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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 삶의 통합적 시각에 대한 심상과 사유

하계훈

실내 공간에서 직립형 인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곳은 벽이다. 인간의 주거환경이 동굴이나 움막이었을 때에서부터 우리에게는 벽과 천정에 기록된 인간의 시각적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벽은 인간 존재의 순간을 영원히 각인하는 기록의 터인 셈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폼페이 유적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건축에서는 무거운 천정을 받쳐주기 위하여 벽이 두꺼워졌다. 천정의 무게를 받쳐주는 벽에 창을 내는 일은 자칫하면 천정이 무너져버릴 위험성이 있어서 웬만하면 벽에는 창을 낼 수 없었다. 창이 없는 공간은 외부와의 단절감을 주는 한편 인간의 시각적 상상력을 무한으로 자극시켰다. 석회를 바른 벽 너머의 풍경들은 화가의 상상 속에 재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상화되기도 하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벽 위에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와 역사가 기록되기도 하였다.

김유정이 다루는 프레스코화는 이러한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장으로서의 벽화라는 화면이다. 벽화의 오랜 전통을 차용한 화면이 김유정의 심상과 사유를 펼치는 장인 것이다. 비록 그녀의 화면이 벽으로부터 이탈하여 캔버스처럼 일정한 규격을 갖거나 도자가 또는 인체의 토루소 형상과 같은 입체적인 오브제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화면을 준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녀의 작품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래 동안 전해져 온 벽화의 형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정은 압출식 단열재인 아이소핑크나 의상 디자인용 마네킨의 토루소 위에 모르타르, 시멘트, 모래, 석회 등을 발라 화면의 바탕을 마련한다. 바탕이 완성되면 작가는 그 위에 벽을 긁어 낙서하듯이 조각칼로 음각 드로잉을 하기도 하고 먹이나 포도즙과 같은 안료를 가지고 프레스코식 그리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흡습성이 강한 표면에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이미지를 창조하거나 조각칼로 화면을 긁고 파내어 제한된 시간 안에 화면을 완성하는 노고는 벽화형식을 차용한 그녀가 안고 가야하는 예술적 사명의 무게인 것이다. 프레스코 벽에 조각칼을 이용한 이미지의 각인(刻印)은 우리 삶의 한 순간을 벽에 새겨 넣음으로써 그것은 우리 삶의 맥락 속에 영원히 기록되게 된다.

이렇게 제작되는 김유정의 프레스코 화면 위에는 몇 가지 모티브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식물의 잎과 줄기, 의자, 새 등을 자신의 화면에 자주 도입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여성의 사회적 성취를 향한 욕망과 현실의 부조리한 상황, 그리고 새를 통해 자신과 동일화된 존재의 암시를 드러낸다. 토루소의 가슴과 어깨 부분에 드리운 나뭇잎들의 그림자 또는 새가 입에 물거나 그 새가 머무는 언덕에 핀 나뭇잎들은 미래의 성취를 향한 소망 내지 건강한 욕망을 상징한다. 욕망을 상징하는 식물은 생명의 잉태와 성장을 상징하는 여성의 신체부위로부터 마치 식물이 화분에서 성장하는 모습으로도 표현되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인 발과 팔을 통해서도 이러한 욕망과 성취를 향한 의지가 표현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새들의 모습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간략한 그림자로 표현되는 데 비하여 새들은 비교적 자세한 선묘로 처리된 경우가 종종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채색이 되기도 한다. 그 새는 작가 자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품 속의 새는 희망을 머금고 도약을 준비하는 모습도 있고 검은색 또는 엉클어진 가지들로 상징되는 세속의 복잡한 일에 살며시 부리를 담그는 소극적 관심을 나타내거나 때로는 이것을 외면하려는 날갯짓을 보이기도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입이 뾰족한 상어의 주둥이 끝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 뱃머리에 매달린 새는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롭게 출발하는 위태로움과 불안을 읽게 해준다.

채색이 극도로 절제된 김유정의 프레스코화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색채는 강한 상징성을 지닌다. 하강하는 새의 강하 한계를 긋는 붉은색 선이나 희망을 상징하는 청색 도형 등을 통해 작가는 흑백 톤의 프레스코화에 악센트를 가하며 조심스럽게 프레스코 벽화에 표현된 본격적인 회화적 속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김유정의 프레스코 작품은 작가의 자의식과 여성성, 인간 존재상황이 빚어내는 욕망과 부조리의 상황 등 삶의 다양한 화두를 담고 있다. 혹자는 그녀의 작품을 에코페미니즘으로까지 확장하여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에코 페미니즘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생태계의 현상을 인간의 환경에 도입하여 남성은 문명이요 여성은 자연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대립과 지배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으며 작가는 인간문명을 극복과 대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남성과 여성, 자연과 인간문명은 처음부터 하나였다고 보는 문명과 인간의 어울림과 균형을 통해 모든 생명체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으며 각자의 건전한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을 삶의 여정으로 보고 있다. 김유정의 이러한 사상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으로도 연결될 수 있으며 결국 김유정의 프레스코화에서 등장하는 이미지와 주제들은 자연과 문명, 현실과 이상,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뛰어넘는 통합적인 거대한 시각에 기반을 두고 표현되는 작가의 심상과 상상력의 미학적이며 철한적인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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