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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비엔날레 그 현주소

하계훈

1990년대 후반 언젠가 한때는 비엔날레라는 용어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이 말의 뜻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광주비엔날레의 경우 첫 행사가 개최되었던 1995년에는 MBC나 KBS 등의 공중파 방송국에서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듯이 현장에 중계 시설을 꾸며놓고 행사의 진행상황과 행사장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매일 생방송을 진행하였던 일이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다.

원래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국제미술 행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비엔날레는 세계 각국에서 예술가, 평론가,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등이 한군데 모여 작품을 감상하고 의견을 교환하여 담론을 형성하는 기회를 갖는 일종의 미술축제의 장이다.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부산비엔날레, 이천도자기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서울미디어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등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비엔날레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한때는 전 세계적으로 120개 정도의 비엔날레 행사가 열린 적이 있다고 하며 급기야 미국의 유명 일간지인 뉴욕타임즈에서는 이러한 전세계적 비엔날레 급증현상을 가리켜 Biennalistic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비엔날레가 갑작스럽게 수적으로 확장되고 지역적으로 확산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각 비엔날레들이 표방하는 개최의 목적은 거의 동일하다. 미술의 국제적 소통과 교류, 미술을 통한 세계시민들의 상호교류와 이해증진 등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비엔날레들은 2년 주기로 각각의 국가관을 개관하거나 전체 전시를 통합하여 일정한 주제를 설정하고 세계 각국에서 작가들을 소집하여 왔다.

그런데 비엔날레가 수적으로 급증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이라는 시기는 미술 이외의 영역에서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상황이 펼쳐진 시기다. 예를 들어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가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994년까지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은 거의 전부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정부는 이러한 정책에 저항하던 흑인 정치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장기간 투옥시켜왔지만 결국 같은 해에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의장인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아파르트헤이드(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1995년에 출발한 요하네스 비엔날레는 이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상황에서 탄생하였으며 흑인사회의 정체성을 다룸으로써 흑인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아프리카 지역 나라들을 중심으로 참가하는 성격의 행사로 기획되었다.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경우에는 1990년대부터 점증하는 중국의 국제무대 진출로 인해 세계무대에서 점차 소외되는 대만의 입장에서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외교적 입지를 유리하게 끌고 나아갈 수 있는 방편으로서 1980년대부터 국내 행사로 치러지던 미술행사를 1990년대에 확대 통합시키면서 비엔날레 형식으로 바꾸었으며 1998년부터 외국 작가와 기획자들의 참여를 대폭적으로 늘려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된 행사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 무렵 3당 합당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정권이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1980년 봄에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한 모종의 보상과 위로를 해야만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는 시점이었으므로 비엔날레는 이러한 상황에 잘 어울리는 국제적 이벤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 무렵은 집권당의 입장에서는 야당의 지지기반인 호남지역이 수십 년간 겪어온 정치, 경제적 차별을 어떠한 형태로든 위무하는 조치가 필요한 시기였다. 왜 하필이면 광주냐는 질문에 ‘예향’이라는 궁색한 답변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베니스비엔날레를 통해서 보는 것처럼 이미 비엔날레는 미술행사를 넘어 관광과 연계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행사라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광주비엔날레는 이 점을 간과한 성급한 출발이었다고 생각되며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최측에서 밀린 숙제로 안고 있는 문제다.

비엔날레가 이 무렵에 주목을 끌게 된 것은 상대적으로 미술의 구심점이 해체된 세기말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거쳐 독일의 신표현주의나 사진의 부상, 디지털 영상의 예술 영역으로의 편입 등이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이전처럼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는 뚜렷한 흐름을 짚어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엔날레는 적절한 대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비엔날레는 때마침 찾아온 세계적인 정치적 안정과 경제 회복의 분위기에 편승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해외 관광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진 관람객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베니스비엔날레 참관이 유럽여행의 일부인 관광 상품으로 기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90년대에는 미술 외적인 전환점에서 비엔날레가 탄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현대미술의 중심을 유지하던 미국이나 유럽의 중심적 역할이 해체된 세기말의 예술상황과 때마침 일어난 세계적인 경제의 호전 등의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우후죽순처럼 비엔날레라는 형식의 미술적 소통의 장이 펼쳐졌던 것이다.
원래 비엔날레는 유럽의 만국박람회 형식에서 빌려 온 국제적 행사로서 국가 간의 경쟁이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잘 일려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보는 것처럼 각 나라의 전시관이 별도로 세워지고 참가국마다 자신들이 자랑할 만한 작가들을 국제적 무대에 올려 시상까지 하는 형식의 비엔날레가 초기의 전형적인 비엔날레 형식이었고 이것은 베니스 비엔날레가 개최되기 반세기쯤 전에 시작한 만국박람회의 전시형태와 거의 흡사한 것이었다.

세계 미술의 중심이 해체 또는 확산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출발한 여러 나라의 비엔날레들은 작게는 해당 도시의 문화를 통한 재생과 경제 활력충전이라는 목표와 좀 더 크게는 국제화되는 세계무대에서의 문화뿐 아니라 정치외교적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개입하거나 간접적으로 후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전시감독제, 커미셔너 제도 등의 방식을 번갈아 채택하면서 나름대로 생존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다양한 비엔날레들은 이제 10년 이상의 운영을 거쳐 나름대로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으며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한해에 광주와 부산, 서울과 대구 등에서 비엔날레가 개최되고 있다.

혹자는 최근의 미술계의 흐름이 이미 비엔날레를 지나 미술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어가고 있으며 출발기에 비교적 선명하게 내걸었던 비엔날레의 취지들이 점차 퇴색되고 행사진행의 관료화로 인해 조기노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게다가 지역의 평가보다는 서양 중심의 홍보와 평가에 비엔날레의 성과를 의존하다보니 몇몇의 국제적인 기획자들과 큐레이터들의 배만 불려주는 실속 없는 잔치가 되풀이된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지역의 전문가 육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미 10년 넘게 행사를 진행해 온 광주비엔날레가 아직까지 외부에서 유입된 인력에 의해 행사가 치러지는 것은 주최측이 심각하게 검토해봐야 할 문제다. 이와 함께 아무리 국제적인 행사라지만 지역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한다면 그 행사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지역에 기여하는 비엔날레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비엔날레의 관료화된 운영이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것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비엔날레를 통한 국제적인 교류의 노력은 그 효율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결국에 가서는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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