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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최해숙 / 생의 근원과 천상의 암호(1편)

김성호

화가 최해숙의 최근작 생의 근원과 천상의 암호

 

김성호(미술평론가)

 


인간의 생멸과 인간 존재(1958-2015)

화가 최해숙의 1958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이르는 작업들은 변화를 거듭해 오면서도 일관되게도 한 가지 근원적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다.이 질문은 마치 고갱(Paul Gauguin)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D'où venons-nous ? Qui sommes-nous ? Où allons-nous ?)〉(1897)라는 한 작품의 제목에서 드러난 질문들과 닮아 있다. 조형의 형식은 서로 다르지만, 고갱의 작품이 그러했듯이, 최해숙의 작품 안에는 인간의 생(生), 존재, 멸(滅)의 근원이 무엇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존재란 무엇인지를 되묻는 인간 존재에 관한 끊임없는 문제의식과 철학적 성찰이 펼쳐진다.

이러한 ‘인간 존재론’에 대한 질문은 195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자연’에 관한 오랫동안의 회화적 성찰로부터 발아해서 동양 및 한국 전통, 생명, 우주, 종교와 같은 내용들로 전개되어 왔다. 화가 최해숙은 직접 자신의 ‘작업 여정’을 표로 정리해 두었는데 그것의 연대와 주제 의식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1958-1995, 1996), 전통 문화 이미지/무속(1997), 우주 자연 에너지/생명과 기(1998-1999), 정신세계/윤회와 영혼(2000), 십이지/띠 문화(2001), 천부경/열림 소리(2003-2004), 어느 영혼의 노래/영혼의 상징, 순환(2005-2006), 원의 단상/원상(2007), 병상 생활/병상 일기(2008-2009), 신앙생활/신앙과 영성(2010-2013), 생명/생명 창조의 신비(2013), 단군신화/아사달(2014), 우주 암호/대화(2015).

그렇다고 한 화가의 작품 세계가 연도별로 뚜렷하게 범주화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화가가 직접 작성한 ‘작업 여정표’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일련의 동일한 세부 주제들은 이어지거나 뒤이어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96년 학교 퇴임을 기점으로 1958-1995년과 1996년이 미세하게 구분된 상황에서도 그 주제 의식은 동일하게 자연이었다. 1997년 집중되어 나타났던 ‘전통 문화 이미지’는 2001년에 십이지(十二支)로 그리고 2003-2004년에 천부경이라는 특수한 주제 의식으로 보다 더 구체화되었다. 아울러 정신세계를 탐구하던2000년에 관심을 기울였던 윤회는 2001년에 십이지로 이어지고, 2001년의 십이지는 2007년 원의 단상 시리즈에서 세부 주제로 다시 출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해숙의 작업들에 나타난 일련의 변화의 기점들은 몇몇 주요한 시점들이 있다. 전업 작가의 계기를 마련한 학교 퇴임 시기(1996), 생의 존재의 문제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만든 병상에서의 생활시기(2008-2009), 카톨릭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세계관의 변화를 일으킨 신앙 전환의 시기(2010-2013) 등이 그것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1958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가늠하고 2000년대의 작품을 중심으로 분석, 연구한 작가론 한 편1)을 이미 기술한 바 있다. 제목에서 가늠하듯이, 여기서 필자는 생멸, 순환, 원이라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최해숙 작품에 나타난

‘인간 생멸과 인간 존재’라는 거시적 주제를 동양 전통의 미학 속에서 풀어보려고 시도했다.화가 최해숙에게서 이러한 동양 전통에 대한 탐구는 2003-20004년에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도되었다. 그녀는 2014년 최근 작품에 이르러 이 천부경을 단군신화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거나 2015년에는 천부경과 카톨릭 신앙을 함께 만나게 하는 ‘우주 암호’시리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해숙, 산수유 어느 날의 잔상1,2012



생의 근원과 원형(原型)으로서의 원(圓)

화가 최해숙의 최근작은 2010년의 ‘생명’ 시리즈로부터 2015년 ‘우주 암호(暗號)’ 시리즈에 이른다. 1958년 이래 자연에 관한 주제 의식으로부터 확장하는 일련의 이 시리즈들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 세계는 다음과 같은 화가의 최근 작업 노트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내 삶이 작품이고 싶다. / 그래서 내 삶의 언어로 작업한다. / 내 영혼의 오랜 방황은 무지함에서였고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하기까지 /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원상(圓相)은 ‘시작도 끝도 없어’ / 창조주 신(神)의 상징이다. / 나의 동그라미는 생명의 본질이고 / 근원적 형태인 ‘하나의 세계’이며 / ‘하나로 통합하는 화(和)의 마음’이다. / 이는 나의 갈망이고 모두의 바람이리라.”2)


우리는 여기서 인간 존재와 관련되는 다양한 개념들인 삶, 언어, 영혼, 생명, 시간, 신(神), 세계와 같은 키워드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녀의 작업 노트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이해하고 감흥을 받는데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에 관한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총체적 경험의 세계가 이르게 하는 도달점인 동시에 오랜 사유의 과정이 도달시킨 귀결점이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화가 최해숙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거시적 주제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화가 최해숙이 생의 근원을 탐구하는 회화적 방법론은 동그라미 혹은 원으로부터 출발하고 마무리되고 있다. 그녀는 위의 작업 노트에서 “나의 동그라미는 생명의 본질이고,근원적 형태인 ‘하나의 세계”라고 진술한다. 그런 면에서 최해숙이 그리는 동그라미(圓形)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존재의 ‘본바탕’ 또는 ‘보편적 상징’을 의미하는 원형(原型, archétype)이자 그녀의 회화적 언어의 ‘본디 꼴’을 이루는 원형(原形)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회화에서 원형(原型)이란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미지 유형을 지칭하듯이, 최해숙의 작품 세계에서 그 원형은 의심 없이 ‘동그라미’라 할 것이다. 따라서 동그라미라는 원형(圓形)은 최해숙의 작품에서 원형상(原型像, image archétypal)으로 규정된다.  

실제로 최해숙에게서 초기 작품들이나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 2000년대에 접어든 대개의 작품들은 동그라미라는 원형상이 화면 전면에 자리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2004년부터 시작된 ‘원(圓)의 단상(斷想)’ 시리즈에서 구체화된 것이지만, 이미 2003년부터 시작된 ‘열림 소리’ 시리즈나 2005년부터 시작된 ‘영혼의 상징’ 시리즈에서도 동그라미 혹은 원의 이미지는 발견된다. 특히 “창작이라는 예술 활동이 인생의 의미를 묻고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라는 화가의 간접적 고백을 읽어볼 수 있는 ‘열림 소리’라는 주제어는 ‘우주의 비밀’을 여는 열쇠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화가의 매우 추상적인 의지가 발현된 작명(作名)으로 이 땅에 한 삶의 주체로 태어나 성장했고 이제 쌓인 연륜을 인생의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는 한 원로 화가의 인생 노정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최해숙의 당시 작업은 단순한 원(圓)의 조형적 미학을 탐구한 것이라기보다 원(圓)이 함유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을 탐구한 것이라 하겠다. 원의 철학적 개념은 마치 선종(禪宗)에서의 ‘원상(圓相)’이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을 상징하는 원(圓) 모양의 그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세계 질서에 대한 순연한 근원적 사유를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것은 순환과 윤회의 우주 원리와 같은 동양적 세계관과 연동된다. 생각해 보자. ‘십이지(十二支)’라는 동양적 세계관과 더불어 ‘천부경(天符經)’이라는 단군신화와 연결되는 한국적 세계관은 결국 인간이 대면하는 자연, 타자, 사물, 우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다시 인간을 인식하는 인간 존재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이러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듯이, 우리는 그녀의 작품에서 동그라미 또는 원(圓)의 형상이 야기하는 다양한 인간 존재론의 내러티브와 더불어 근원적 원형(原型)에 관한 담론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특수자를 가리고 보편자를, 개인적 상황보다 집단적 현실을 드러낸다. “원형적 패턴은 외계의 구체적 사물이나 개인의 심리적 성격과 혼동하여 고찰되어서는 안 되고, 개인을 넘어서서 인간 생활에 영향력을 갖는 심리적 현실로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유의미한 지점이다. 따라서 원형이란 특수자의 입장을 넘어서 추상화되거나 보편화된 관념을 유형화시키면서 보편적 상징(universal symbol)으로 자리 잡는다. 즉 특수자의 생을 넘어 근원적 생으로 논의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최해숙, 원의 단상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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