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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13>야니스 마크포로우스-인간의 오감

윤진섭

몸은 세계를 꿰뚫는 나침반

야니스 마크포로우스(Jannis Markopoulos). 1962년에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출생하고 테살로니키 미술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베를린에 유학, 베를린 미술대학에서 훼디케 교수를 사사한 작가다. 나는 최근에 이 작가를 관훈갤러리에서 만난 뒤 그의 작품세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 영역은 넓다. 회화에서 오브제, 설치, 공공미술,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전 영역이 그의 관심 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나의 주목을 끈 것은 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상상력은 모름지기 예술이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을 초월해 있다. 예술은 그냥 예술일 뿐, 거기에 인위적인 구역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 작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상상력이 명하는 바에 따라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눈으로 보고 행할 뿐이다. 거대한 건물을 새총으로 날려버릴 구상을 하는가 하면, 집채만한 코끼리들이 우글거리는 동물원에서 퍼포먼스를 한다.

이 퍼포먼스를 잠시 살펴보자. 중앙에는 여덟 마리의 코끼리가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왼쪽의 우리에는 한 마리의 코뿔소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한 사람의 남자가 창살 안에 갇혀있다. 말하자면, 동물을 가둬 눈요기 거리로 만든 동물원에 거꾸로 사람이 갇힌 형국이다. 묵언에 든 스님처럼 남자는 하루 종일 한마디의 말도 없다. 이른바 ‘살아있는 그림’이란 뜻의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인 셈이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거기에선 어떤 해프닝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남자는 그저 우리 안에 갇혀 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그는 하루 종일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호기심에 가득 찬 관람객들의 눈에 그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 ‘야니스 마크포로우스의 추’

알다시피 동물원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의 산물이다. 감옥이나 정신병원처럼 특정의 대상을 특수한 목적아래 격리 또는 감금하기 위해 만들어낸 공공시설의 일종인 것이다. 물론 동물원은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이야기한 사회적 규율을 위한 감금의 시설은 아니지만, 그 목적이 학습이 됐던 동물의 보호가 됐던 감금이란 관점에서 보면 동일하다.

야니스의 이 퍼포먼스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다. 우리에 갇힌 한 남자를 통해 그를 바라보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존재를 투영해보는 하나의 거울.





예술은 이처럼 예술작품이란 하나의 매개물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한다. 거기서 관람객이 보고 느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철창에 갇힌 한 인간을 통해 미국의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리스먼이 이야기한 ‘군중속의 고독’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현대의 고도산업사회에서 인간은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두려워하며 내면적 고독감에 휩싸여 번민한다.

그것이 현대판 인간의 자화상이라면, 관람객들은 우리에 갇힌 남자라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셈. 거기서 우리에 갇힌 한 인간의 몸은 어둡고 억압적인 사회적 제도에 감금된 ‘신체’의 한 상징으로 표상된다.

발칸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그리스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국토의 5분의 4가 험준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레타, 로도스, 레스보스 섬 등 수많은 섬들이 산재한 에게 해와 케르키라, 케팔로니아, 자킨토스 섬 등이 포진해 있는 이오니아 해를 낀 이 나라는 지형이 복잡한 만큼 예로부터 신화가 번성했다.

신화가 번성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만큼 원주민들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의 저자인 호머의 후예답게 야니스 마크포로우스는 신화의 세계를 우려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이카루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커다란 낙지를 얼굴에 휘감은 퍼포먼스 등 그의 행위예술은 유독 바다와 연관된 것이 많다. 그것이 해양민족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라면, 그의 작품이 지닌 시적 분위기와 심오한 철학적 사고는 소포클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전인자가 칼 융의 표현을 빌면, 집단무의식의 저층에서 떠오른 원형(archetype)일 터. 그래서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뚜렷한 민족적 색채를 띠게 되는 것이다.








▲ ‘드롭 오브 더스트’
여기 신화의 세계와는 판연히 다른 또 하나의 퍼포먼스가 있다. 이른바 ‘야니스 마크포로우스의 추’란 작품이다. 아마 신체의 긴장감을 이처럼 냉정하게 표현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제목 ‘푸코의 추’를 패러디한 작품을 통해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먼저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상황을 살펴보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벽에 부착된 침대에 누워있다. 여자의 얼굴 정면 위에는 뾰족한 끝을 지닌 여자 키만큼 한 크기의 추가 매달려 있다.

이때 주변에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은 매우 위태롭게 느끼는 반면, 정작 누워있는 당사자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눈 위에 있는 육중한 추가 그냥 단순히 회색의 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가 좌우로 흔들리게 되면 이윽고 여자는 추를 인식하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야니스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지각에 따른 인간의 신체적 반응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무엇을 지각한다는 것과 반응한다는 것이 학습의 소산임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가령, 불에 덴 경험이 없는 아이가 빨간 색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 한 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몸은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에 정확히 반응하는 정밀한 유기체이며, 다섯 개의 감각기관, 즉 오관은 세계를 탐지하는 정교한 나침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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