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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 <18> 아네트 메사제-추억의 박물관

윤진섭

■아득한 기억의 잔상에 소꿉놀이같은 상상력 펼쳐

누구나 어릴 적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감춰 놓고 조금씩 꺼내 먹는 사탕처럼 추억은 달콤하다. 그러나 떠올리기 조차 싫은 추억도 있다. 그럴 땐 머리를 흔들며 애써 벗어나려고 한다. 이 모두가 추억이 지닌 양면성 때문인데 가령 인형에 얽힌 추억은 좋음과 싫음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흔히 어린이는 인형에 인격을 부여하는데 인형을 아기와 똑같이 여기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래서 아기가 예쁘면 보듬어주지만 미울 땐 때리거나 꼬집는다.

.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영예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여성작가다. 올 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을 보면서 나는 그가 어린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상상력의 소유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추억의 박물관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물들의 행렬, 예컨대 죽은 새의 시체, 연필, 봉제인형, 작은 사진틀, 그물, 비닐봉지, 털 뭉치 등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나는 놀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소꿉놀이와도 같은 것, 그것이 확대된 것이 사회가 아닌가. 어린이들이 모여 노는 소꿉놀이는 성인들의 놀이터인 사회의 축소판이다. 거기에도 역시 규칙이 있고, 벌이 있고,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다. 병원이, 가정이, 직장이, 공원이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거침없이 논다. 호이징가가 말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소꿉놀이터인 것이다.

추억은 메사제의 설치작품인 ‘해부’(1995∼1996)처럼 이리저리 엉켜있다. 기분 나쁜 추억과 좋은 추억이 뒤엉켜 기억의 실타래를 이룬다. 그것들은 기억의 저장소인 몸에 문신처럼 각인돼 있다가 적당한 계기를 만나면 예고도 없이 튀어 나온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사물에 대한 기억의 변형태가 아니던가. 작품이란 그러한 기억의 변형태가 물질을 통해 물화(物化)된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소통을 전제로 한 일종의 언어다. 이 세상에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언어가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고독을 못이겨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쳤다. 만일 그가 흙으로 조각품을 빚었다면, 그는 다름 아닌 언어를 빚은 것이다. 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그는 하나의 몸을 창조한 것. 따라서 우리는 흙으로 만든 몸이 곧 언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마리 로르 베르나닥의 적절한 언급처럼 아네트 메사제에게 있어서 말은 곧 신체(몸)와도 같다. ‘Hapy, Hapy, Hapy’(2006)는 검정색 그물과 철사를 이용하여 벽면에 ‘hapy’라는 글자를 쓴 설치작품이다. 제목이 왜 ‘hapy’일까. ‘행복한’이란 뜻의 영어 단어는 분명히 ‘happy’일 터인데, 왜 그는 ‘hapy라고 썼을까. 혹시 깜빡 잊고 ‘p’자 하나를 빼먹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집에서 기르는 애견의 이름은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몸이자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검정색 그물을 두툼하게 묶어 몸의 형상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물 뭉치가 왜 몸이란 말인가.

여기 하나의 적절한 예가 있다. 지난밤 휘몰아 친 폭풍우에 거대한 나무 한그루가 길가에 쓰러져 있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이 큰 톱을 들고 와 이제 막 나무를 자르려고 한다. 이때 톱을 든 사람이 거들어 주는 사람에게 외친다. “몸통을 꽉 잡아!”

인체에 비유하면 나무의 뿌리는 다리요, 둥치는 몸, 잎이 무성하게 달린 맨 윗부분의 가지들은 머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머리를 풀어 헤친 버드나무”라고 읊었던 것이다. 이는 사물이 곧 몸에 다름 아님을 인체에 빗대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 메사제의 작품들 대다수는 몸이 곧 언어임을 알 수 있다. 몸의 언어화, 그의 작품에서 몸은 그것이 사람의 몸이건 사물의 몸이건 하나의 언어로 치환된다. 예를 들어 ‘카지노:피노키오의 드로잉’(2004∼2005)이란 그림을 보자. 허공에 떠 있는 ‘PINOCCHIO’란 글자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그 밑에 누운 피노키오의 비쩍 마른 몸을 적시고 있다. 마치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부여하려는 듯이.

공장을 피노키노의 몸에 빗댄 또 다른 드로잉 작품은 사물을 몸에 비유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뚝 솟은 공장의 굴뚝은 피노키오의 긴 코에 비유되고 있으며 공장 건물에 다리를 덧붙여 마치 피노키오가 누워 있는 것처럼 표현돼 있다.

아네트 메사제가 보여주는 이 놀라운 상상력! 그는 영락없는 어린이가 아닌가. 어린이는 물 찬 제비처럼 상상의 나래를 편다. 경이(驚異)! 세상이 온통 놀라움 그 자체인 것이다. 갓난아기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를 본 일이 있는가. 메사제의 작품 세계는 어린이와도 같은 상상력이 꾸며낸 경이로운 세계다. 천정에서 드리워진 작은 선반들 위에는 이름 모를 새와 짐승 등 수백 마리의 갖가지 동물들이 얹혀 있다. 그가 벌이는 이 진귀한 몸의 퍼레이드는 ‘손금’(1988∼1990)이란 작품에서 언어로 치환돼 벽을 타고 흐른다. 이 문자언어의 도도한 행렬은 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까 몸에서 언어가 흐르는 것이다. 그러니 몸이 곧 언어가 아니겠는가.

아네트 메사제의 작품은 추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싫은 추억과 좋은 추억이 뒤섞여 큰 이야기의 강을 이룬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주인공 세헤라자데 왕비가 들려주는 천일야화처럼 메사제의 드로잉 작품들은 끝없이 이야기를 펼친다. 거기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역할의 뒤바꿈이 있고 마조히즘적인 쾌락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메사제의 상상력이 자아낸 언어의 직조물이다.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아득한 기억의 잔상에 상상력을 버무려 일궈낸 이야기의 강, 그것은 다름 아닌 몸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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