯하여 성능경, 김용민, 김장섭, 김홍주, 김용익, 김용철, 신학철 등 기라성 같은 화단의 선배들로 진용이 짜여 있었다. 거기에 강용대, 장경호와 함께 나도 소장파로 가입을 했다. 당시 화랑이라고는 인사동 부근에 견지화랑, 미술회관, 현대화랑, 서울화랑, 태인화랑, 통인화랑 등 10여 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선화랑이 막 문을 연 때였으니 지금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다.

1977년 9월17일, 나는 당시 안국동 로터리에서 한국일보사로 가는 골목에 있던 서울화랑에서 이건용과 함께 ‘조용한 미소’라는 타이틀로 이벤트 쇼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두 세 개의 이벤트를 발표하였는데, ‘신촌을 지나가는 여자의 구두 색’이라는 작품은 그 중의 하나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자면, 나는 하얀 색 자갈과 노란 색의 국화꽃, 노란 색의 종이, 노란 색의 크레파스 등이 담긴 노란 색의 비닐 서류봉투를 들고 나와 바닥에 앉는다.

서류봉투에서 내용물을 모두 꺼내놓은 나는 일련의 행위를 시작하였다. 하얀 자갈에 노란 색 크레파스를 칠하고, 노란 색 국화꽃의 꽃잎을 따고, 노란 색 종이를 찢는 등 일련의 행위를 한 뒤에 이를 다시 노란 색 서류봉투에 넣은 다음, 겉장에 검정색 매직으로 ‘신촌을 지나가는 여자의 구두색’이라고 썼다.

이 작품은 당시 언어의 문제에 빠져 있던 나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불교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도 관계가 깊다. 즉, 어떤 사물이 지닌 색을 가리켜 ‘노란 색’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이미 실체가 아니며 오로지 비유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나는 다시 제6회 S.T그룹전 오프닝 날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이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10㎝ 크기의 정방형 색지와 자갈, 나뭇가지 등이 담긴 작은 손수레를 끌고 등장한 나는 이어서 화랑 바닥에 색지를 늘어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위에 놓인 자갈을 쌀 것을 권유하였다. 이 행위가 끝나자 화랑은 마치 형형색색의 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는데, 나는 그것들을 모아 화랑의 한 구석에 울타리를 만들고 나뭇가지로 작은 귀틀집을 만들었다. 이 퍼포먼스는 70년대의 소위 ‘이벤트’가 지닌 논리적이며 선(禪)적인 성격과는 달리, 관객참여 중심의 유희성이 두드러진 것이어서 신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렇게 해서 행위예술(performance)을 시작한 나는 80년대 후반까지 다양한 내용의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1986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열린 ‘1986, 여기는 한국전’에서 나는 10m 크기의 정방형 천위에 대걸레와 싸리비를 이용하여 먹물로 드로잉을 한 뒤, 이어서 20m 길이의 천을 먹물이 묻은 대걸레를 들고 온몸으로 밀며 찢어나가는 베 가름을 행한 적도 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행위예술은 총체예술적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술은 물론이고 음악과 무용, 연극, 영화 분야에서도 행위예술을 하는 작가들이 늘어났다. 중요한 것은 미술을 전공한 작가들의 작품에 신시사이저와 같은 전위음악이 도입되는 등 감각적인 요소들이 중시된 것이다. 그러한 성격이 잘 드러난 행사가 바로 남영동에 문을 연 아르꼬스모미술관 기획의 ‘서울 86 행위·설치미술제’였다. 이건용 교수가 조직한 이 미술제에 국내의 정상급 행위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나도 이 행사에 초대를 받아 ‘숨쉬는 조각’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팬티만 걸친 13명의 남자 행위자의 몸에 파란 색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커다란 붓으로 먹물을 찍어 자유 드로잉을 한 것이다. 실연(實演)은 신시사이저의 전위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행위자들이 순서대로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르꼬스모미술관은 아래 위층 두 개의 전시장이 중앙 계단으로 연결돼 있었는데, 각 행위자들은 차례로 입장하여 지정된 위치로 가서 미리 정해진 포즈를 취했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고정된 자세로 있는, 말 그대로 ‘숨쉬는’ 조각이 되는 것이다. 전시장에 발 디딜 틈 없이 운집한 관객들은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진풍경에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실연이 진행되는 동안 행위자의 몸은 조각 작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리기 위한 살아있는 화선지였다. 사람의 몸을 화선지로 삼아 붓으로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림으로써 바탕(畵紙)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89청년작가전’에서 높이 10m 정도 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중앙전시실의 대형 유리창에 계란 180개를 던져 매스컴의 주목을 끈 뒤, 나는 같은 해 7월에 동숭동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이란 긴 제목의 행위미술제에 참가하였다. 이 때 발표한 작품이 사람의 피를 소재로 삼은 퍼포먼스였다. 나는 이 퍼포먼스에서 처음으로 나의 피를 사용하였다. 메기와 자라가 담긴 수족관과 전시장 바닥에 나의 몸에서 직접 뽑은 피를 뿌렸던 것이다. 검정색 안경에 검정색 망토를 걸친 나는 한 손엔 램프를 들고 한쪽 발에 각목을 댄 채 전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와 휠체어에 앉은 채 이 일련의 행위를 벌였다. 관객들은 수족관을 붉게 물들인 피를 보면서 경악하였고, 나는 검정색 안경을 통해 이 살풍경한 광경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나의 피를 매개로 나의 몸과 수족관에 담긴 물고기들이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몸의 언어, 이것이야말로 우주를 향해 설치된 살아있는 안테나가 아니겠는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