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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대지 위에 전개되는 대위법

하계훈

이우근은 한국과 독일에서 조형적 훈련을 받고 감성과 논리를 개발해온 작가다. 1990년대 초부터 2000년 밀레니엄을 거쳐 오는 동안의 10년간을 독일에서 생활한 그로서는 한국과 독일 양쪽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상당히 익숙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한 만큼이나 양쪽에 대하여 낯선 이방인의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가 선택한 주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며 그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문제, 인간 소통의 장으로서의 사회의 현상학적 전개의 문제다. 작가 이우근은 이러한 인간 소통의 문제를 지리적 위상의 차이와 시간적 선후의 차이를 중첩시켜 자신의 화면 위에 대위법적으로 다중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2004년 전시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미완의 대지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시간성과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모성에 대한 기억의 중첩 등을 표현하고 있음을 스스로 밝힌 바가 있다. 그 후에도 작가는 줄곧 미완의 대지라는 주제를 통해 예술의 완성에 대한 갈망과 그러한 예술이 내포하고 있는 운명적 미완성의 시지프스적 반복을 경험하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이우근은 유화의 펜티멘티(pentimenti)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펜티멘티 기법은 원래 유화에서 작가가 덧칠하여 지운 밑그림이나 그 전에 그린 그림들이 화면 위로 노출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우근은 화면에서 앞서 그린 이미지들을 지우지 않은 채 그 위로 다시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우는 형식으로 작업한다. 이 때 이미지들 사이의 구도나 비례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미지의 중첩이 일어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앞서 채색된 물감 층이 옅어지고 중첩되게 되면서 그 이전에 바른 물감의 희미한 흔적들이 드러나게 되며, 화면 속의 형태와 색상은 마치 칼레이도스코프나 표면이 고르지 않은 유리를 통해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다중적 형상의 나타난다.

이러한 펜티멘티 현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17세기 서양에서 작가가 주로 인물들이나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윤곽선을 표현할 때 중첩의 효과를 위하여 자주 사용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마치 사진기의 이중촬영에 의한 이미지 중첩이나 장시간 노출에 의한 대상의 윤곽선 해체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우근이 미완의 대지에 존재하는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하여 선택한 시각적인 상징으로서의 이미지들은 화면에 중첩하면서 때로는 한 지점을 향해 수렴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화면과 평행하게 배열되기도 한다. 그의 이미지들은 그가 이제까지 체류해 온 두 나라에서 보거나 만났던 인물들과 서로 다른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겹쳐짐으로써 대위법적으로 혼재된 기억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형상의 드로잉이면서도 마무리 표현을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하나하나의 인물과 오브제들이 상징과 기호로서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우근의 작품을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는 1970년대 독일 신표현주의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가 10년 넘게 독일 유학 생활을 했고 신표현주의 계열의 대가인 그의 스승을 겨냥하여 유학을 떠났다는 정황으로 볼 때 이러한 분위기가 드러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독일 신표현주의 양식을 맹목적적으로 추종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신표현주의의 주제가 주로 독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사회적 풍자에 있는 것과는 달리 이우근의 작품에서는 냉소적인 풍자나 역사의식 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성에 착안하면서 개인의 기억과 사회를 바라보는 인간의 심리적 불안과 기억의 중첩이 두드러진다는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우근의 화면에서 이미지들은 세련되고 아카데믹한 회화의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어눌하고 허술하게 보일 듯한 색들과 거칠고 투박한 선묘(線描)로 되어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작가의 말대로 미완을 강조하는 의도적 표현일 수도 있고 완성도가 높은 표현보다 오히려 화면 안에서의 장소성과 시간성에 대한 대담한 암시로서의 강한 효과를 줄 수도 있다.
미완의 대지로 상징되는 이우근의 예술세계는 단선적 조형 진화의 과정을 따라가기 보다는 우리가 생활하는 이 사회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정치사회적 복잡 다양한 현상 속에서 서로 다른 장소와 서로 다른 시간을 한 화면 위에 대위법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이번에 출품된 이우근의 작품은 한 화면 안에서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 상징화되어 결합하는 독특한 현상이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드로잉에 의해 모종의 일치감과 통일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색채의 부분적인 적용과 결합하여 다양한 변화와 불협화음 등을 읽을 수 있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선과 형태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의 구조는 관람자들에게 때로는 긴장과 대조의 순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역사적 통찰과 철학적 사색의 회고적 무드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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