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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문-가상을 통한 부정적 현실의 전복

윤진섭

Ⅰ.
서기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광주’라고 하는 지역적 특수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작가가 자란 토양, 즉 작가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고, 가정을 꾸린 ‘바탕’에 대한 고려가 없이 그 작가에 대해 접근해 들어갈 때 그러한 비평은 대개 빗나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서기문처럼 비판의식이 뛰어난, 그리고 인문학적인 시야와 지성을 바탕에 깔고 작업을 하는 작가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작가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계에 대한 ‘말 걸기’를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나 나름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서기문은 좁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광주의 역사와 현실을, 넓게는 이 시대의 문화적 쟁점과 문제점들에 대해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작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는가. 그 정신의 요체가 다음의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광주정신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있다. 80년 5월에 대한 회고적 접근 정도로 광주정신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80년대의 척박함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는 우리 시대에는 광주정신의 미술적 수용 또한 당연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마땅하다.
광주정신은 부정(否定Anti)과 비판의 정신이며, 깨어있는 정신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미술에서는 미술의 비평적 기능과 만나져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즉 추억의 팝송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 산적해있는 당대 현실 문제에 대해 밀도높은 비평을 가하는 것, 문명의 기형성같은 것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을 현대미술로 녹여 내거나 인문학적 비평이 담긴 높은 수준의 미술을 보여주는 것, 그것들이 광주미술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정치적 격동기보다 자본과 대중문화가 극단을 치닫고 있는, 즉 후기자본주의로 불리워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미술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서기문, ‘광주정신’의 미술적 수용에 대하여

이 글을 요약하자면, 서기문은 광주정신을 가리켜 ‘부정과 비판의 정신’으로 정의하고,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작가의 의식이 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광주의 미술이 광주를 넘어서 지구촌 전역으로 그 자장의 범위를 넓혀야 하며, 당대의 세계적 이슈들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광주미술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본과 대중문화를 등에 업고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의 사회적 징후들에 대해 주목한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물신숭배>(162x130cm, 캔버스에 유채, 2005)를 비롯하여 <교환가치>(수채화, 30호, 2004),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캔버스에 유채, 100호, 2004) 등등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거니와, 아무튼 그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소재나 주제의 범위를 점차 넓혀나가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비판정신은 당대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미술의 행위를 일종의 ‘비평’으로 간주하는 독특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이 용어의 어원을 놓고 볼 때 매우 합당한 것이다.
비평을 의미하는 영어의 ‘criticism’과 위기를 뜻하는 ‘crisis’는 다같이 희랍어 ‘krinein’에서 유래한다.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기면 ‘분리하다(separate)’ 또는 ‘구분하다(discern)’가 된다. 말하자면 체로 모래를 걸러내듯이, 나쁜 작품들로부터 좋은 작품들을 분리해 내는 일이 곧 ‘krinein’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crisis)’다. 비평과 접두어를 같이 하는 이 위기가 바로 비평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이 ‘위기’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비로소 비평의식이 발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의 비평은 단순히 미술을 넘어서 폭넓은 의미의 문화내지는 문명비평, 혹은 사회비평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서기문이 작가이면서 동시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을 한 미술평론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폭넓은 문화적 지평은 이미 그 바탕에 도저한 비판의식을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앞으로 서기문의 작품을 살펴볼 때 전제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Ⅱ.
서기문은 묘사력이 뛰어난 작가다. 대상에 대한 그의 핍진(逼眞)한 묘사는 이미 2007년에 가진 <서기문 광주정신전>의 출품작들을 통해 잘 드러난 바 있거니와, 비단 이 작품들 이전에도 수채화나 유화로 그린 인물화들에서 그의 실력은 입증되었다. 서기문은 작가노트 곳곳에서 재현회화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작가적 신념을 토로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작가의 수공(手工)에서 뿜어 나오는 작품의 아우라(aura)에 대해 거의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도 지적했듯이, 기술복제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인간적인 내음인지도 모른다. 캔버스를 앞에 놓고 붓과 싸우는 가운데 숱하게 고뇌하고, 주저하고, 덧붙이는 가운데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형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발생한 겹들(layers)의 결과다. 거기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순간적으로 잡아낸 존재의 허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예술적 진리가 깃들어 있다. 반 고흐의 <농부의 구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우리를 잃어버린 ‘고향(die Heimat)’으로 안내하는데, 그것이 바로 땀과 노동으로 얼룩진 삶의 아름다움, 즉 인간적 내음이 아니겠는가.
서기문이 <광주정신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경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인생>(116.7x91cm, 1997), <아들을 기다리며>(캔버스에 유채, 50호, 2005), <고향>(종이에 수채, 20호, 2007), <장모님>(캔버스에 유채, 20호, 2004) 등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인간적 내음’을 핍진한 묘사로 형상화한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흙바닥에 앉아 수숫대를 다듬고 있는 노인을 그린 <인생>은 평생 농사만 지어온 한 인간의 삶의 애환이 잘 나타난 수작(秀作)이다. 서기문은 이처럼 탁월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2천 년대 초반이후에 들어서 일련의 사회비판적인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광주정신전을 앞에 하고서’란 서기문의 글을 읽다보면 한 사람의 작가로서 그가 동시대의 미술 환경에 대해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설치나 영상, 미디어아트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 재현에 입각한 사실주의 작가가 겪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은 비단 그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만 하다. 그러나 “치밀한 세부묘사의 과정 속에서 작가의 주체는 소멸되며 완벽한 대상에의 몰입과 동화가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개개 사물(대상)의 본질이 확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에게 그러한 현상들은 여전히 검토와 비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작가의 것이라기보다는 비평가로서의 시각을 견지하며 자신의 예술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미술계를 흐리는 여러 부정적 요인들에 대한 따가운 질책과 비판으로 점철된다. 그 중에서도 상업주의의 팽배와 미술에서의 서구중심주의 그리고 후기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비판은 예술에서의 진정성과 맞물려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그의 작품이 비판적 경향을 띠게 되는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Ⅲ. <돈의 죽음>, <결혼>, <물신숭배>, <교환가치>,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와 같은 일련의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통해 서기문은 자본의 횡포와 그 뒤에 숨어있는 교묘한 책략들을 고발한다. 미술의 힘은 시각을 통해 관객들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는 대표작인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에서 비슷한 크기의 상품들, 즉 루이 뷔통 핸드백(76만원)과 루이 13세 양주(2백 8십만 원), 그리고 한 됫박의 쌀(오천 원)을 제시한다. 그는 묻는다. “물건들은 상품화가 이루어지면서 각각 엄청난 차이를 보이며 가격들이 책정되는데, 도대체 어떤 근거 속에서 가격들이 결정되어지는 걸까?”라고. 자신이 말하듯, 일종의 자본론 강의격인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소위 명품에 함몰되고 있는 현대의 소비 행태와 그것에 매몰되는 노동에 대한 문제를 일종의 대위법적 비유를 빌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광주정신전> 출품작들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묘사를 통해 삶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 가난하고 고단한 기층 민중의 현실 위에 떠도는 물거품과도 같은 사회적 허상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광주정신전>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무등산지기, 이양현 선생, 박병기 선생, 김갑주 사장, 박종철 옹, 한글자원봉사선생님, 좋은 사람 조박사, 김병욱 교수, 이철우 목사, 주씨부부, 기타 많은 무명씨 등등-을 그린 그림들은 서기문이 <미술사의 인물들 소환> 시리즈와 <동행> 시리즈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통과제의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고향 광주에 대해 일종의 심리적 부채가 있는 그로서는 고향을 말하기 전에 다른 곳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병역기피자’라고 말할 정도로 이 문제에 관한 한 결벽증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사회비판적 시선은 광주에서 시작해 드디어 서구와 한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패러디의 대하적 방법론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Ⅳ.
서기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나의 눈길을 끈 작품은 작년에 KIAF전에 출품된 <뒤샹의 재판>이다. 이 작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미술의 비조(鼻祖)로 추앙을 받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을 피고로 삼아 현대미술을 희화화(戱畵化)한 고도의 지적 게임이다. 그로서는 서양의 현대미술 전체를 대상으로 한,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통쾌할까. 원래 패러디는 원전을 알고 있어야 하는 법. 그 맥락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 웃음의 진원지는 과연 어디일까.
우선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의 묘미와 핵심은 재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재판장이 앉아 있어야 할 곳에는 그러니까 이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이 서있는 셈이 된다(이는 곧 대중이 최종심의 재판관임을 암시한다. 미술에서 최종심의 재판관은 항상 대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림의 하단부 삼분의 일은 두꺼운 법전 대신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이 펼쳐져 있는데 책의 왼쪽에 ‘가상폐기(Aufhebung des Scheins)’라고 쓴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마르셀 뒤샹의 죄목은 미술에서 가상을 폐기한 것이 되는 셈이다. 뒤샹의 뒤에는 물증으로 1917년 작인 <변기>가 보인다. 방청석에는 모두 12명의 방청객들이 앉아 있다. 렘브란트, 푸생, 백남준, 세잔, 모네, 끌로델, 고야, 그린버그, 쿠르베, 달리, 피카소, 서기문 등이다. 이 그림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서기문이 자신의 장기인 극사실적 묘사를 일부러 피하고 간결하게 묘사하는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만일 극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다면 그 느낌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은 풍자가 아니라 사실로 인정하는 느낌을 주게 되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풍자성과 비판성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이러한 화풍은 이후 <워홀 체포>를 거쳐 <동행> 시리즈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는 서기문 회화의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재판장, 그러니까 관객 앞에 푸른색 수의를 입고 결박을 당한 채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뒤샹의 표정은 잔뜩 긴장돼 있다. 혹시 유죄 판결이라도 나지 않을까 어딘지 겁먹은 표정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뒤에 앉은 방청객들(혹은 배심원?)의 표정이다. 이 12명의 방청객 중에서 뒤샹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리 봐도 백남준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오직 백남준 한 사람만 약간 미소를 띤 채 궁금한 듯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바라보고 있는 반면, 작가인 서기문, 그러니까 뒤샹을 법정에 세운 당사자와 그 옆에 앉은 피카소는 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나머지 열 명의 방청객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묘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은 자화상이나 사진에서 따온 것이다. 서기문의 그림 실력이 발휘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그는 본래의 자화상이나 사진이 지닌 표정을 이 상황에 맞게 각자 비틀어 이 그림을 매우 흥미진진한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세잔의 표정을 보라. 마치 원수를 보듯 꼬나보고 있지 않은가. 피카소는 허탈한 모습이고 추상회화를 옹호한 그린버그는 어딘지 풀이 죽은 모습이다.
고대 희랍에서 시작되는 장강(長江)과도 같은 재현 미술(회화)의 물줄기를 변기 하나로 바꿔놓은 장본인인 뒤샹에 대한 이 희대의 재판이 과연 어떻게 종결될 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모의재판의 성격을 띤 이 그림 속의 재판은 예술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그것은 예술은 누구에게나 꿈꿀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사회가 썩지 않도록 하는 소금의 역할(아방가르드)을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락한 정신적 휴식을 제공하는 장식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처럼 광범위한 작용을 하는 예술에게 어느 한 역할만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예술가의 상상력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샹이 이 그림을 보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유족조차도 작가인 서기문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미술사를 전공한 박사학위 소지자인 서기문이 그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방청석에 앉아 짐짓 딴청을 부리고 있고, 아도르노의 권위에 힘을 부여한다(앞에 놓인 책 참조).
서기문은 <뒤샹의 재판>, <워홀의 체포>, <계몽의 변증법> 등 문제의 3부작을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구상했노라고 작가 노트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조선대학교에서 <현대미술과 문화산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히 재현회화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예술의 진정성을 물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 합치되면서 부패돼 가는 현실을 그 질곡으로부터 견인해 낼 수 있는 예술의 힘에 관해 성찰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위기를 ‘미적가상의 위기’로 파악한 아도르노의 지적은 예리하면서도 정당하다. 실제 현실은 홀로 자기 건강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비평적 견제 추인 가상적 존재가 필요하다. 예술작업은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도, 보이지도 않는 어떤 것을 가상화하는 것으로, 예술에서 제작과정이 중요한 건 이 보이지도 않는 가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은 보통 무에서 유의 창조로, 무형적인 구상이 제작과정을 거쳐 작품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타자로서 탄생된 실체적 작품이 중요한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작품으로, 특히 미술품처럼 물질로 실체화되는 순간 ‘가상 혹은 비존재자’ 로서 ‘현실 혹은 존재’를 견제해야 하는 예술 본연의 사명 및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 되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만들어진 순간, 존재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상(일루젼)’이라는 허위로 떨어져버리기도 한다. 화해는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예술에서는 만들어지는 것이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제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만듦의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나 상태’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지독하고 본질적인 패러독스야말로 예술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문화산업’이란 미명하에 가공할 자본의 힘으로 사회 곳곳에 침투해 들어가는 후기산업사회의 구조적 폐해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죽음의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미학이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미가 죽음과 유사한 것은 예술 속에서 소멸하는 생명체의 다양성에 대해 예술이 부여하는 순수한 형식의 이념에 기인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오직 탄식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무기력한 예술은 사회를 급격히 황폐화하는 현실을 앞에 두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예술의 비애다. 예술작품이 지닌 환기력은 겨우 도덕적 반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강제력이 없다. 강제력이 없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큰 맹점이자 슬픔이 아닌가.
그러면 서기문은 왜 마르셀 뒤샹을 법정에 세웠을까. 일종의 판결문 격인 그의 변을 들어보자.

“그러나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미술작품의 기본 요건인 표현과 구성을 적극적으로 생략, 폐기하고 있다. 예술 제작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역설로서 현실을 견제해내고자 하는 예술의 숭고한 고행 정신은 어디에도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구성적 가상으로서의 예술만이 현실의 대척점으로서 현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제다. 즉 그것은 동일화와 보편화 물화 따위를 끝도 없이 추구하는 현실과 사회의 본성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유일한 근거며 힘인 것이다. 변기를 ‘샘’으로 바꿔놓는 뒤샹의 기지에는 유희와 도발은 존재하나 가상을 창조하는 구성의 과정은 완벽하게 생략되어 있다. 또한 전통미술현실을 부정하는 의식과 행동은 넘치면서도 부정현실의 고통을 미메시스하는 그 표현과정도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다. 편리한 주장의 방식은 정치사회 등 현실법칙에 해당하는 것이지 고통이 수반되는 예술의 메커니즘과는 무관한 것이다. 하버마스( J. Habermas)도 지적했듯 자고로 “자율적으로 발달되어온 문화적 영역의 용기(容器)들이 파괴될 때, 그 용기에 담긴 내용물도 흩어지고 마는 법이다. 의미의 승화능력이 박탈되거나 형식구조의 해체가 일어나면 아무것도 남아나지 못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적 효과(emancipatory effect)는 따르지 않는 것이다.”

<워홀의 체포>에서 작가인 서기문은 한복을 입은 채 쇠고랑을 찬 앤디 워홀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다. 그 워홀의 옆에는 경찰복을 입은 하버마스가 서 있다. 검사는 아도르노이며, 변호인단으로는 ‘시뮬라크르’ 이론을 주창한 장 보드리야르와 ‘예술제도론’을 주장한 아서 단토가 서 있다. ‘캠프이론’으로 유명한 수잔 손탁의 모습도 뒷줄에 보인다. 작가에 따르면 워홀이 범한 죄목은 “미술을 상품화하고 대량 생산화” 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답게 이 사건을 통해 “현대미학의 두 줄기 큰 흐름, 즉 비판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두 입장을 키워드로 삼아 독서”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짧은 글을 통해 비판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논쟁-대표적인 것으로는 하버마스와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자인 료타르 간의 논쟁이 유명하다-을 들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고, 또 그럴만한 입장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미술의 치유적 기능을 믿는 서기문의 입장은 충분히 수긍한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방만하게 자본이 사회를 잠식해 가는 상황에서는 뭔가 제동을 거는 사회적 기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미술계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상업주의에 편승하는 작가정신의 실종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여겨지기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글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부활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 아방가르드 정신이야말로 상업주의와 자본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예술 진영의 마지막 보루이자 캠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적 입장에서 스쳐지나 가듯이 말하자면 마르셀 뒤샹을 재현미술 전통의 해체자로서 단순히 단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상업주의와도 거의 무관한 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오죽했으면 마르셀 뒤샹 자신이 네오다다이스트들, 가령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을 들어 다다의 과일이나 따먹는다는 식으로 비아냥댔겠는가.
서기문은 사실적 기법으로 그린 <계몽의 변증법>(162x130cm, 캔버스에 유채, 2009)에서 독일어 원서인 ‘계몽의 변증법’ 아래 흰 한복을 입고 서있는 자신의 모습과 민중서관 간 한독어사전(‘민중’이라고 한문으로 쓴 글자가 의미심장해 보인다.)의 대비를 통해 이 땅의 ‘지킴이’ 혹은 문화비판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각인하려고 한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로서도 매우 빼어난 수작이다. 가히 서기문의 대표작이 될 만하다.

Ⅴ.
<동행> 시리즈는 서기문이 자신의 회화관에 맞춰 워홀의 팝아트가 불러일으킨 상업주의의 창궐에 대한 비판과는 달리, 유머러스하게 미술사를 꼬집은 작품들이다. 역시 자화상과 잘 알려진 사진을 원전으로 삼아 제작한 이 <동행> 시리즈는 크게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다룬 작품들과 한국의 미술사 혹은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 대상으로 다룬 작품들로 분류된다. 앞의 것에는 <동행-고흐와 고갱>, <동행-달리와 프로이트-선생님, 제가 잘 가고 있나요?>, <동행-폴록과 그린버그>, <동행-백남준과 무어맨>, <동행-백남준과 그의 친구들> 등이 속하며, 뒤의 것에는 <동행-김홍도와 정조>, <동행-이기웅과 안중근> 등이 속한다. 서기문은 ‘미술사의 인물 소환 혹은 호출 작업’에 이어 이 동행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미술사의 중요한 대목에 집중하여 ‘회화작업으로 미술사 다시 쓰기를 목표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제작에 임하여 다음의 사항을 중시하고 있다. 1. 독서가 가능한 ’극적인 서사‘를 확보한다. 2. 순수조형요소는 특히, 색은 서사를 전달하는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그 자신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3. 가장 높은 수준의 비평과 유머를 구사한다.
그러한 조건 아래 서기문은 일련의 공통적인 장치를 마련한다. 등장인물을 모두 승용차에 태우는 것이다. 여기서 좌석배치가 중요하다. 그는 영향을 미친 사람은 뒷좌석 귀빈석에 앉히고 영향을 받은 사람은 운전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로는 달리, 잭슨 폴록, 이기웅, 김홍도 등이며 귀빈석에 앉은 사람은 각각 프로이트, 클레멘트 그린버그, 안중근, 정조 등이다. 또 이 연작에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은 동반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고갱과 고흐, 백남준과 무어맨 등이다. 이 연작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매우 순도가 높은 순색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인물의 묘사는 얼굴을 작은 면으로 파악하면서도 원작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배경에 등장하는 소품을 통해 인물들 간에 벌어진 상황을 암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는 한색과 난색의 대비를 통해 순수한 색채감이 더욱 증강되는 지점에 주목을 한다. 또한 화면은 넓게 처리하여 밋밋한 평면의 느낌이 드러나도록 세부를 생략하고 있다.
이 연작 가운데 가장 압권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잭슨 폴록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예의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린버그는 한손을 이마에 짚고 곤혹스러워 하는 폴록에게 권총을 겨누며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전후 미국 현대미술을 진두지휘하며 마피아와도 같은 권력을 행사했던 그린버그를 이처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작품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이 촌철살인의 풍자는 작가와 비평가와 관계 혹은 비평가를 비롯하여 큐레이터, 미술관장, 미술기자, 콜렉터 등 미술계(art world)의 구성원들이 자본과 결탁하여 어떻게 스타를 만드는가에 대한 소위 스타 시스템의 의심스런 공생관계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폴록의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또한 미국이라는 거대한 공룡의 후원 하에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을 통해 어떻게 스타작가로 등극하는가 하는 이면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현대사회는 이미지의 자기복제시대다. 발달된 테크놀러지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특히 컴퓨터가 주도하는 디지털 문명은 자기복제 시스템을 정당화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Simulacre)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양산하는 사회, 그래서 원본과 복제본의 구분이 모호해진 사회에 대해 보내는 경고장이다. 성형수술에서 생명체의 복제에 이르기까지 잘못 적용된 기술의 폐해는 이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숭고해야 할 인간의 창의력이 테크놀러지의 독소에 해당하는 부정적 측면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례가 바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한 전쟁이다. 현대의 전쟁 양상은 소총으로 적을 살상하던 보병전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벙커에서 컴퓨터를 작동하는 병사는 자신이 발사한 미사일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적진에 어떤 치명적 타격을 가하게 되는 지를 실감하지 못 한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죄의식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구체적인 대상을 보고 캔버스에 옮기는 서기문의 리얼리즘은 설득력이 있다. 현실을 캔버스에 옮겨 가상을 만드는 일은 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자신이 쏜 총알에 맞아 죽어가는 적을 바라보며 인간적 고뇌를 해야 했던 양차대전의 참전 용사들은 실존적인 인물들이었다. 현대 아바타의 후예들에겐 그런 고뇌가 적거나 없다. 오죽하면 사이버 상(가상)의 아기를 키우느라 현실의 아기를 굶겨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겠는가. 그러나 서기문도 지적했듯이 현실을 옮긴 캔버스 속의 이미지 또한 가상이라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그 패러독스는 앞에서 지적했거니와, 현실에 대한 미메시스로서의 가상은 현실이 가상(시뮬라크르)으로 완전히 대체되었을 때, 인간적인 내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래서 사회적 제동장치로서 작용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가 아카데믹한 기법의 수련을 거쳐 모던한 느낌을 주는 평면적인 화면 효과를 창출한 것은 서양미술을 자기 수업의 타산지석으로 삼은 결과이다.
이 지점에서 독특한 서사구조를 지닌, 그래서 대중성을 확보한 서기문의 미술사 시리즈와 동행 시리즈에 이어지게 될 후속 작품들이 기대되며, 하나의 전환점을 돈 서기문의 회화세계가 향후 어떻게 큰 밑그림을 그려나가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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