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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오태원 / 물의 결, 물의 빛 그리고 영혼의 물방울

김성호

물의 결, 물의 빛 그리고 영혼의 물방울

김성호(미술평론가)





I. 물방울, 물방울들
오태원은 물방울을 만들고 물방울의 이야기를 펼친다. 물방울이란 원래 자연에 있는 것이니, 물방울을 형상화하고 물방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하겠다. 
물방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공기로부터 마술처럼 생겨난다. 보라! 이른 아침 풀잎 위에 이슬이라는 이름으로 영롱하게 나타난 물방울들을, 또는 차가운 물병의 표면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물방울들을, 그리고 뜨거운 물이 만들어낸 수증기가 달라붙은 거울로부터 이내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말이다. 분명 그것은 공기가 차가운 물질을 만나 생긴 변화체이다. 어디 그뿐인가? 물방울은 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도 한다. 하늘이 퍼붓는 비로부터 빗방울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바다가 출렁이는 파도로부터 떨구어 내는 포말(泡沫)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뺨을 타고 흐르는 물로부터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공기나 물처럼 기체나 액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생성된 단순한 물리적 변화체이지만, 심리적 감성을 담아내기에 유효한 물질이기도 하다. 그것은 덜 잠긴 수도꼭지로부터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돗물의 분신들처럼 그다지 원치 않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것은 내 마음이 투영되고 내 감성이 내려앉는 풀잎 위 이슬과 같은 정령(精靈)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에서 싱그러운 아침의 무엇을 이야기하고, 방금 물로 씻어낸 과일 위에 미처 떠나지 못하고 남겨져 있는 물방울로부터 작지만 소중한 무엇을 발견하기도 한다. 때로는 눈가를 타고 흐르는 빗물로부터 슬픈 눈물방울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물방울! 그것의 실체는 도처에 있다. 비를 만든 구름 속에, 찬란한 아침의 대기 속에 그리고 나의 감은 눈 아래 있다. 그렇다. 그것은 물과 공기로부터, 액체와 기체 사이에서 그리고 액체와 액체 사이에서 생성, 소멸한다. 때로는 뭉치면서, 때로는 흩어지면서 때로는 차가운 온도의 표면을 만나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 심지어 그것은 ‘땡땡이’라는 별명을 지닌 물방울무늬를 통해서 허구적 이미지의 삶과 죽음 사이를 유령처럼 순환하기도 한다.   
오태원은 이러한 물방울을 만든다. 아니 이러한 물방울의 형상을 만든다. 조각의 물질적 실체와 더불어 허구적 환영으로 겹쳐진 거대한 크기의 물방울을 말이다. 윗부분은 삐쳐 있고 아래는 둥글둥글한 모양의 그것은 낙하를 시작하자마자 멈춘 상태의 형상이다. 영어의 물방울 표기인 드롭(drop)이 ‘떨어지다’는 의미를 지닌 것처럼, 오태원의 물방울들은 중력을 향해서 떨어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순간을 정지시켜 포착한 것들이다. 
물의 형태란 늘 규정짓기 어렵다. 어떠한 틀이나 그릇 속에서 담기지 않으면 그 형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을 담는 그 어떤 틀이나 그릇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할 때, 우리는 폭포와 같은 물줄기의 형상이나 그 포말로부터 분산하는 물방울들의 형상 정도를 생각해 볼 따름이다. 원래 ‘형상 없는 존재’이며 ‘중력에 순응하며 뭉쳐 있는 존재’인 물은 어떤 틀을 만나 그 ‘틀의 형상을 따라가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 물은 차라리 형상이기보다 물질이자 유동적인 운동체이다. 
그렇다면 물방울이란? 물방울 또한 물질이자 운동체이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종종 복수이다. 아니 그것은 언제나 복수로 존재한다. 물방울이 아니라 물방울들인 것이다. 즉 그것이 아니라 그것들이며, 당신이 아니라 당신들이며, 내가 아니라 우리인 것이다. 여기에 오태원의 물방울들이 가지는 두터운 은유의 정서와 더불어 실재로서의 의미가 있다. 


오태원, 강정대구현대미술제 2016


II. 실재로서의 물의 결
오태원의 작품에서 물방울은 물방울들이라는 복수형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개별 물방울을 독립시키기보다는 물방울과 물방울을 겹쳐지게 하는 ‘겹’을 형성한다. 서로의 몸이 겹쳐진 상태의 복수로서의 물방울들, 즉 ‘멀티(multi)-물방울’ 혹은 ‘멀티플(multiple)-물방울’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라! 한 개의 커다란 물방울을 전시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오태원에게 있어 대개의 전시 출품작들은 복수이다. 《부산국제환경예술제》(2015)에 출품되었던 2개의 물방울 작품 〈Drip-drop2〉은 서로의 몸의 한쪽 끝을 살포시 겹쳐 하나의 스크린을 만들어 자신의 몸 위로 투사되는 영상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창원아시아미술제》(2014)에 출품했던 4개의 물방울 작품 〈Drip-drop1〉은 또한 어떠한가? 4개의 물방울이 겹쳐지며 형성되는 멀티-물방울의 스크린은 서로서로 겹쳐지며 ‘겹’의 미학을 넉넉히 창출한다. 하물며 1000개가 넘는 물방울들이 서로의 몸을 겹쳐 장관을 이룬 《바다미술제》(2015)의 출품작 〈천 개의 빛, 천 개의 물방울〉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겹’이란 “물체의 면과 면 또는 선과 선이 포개진 상태 또는 그러한 상태로 된 것”이다. 즉 겹이란 달리 말해 틈이나 구멍처럼 빼기(-)의 공간이기보다 하나의 개체가 또 다른 개체가 만나 이루는 더하기(+)의 공간이다. 아울러 그것은 개체들 사이의 연접의 지대이자 접촉 공간이다. 오태원의 작품에서 물방울들은 대개 하나의 물방울과 또 하나의 물방울이 만나서 연접을 이루고 더해지면서 겹을 만든다. 즉 개체의 증식을 통해 겹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오태원의 작품에서 겹은 물방울 개체의 내부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2015바다미술제》출품작에서 처음 선보였던 ‘접어 만드는 각진 물방울’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보석과도 같이, 물방울이 얼음으로 결정(結晶)화된 모습이었다. 마치 보석처럼 보이기도 해서 〈천 개의 빛, 천 개의 물방울〉이라는 제명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즉 각이 있는 물방울 자체가 빛의 반사체로서 기능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각형의 물방울을 위해서 오태원은 접는 물방울을 고안했다. 물방울의 피부를 전개도처럼 겹으로 접어서 안으로 넣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금보성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2015)에서는 이 다각형의 물방울 안에 여러 인조 보석을 넣음으로써 물방울 개체 내부의 겹들을 다층화하는 시도를 행하기도 했다. 
우리는 안다. 물방울 내부의 겹들은 개체와 개체가 만나는 외부와의 무수한 겹을 통해서 하나의 ‘일정한 흐름’을 만든다. 어떤 경우는 1000개가 넘는 물방울들의 포개짐과 겹쳐짐을 통해서 ‘균질의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결’이라 부른다. ‘결’은 각진 물방울의 ‘결정’ 구조처럼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상태’를 의미하면서도 결정보다 더 미세한 규칙적 흐름을 의미한다. 즉 ‘결’은 볼록과 오목, 양과 음,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를 상호 충돌시키면서 일정한 질료적 평정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쉽게 말해 결이란 서구에서 흔히 마티에르(matiere)라고 부르는 속성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오태원의 ‘물방울+물방울’의 만남은 개체 내부와 더불어 개체 외부와 외부의 결합에 의해서 일정한 평균치의 질료의 상태를 만든다. 시각적으로 설명한다면, ‘개체+개체→겹→결’의 일정한 흐름이 작품의 표면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겹들은 허구의 것이 아니라 실재의 것이다. 때로는 그 겹들이 각진 물방울 내부로 잠입하거나, 때로는 서로 겹쳐지고 포개진 물방울들 외부의 공간으로 내몰려 잘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미 실재이다. 마치 들뢰즈(G. Delleuze)의 잠재적 존재(virtualite)로서의 ‘주름(pli)’의 비유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커튼의 보이지 않는 주름 내부는 실재로는 존재하지만, 현실화되지 않은 까닭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커튼을 활짝 펴서 주름 내부의 공간을 현실의 지평 위에 올리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되지만, 현실화 이전의 그것은 이미 잠자는 상태로 존재하는 잠세태로서의 실재이다. 


오태원, 국회아트페스티발1-20150518                                  오태원, 몽환전_ 20121018


III. 은유로서의 물의 빛
수많은 물방울들이 겹쳐지는 오태원의 작업에서, ‘물의 겹과 결’이 ‘실재’라고 한다면, ‘물의 빛’은 다분히 ‘은유’라 할 것이다. ‘물의 겹과 결’이 얼음-물-수증기라는 고체-액체-기체의 상태를 혹은 잠세태-현실화의 과정-현실태라는 철학적 존재 상태를 변주하지만, 그것은 모두 실재이다. 특히 물이 섭씨 0 ℃와 100 ℃의 특이점(singularite)을 만나 얼음이나 수증기의 형태로 비로소 현실태(actualite)로 변주되는 주름 속 잠세태(virtualite)로서의 존재이듯이, 오태원의 물방울들도 그러하다. 그녀의 물방울들은 들뢰즈의 철학에서 ‘주름’이라는 철학적 비유처럼 끊임없이 잠재태-현실태의 과정을 오가는 변성의 ‘운동체’이면서 잠재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여실히 드러낸다. 보라! 물방울은 물의 몸속으로부터 탈주하면서 중력을 거스르는 짧은 순간 현실화되거나, 대기의 몸속으로부터 수증기를 모아 자신의 몸을 만들어 현실화된다. 
반면 오태원의 물방울 작업에서 ‘물의 빛’은 물의 허구적 환영을 만들고 물을 대면하는 관객의 심리적 효과를 강화한다. 물론 여기서 ‘물의 빛’은 ‘물의 결’로부터 오는 심리적인 효과이다. 생각해 보자! 결이란 ‘나뭇결’, ‘물결’의 예처럼 물질의 평균화된 촉지적 속성과 같은 외형적인 것이지만, ‘마음결’의 예처럼 평균화된 감정으로 일관화되고 내면화된 것이기도 하. 마치 ‘숨결’이 ‘들숨’과 ‘날숨’을 쉼 없이 교차시키는 가운데서 일정한 평균치의 진폭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태원 작품에서의 ‘물의 결’을 보라!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으로 된 ‘간섭 현상(interference phenomenon)’으로부터 형성되듯이, 일정한 결을 만들어 선보이는 그녀의 작업의 심층에는 이러한 골과 마루의 운동이 격렬하게 생산되고 있는 중이다. 결은 실재이다. 그런데 결은 다분히 정신적인 것으로 변주된다. ‘나뭇결’, ‘물결’에서처럼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평정의 형식은 곧 그것의 내용과 맞물린다. 일테면 마음결이란 형식의 차원이자 그것으로부터 진화한 내용의 차원이기도 하다. ‘마음결’이 곧 ‘심리(心理)’인 것과 같이, 결의 형식은 리(理)라는 내용과 언제나 만나는 것이다. 즉 결의 형식은 언제나 이치, 도리, 원리, 섭리와 같은 리(理)의 정신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아니 어떠한 측면에서는 감성의 세계라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오태원은〈Drip-drop〉(2014-2015)시리즈 작업에서 중력을 지향하면서 낙하하는 찰나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하고 있는 커다란 ‘물방울’ 조형물 위에 영상을 투사한다. 정형화된 물방울의 모습뿐만 아니라 비정형의 물의 운동 이미지들을 한 장소에서 함께 만나게 한 것이다. 그녀가 언급하고 있듯이, “영상에서 보이는 물은 매우 극적인 이미지이다. 물의 마찰을 접하는 찰나, 그리고 빛과 맞닿음으로 결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물의 빛’을 형성하게 된다.” 결국 물방울의 물질적 만남과 빛이라는 비물질적 맞닿음이 합쳐져 ‘물의 결’로부터 ‘물의 빛’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는 이 시리즈 작업에서부터 최근의 작업인 〈천 개의 빛, 천 개의 물방울〉(2015)에 이르기까지 물의 내부로부터 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작품 속에 풀어내고자 했다. 관자의 시선을 물 아래에서부터 올려 보게 하는 방식을 실험한 것이다. 물방울 조형물 위에 투사된 ‘유동하는 물의 합성 영상’은 “물의 이미지를 여러 개의 픽셀로 나누고 지우고, 혹은 다시 그려 넣기를 반복하여 만들어 낸 이미지 영상”으로 작품에서 무한 반복되거나 중첩되어 사용된다. 즉 비정형의 ‘물의 빛’ 영상이 정형화된 물방울 조형물 위에 지속적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 시리즈물은 영상이든 실제의 구조물이든 물의 터널 안에서 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관람 형식을 띄게 됨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자궁 속의 원초적 기억을 더듬게 만들거나 동화 세계의 인어가 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터널은 마치 벤야민(W. Benjamin)이 19세기의 파리의 파사쥬(passage)로부터 탐구한 쉬벨러(schwelle)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안과 밖이 뒤섞이는 혼성의 공간이자, 경계로 구획된 위계와 질서의 공간을 무너뜨리는 탈구획의 경계 영역이자, 위계와 탈위계를 오가는 중간 영역’이다. 앞서의 논의를 잇자면 그것은 들뢰즈의 주름들(plis) 또는 겹주름(replis), ‘확장된 주름’ 또는 ‘주름에 의한 주름(pli selon pli)’의 공간이기도 하다. 즉 특이성이 작동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주름의 개념이 지속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름 접기(plier)’와 ‘주름 펼치기(deplier)’는 동시에 지속된다. 즉 ‘접다(plier)-펼치다(deplier) 그리고 감싸다(envelopper)-풀다(developper)'가 지속되는 것이다. 
한편, 야외 전시일 경우, 낮 동안에는 물방울 조형물의 표면을 덮고 있는 반짝이는 반사체의 재질에 투사되는 자연광의 효과를 통해서 무지개색이 영롱한 ‘빛의 무늬’를 선보인다. 밤에는 빛나는 인공조명으로 같은 ‘물의 빛’을 만드는 효과를 기대한다. 그것은 때로는 빛나는 천상의 세계를, 때로는 자연의 세계를, 때로는 심리 내면의 세계를 상황에 따라 다른 내면의 세계를 은유하면서 관객을 초대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야외 전시 중 비가 온다면 금상첨화이다. 작가가 기대하는 예술로서의 허구적 이미지와 실재의 빗물이 만나 ‘물의 결’과 ‘물의 빛’을 동시에 유감없이 펼쳐내고 관련한 주제 의식을 극대화시키는 까닭이다. 




오태원, Drip-drop2, 부산국제환경예술제

IV. 영혼의 물방울
‘물의 빛’과 ‘빛 무늬’는 오태원의 물방울 군집이 창출하는 ‘물의 겹’과 ‘물의 결’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도 감성적인 차원의 세계를 드러낸다. 금보성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2015)에서 선보였던 전시 주제 ‘영혼의 물방울(Drops of Soul)’은 바로 이러한 물방울이 품고 있는 물질의 의인화의 개념과 더불어 사물 존재의 미학을 건드린다. 물방울의 복수, 물방울의 집단체가 만드는 겹과 결의 질료적 평균화가 이르게 만드는 ‘심리적 결’로서의 영혼의 세계는 그녀의 작업이 지니는 본질적 차원이 다분히 심미적이고 정서적인 곳에서부터 발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지금까지 분석했던 그녀의 작품들이, 들뢰즈가 바로크 건축에서 발견했던 6가지 미학의 특성을 매우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주름(le pli), ②안과 밖(l’interieur et l’exterieur), ③위와 아래(le haut et le bas), ④펼침(le depli), ⑤짜임새(les textures), ⑥패러다임(le paradigme). 이러한 특성들은 오태원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물방울(들)의 내/외부의 연장, 물방울 터널의 위/아래. 물방울들의 겹쳐짐, 물방울들의 겹과 결, 들뢰즈 철학의 주름 비유의 조형적 실험과 확장과 같은 특징들과 연동된다. 
그러나 이것은 공간의 담론에만 그치지 않는다. 들뢰즈가 바로크 건축에서 발견하는 미학적 특성은 ‘주름’ 이론을 중심으로 한 ‘물질과 영혼 사이에서의 예술 탐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번 항목 ‘위와 아래'에 대한 분석을 ‘빛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접근하거나 2번 항목 ‘안과 밖’에 대한 분석에서 “무한히 세분화되는 주름은 물질과 영혼 사이를 통과하고,〔...〕구부러진 선은 영혼 속에서 현실화”된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태원은 최근 개인전에서 계단 위에 물방울들을 늘어놓거나 전시장 벽 가득 물방울로 중첩된 벽을 만들기도 한다. 갖가지 인조 보석들과 장식들을 함께 배치해서 물방울의 주름의 담론을 조형적으로 다양하게 실험한다. 파티션 내부에 어두운 공간을 만들고 다각형 구조로 생긴 수많은 물방울들을 천장에 매달아 물의 영상을 투사하는 영상 설치 작품 또한 선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하며,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꿋꿋한 영혼의 강인함”이라고 표현하는 정신적, 심미적 차원의 심층에서 탐구되는 것이다. 

“나의 물방울 속 안에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 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모두 다르지만, 그 어떤 한 방울도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번 전시에서는 설치 작업과 영상을 통해 물방울의 본질을 드러내고, 영혼이 담겨 있는 수많은 물방울들을 이야기한다. 그간 작업의 핵심적 소재가 되었던 물은 이번 전시에서 형태를 가지는 물(물방울)과 형태를 지니지 않은 물(영혼)로 구분되며, 물방울의 표상으로 내포하는 의미들을 전달하고자 한다.” 



오태원, 고은 콜라보_천 개의 빛, 천 개의 물방울, 바다미술제 2015.

그녀의 진술처럼,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물방울이라는 조형적 구조물을 통해서 오태원이 천착하는 ‘영혼’ 혹은 ‘눈물’과 같은 정신적이고도 심미적 차원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아울러 들뢰즈의 주름의 위상학(topology), 리좀적 시공간을 교차시키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작업의 형식 실험 외에도 관련한 심층적인 내용과 주제 의식을 담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 불, 빛이라는 가장 근원적 물질을 시각화하는 장대한 스펙터클의 내면에서 그녀만의 가장 내밀한 내러티브를 작동시키면서 일정 부분 가능해진다. 그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 깊은 바다 속에 빠졌던 경험이 야기한 물에 대한 트라우마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난한 노력과 눈물 그리고 종국에 얻기에 이른 카타르시스와 같은 것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주제에 대한 지금과 같은 심층적인 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태원이 구축하는 물방울들을 가히 영혼의 물방울이라 할 만하다. ●


2015오태원초대전, 금보성아트센터

출전/
김성호,「물의 결, 물의 빛 그리고 영혼의 물방울」, 카탈로그 서문, 롱버전, (오태원 전, 2015. 11. 28-12. 9, 금보성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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