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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 소통을 부르는 기억으로서의 질병의 기록

하계훈

이수영은 자신이 지난해에 경험한 피부병인 습진을 기억한다. 손과 발에 보기 흉하게 물집이 잡히거나 상처부위를 벌겋게 만들면서 갈라지고 벗겨져서 속살이 드러나게 하는 피부병인 습진은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병은 아닐지 몰라도 치료를 위해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하여야 하며 인내심이 필요하고 재발률도 높은 병으로 알려져 있다. 병의 원인도 일반적인 질병의 경우처럼 바이러스나 균류에 의해 발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럼 이 병의 원인은 체질적인 것이겠거니 짐작해본다. 게다가 이 병은 한 번 발병하면 그것을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그 자리에 재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피부과 전문의의 의학적 전문 소견까지 첨부되었으니 이 병을 앓아 본 작가는 참 난감하리라 짐작이 된다. 실제로 지난봄에 병을 앓고 나서 그해 여름 유럽 여행을 하던 작가는 이 병의 재발을 염려하여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도 했다는 일기 같은 기록이 <습진기록도>에 적혀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개인적인 질병의 경력을 숨기지 않고 관람자들에게 털어놓는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이 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감탄하기까지 한다. 비록 고통스럽긴 하였겠지만 습진의 기억은 오래 동안 잊혔던 작가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오게 만들어주었으니 고맙다고 할 수도 있겠다. 결국 작가에게 습진이라는 질병은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라 과거의 흔적과 기억의 방을 밝히는 스위치 같은 것인 셈이다.

작가가 습진을 바라보는 태도는 탐구적이며 기록 보존적이다. 작가는 자신이 앓는 병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하여 한의학적 연구를 하였다. 작가는 한의사들이 습진을 퇴치하기 위하여 우리 몸의 수많은 경혈 가운데 발과 손에 침을 놓는 위치를 연구하여 경혈도를 그렸다. 습진 치료에 필요한 혈에는 침처럼 긴 바늘이 귀에 붉은 실을 길게 매단 채 꽂혀있고 치료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전기 자극까지 주입할 수 있게 장치된 듯 화면에 소켓이 첨부된 경혈도는 <새로운 지도>라는 제목이 붙은 채 벽에 걸려있다. 그런데 여기에 뜬금없이 <사랑한 후에>라는 제목의 유행가 악보가 부착됨으로 해서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경혈도는 보통의 습진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경혈을 연구하는 인체도에서 작가 이수영의 손과 발,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의 마음속을 어루만져 주는 위안과 치유의 지도로 새롭게 읽혀진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역사 속에는 슬플 일, 기쁜 일, 아쉬운 순간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 들이 첩첩이 쌓여있어서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펴내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을 자신한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쉽게 모든 것을 잊고 지나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기다리지 않았던 손님처럼 느닷없이 찾아오는 기억은 다시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기억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수영 역시 습진을 통해 어린 시절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생활을 기억해내고 다시 그 속에서 애국조회라는 우스꽝스런 전체주의적 세리모니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기억을 마치 기적처럼 떠올리게 해준 작가의 질병인 습진은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할 수 있다. 물론 관람자들 가운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과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어느 전시장의 작품들보다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을 만나는 셈이다. 자신의 모습이나 신체 일부를 작품에 도입하는 작가들이 몇몇 있었던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환부를 매개로 관람객과 소통하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이수영의 작업태도의 직설적인 솔직성이 읽혀진다.

작가는 자신이 투병하던 과정의 기록들을 꼼꼼히 수집하여 전시장 한 부분에 제시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균을 배양하는데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리용기 속에는 작가의 손과 발에서 떼어낸 각질 같은 부스러기들이 어느 곳에는 스테로이드 연고나 진물이 묻은 휴지뭉치와 함께, 또 어느 곳에는 작가가 찾아갔던 병원 의사의 명함과 함께 담겨있다. 날짜별로 구분해놓은 이 각질들은 작가 개인의 투병의 기록이며 습진이라는 질병과 함께 한 작가의 생활의 기록이다. 각질을 담은 용기를 놓은 테이블에 맞닿은 벽에는 이렇게 투병하는 동안 작가가 무엇을 하며 지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각종 영수증들이 부착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작가는 약국에서 약을 사고, 커피와 도넛을 사먹었으며 책방에서 책을 사기도 하였다. 그리고 습진 때문에 이수영은 이 기간 동안 라틴 댄스 수업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환부에 반창고를 붙이고 시간 맞춰 약을 먹고 바르며 가끔은 외출하여 영화 관람도 하였다.
이러한 각질 파편들과 영수증들은 지난 해 봄에 이수영이 살아온 삶의 기록들이며 기억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기억과 공감을 통한 소통을 위해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점점 수분을 잃어 건조하게 수축되는 각질과 시간이 지남에 따리 점점 희미해지는 감열지에 찍힌 영수증의 거래내역들처럼 우리의 일상의 기억들은 곧 잊힐 것이고 환자의 환부에는 새살이 돋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담긴 전시장의 전반부를 지나 <습기복도>라는 통로를 지나면 마지막 설치 작품이 나타난다. 링거액 병을 걸고 있는 지지봉과 거기로부터 링거액이 흐르는 줄이 닿은 양은 밥상이 있고, 그 위를 맴도는 물고기 모양의 장난감이 머리위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물고기는 건전지로 움직이며 밥상 위를 헤엄치듯 돌아다니지만 밥상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물이 마른 어항에서 그르륵 그르륵 하는 기계음을 내며 몸부림치는 듯하다.

작가가 관람객과 소통하는 데 필요한 매개수단은 조형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는 보편적이고 직설적일수록 소통의 가능성이나 실효성이 높을 수 있다. 이수영이 이번에 발표한 <습진의 기억>이라는 주제 아래 설치된 작품들은 이런 의미에서 때로는 직설적이고 또 때로는 소통의 길을 조금 돌아가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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