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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이란?

윤진섭

지성인이란?


이명박 정부의 후반부 국정을 꾸려나갈 개각을 앞두고 국회청문회가 한창이다.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장관 후보자들은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각자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삶에 혹시 무슨 큰 잘못은 없는가.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문회에서 걸리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길 기대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또 그걸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즈음에는 루머도 넘쳐나지만 진리 또한 도처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이 과연 지성인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 나라의 지도층 인사로서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검증하는 일이 인사 청문회의 기본 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성인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양심을 지닌 자를 가리킨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들며,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이 다치거나 희생될 때 그냥 묵인하지 않고 용감하게 뛰어들어 스스로 선택한 험난한 가시밭길을 당당히 걸어갈 줄 아는 사람”이 곧 지성인이다. 자신이 뱉은 말을 쉽게 뒤집거나 뻔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지식인일 수는 있어도 지성인은 못 된다. 그래서 지성인이 되기란 그 만큼 어려운 법이다.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생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소 꾸준한 독서를 통해 마음을 닦고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되 그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정치가가 하는 거짓말은 과연 어떨까? 그것을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플라톤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공익을 위해 하는 정치가의 거짓말은 용인돼도 좋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렇다면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클린턴 대통령의 뻔한 거짓말은 과연 용인될 수 있는가? 말장난(language game)의 대가인 클린턴은 지루하게 이어진 국회청문회를 노련하게 통과하여 대통령의 잔여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미국 국민은 개인의 사생활이 빚은 도덕적 결함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먼저 통찰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가들의 사익을 위한 거짓말도 용인되는가. 우리는 여기서 단호하게 “아니요(No!)”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장차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청문회에 나설 장관 후보자들 가운데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시인한 분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천길 벼랑 끝에 걸친 손을 놓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보자가 보인 행동은 매우 용기 있는 것이다. “위험에 직면하면 무조건 부인하고 보라”는 금언이 정계에 펴져 있는 상황에서 잘못을 시인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아주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범본이 될 지성인이 많지 않다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라만 봐도 후광이 느껴질 만큼 존경스러운 사회 지도층 인사가 적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나라의 앞길이 밝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경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몸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시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 분이 앞에 나타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고, 그 분과 동행하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그림자조차 밟지 않도록 조심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존경인 것이다. 지성인은 바로 그러한 존경을 후광처럼 지닌 자를 일컫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지도자의 언행이 서로 맞지 않아 말 따로 행동 따로 일 때 그 얼굴에서는 지성이 사라지고 아울러 존경심은 반감될 것이다.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동시에 행동하는 양심으로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는 미국의 시민이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서 예리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사유의 스펙트럼은 이미 미국을 넘어 세계에 걸쳐 있다. 그가 이 시대의 지성일 수 있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도저한 신념과 용기는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존경받는 학자가 드문가? 많은 학자들이 교단을 떠나 정계에 입문하지만 대개는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온다. 학자로서는 존경을 받던 분들이 현실정치에 적응을 못하고 결국에는 지성마저 흐린 국면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 배운 내용을 현실에서 풀어보고자 한 이상적인 열망 때문에 현실 정치의 문을 두드리지만 이론과 현실의 쓰디쓴 괴리감만 느낄 뿐이다. 높은 벼슬을 지낸 어떤 학자는 거듭되는 정계의 유혹을 잘 물리쳤으나 마침내 수락, 참혹한 현실을 맛보고 퇴색한 지성, 즉 과거의 존경마저도 되찾지 못한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이 모두 우리 사회가 낳은 일그러진 초상화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몇 년 전에 평소 존경하던 분이 높은 관직에 오른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그 분은 그 자리에 응모할 것을 권하는 나의 제언을 단호하게 물리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냐는 나의 질문에 그 자리는 사람을 치는 자리라고 했다. 한 마디로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의 그 말이 단순히 보안유지용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나는 보도를 접하는 순간 알아차렸다. 그때 잠시나마 고민하는 흔적만 보였더라도 인간적으로 이렇게 실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존경의 염(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포도주를 숙성시키듯 서서히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존경하는 마음이 찾아온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지 인위적으로 될 일은 아닌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여름도 다 지나가고 다시 낙엽 지는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무더운 여름을 즐기는 매미의 영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그치고 자리를 뜰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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