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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 대가를 찾아서

김달진

한국 근대미술 대가를 찾아서(1)

한국적인 산수화의 한 전형,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우리의 근대 미술에서 평가받는 작가 중 전통 회화 분야에서는 청전 이상범을 단연 손꼽는다. 그는 1994년 미술 잡지 격월간인 가나아트 11.12월호 특집 “한국 근대 미술을 다시 본다” 중 미술사. 평론. 이론 등 전문가를 상대로 한 설명 조사에서 대표작가로 단연 가장 많은 표를 얻기도 하였다.
이상범은 구한말에 태어나 현재와 멀지 않은 2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이다. 그는 조선 말기에 전수된 전통 화풍을 습득하여 화업을 시작했지만 비교적 관념성을 탈피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된 강산과 자연경관을 찾아내었다. 청전 산수화에는 많은 산수화의 일반적인 특징인 심산유곡이나 기암괴석의 절벽, 층층이 떨어지는 폭포수 등이 적다. 한국의 야트막한 산야 풍경을 독창적인 화풍을 수렴하여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 된 것이다.

우리 나라 곳곳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친근한 산야를 즐겨 그렸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가장 한국적인 산수화에 접근한 그의 그림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함께 소박한 아름다움과 향수를 느끼게 끔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로 작품 소재는 높지 않고 펑퍼짐한 낮은 산, 시골 언덕, 숲길, 농가나 시골 화전의 외딴 초가집,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기와집이나 성곽, 얕게 흐르는 개울가, 특징적인 나무다리가 많다. 또한 소를 몰거나 지게를 지고 가는 농부,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아낙네, 물동이를 지고 가는 사람, 거룻배에서 낚시질하는 노인들이 등장 인물로 나오는데 이 모두가 지금은 사라져 버린 풍물들이다.

특히 인적이 드문 산골 농촌의 생활과 향토적 냄새가 금방이라도 풍길 듯한 느낌을 주는 정경들은 더욱더 우리들 마음속의 참다운 고향을 불러낸다. 화면에서는 수묵의 농담 변화, 은은히 우러나는 담청색 혹은 황갈색의 온후한 대기 감을 완숙한 붓 맛으로 담아 내는 그의 화풍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한국 산수화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라고 결론을 내리고 만다. 게다가 스산하고 적막한 단조로운 구도 속에서도 무궁한 조화를 연출하느라 애쓴 그의 작가 정신은 높이 평가 할 만하다.

이상범은 1897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여 그후 서울로 올라와 1914년 서화 미술원에 입학하여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조석진, 안중식이 지도를 받았고 4년후에 졸업하였다. 1922년엔 조선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25년부터 34년까지 10회에 특선을 차지했으며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괴었다. 해방 후 에는 1949년 1회 국전 추천작가로 참가했으며 초대작가 심사 위원을 역임했고 61년까지 홍익대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3기로 나눈다. 1기는 전통 화법을 배운 학습기 (1914-22), 2기는 일제시대의 모색기 (1923-45), 3기는 청전 양식을 확립한 완숙기(1946-72)로 변모하였다. 청전은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는데, 첫째 건영은 작가로 활동하다 6.25때 행불 또는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고, 딸 인하씨는 현재 한국화가로 활동 중이다. 둘째의 아들인 승하 씨도 작가이며 막내인 진걸 상명대 교수로 국전 초대 작가를 지냈다. 3대로 화업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4월에 볼만한 전시회
경기 침체에 따라 화랑가도 예외 없이 불경기가 계속 되고 있는데, 최근 들어서는 더욱 바닥에 머무르고 있다. 이 달의 전시회로 청전100주년을 맞아 삼성문화재단이 중앙일보사내에 위치한 호암갤러리에서 4월29일까지 청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생전에는 1952년 대구 미공보원에서 개인전이 한번 있었고 72년 동아일보사 주최로 유작전이, 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주기전이 열린바있다. 이번 전시회는 통영 충렬사의「충무공 영전」이 처음 공개되었고, 청전의 70여점의 대표작들이 한국적 산수와 흙냄새를 물씬 전해 준다.
◆「이른 봄의 소리-김환기 뉴욕시대전」이 부암동에있는 환기미술관 에서 4월20일까지 열려 봄이라는 계절적 감각과 음악적 요소가 함 축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는 「97.마니프 국제아트페어(4.26~5.6)」 가 올해 3회로 열리는데 국내외 외국작가들이 참여하여 화랑을 통 하지 않고 직접 고객을 불러들여 작품을 판매한다.
◆갤러리 현대(T.734-8215)에서는 우리나라 추상미술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는 「박서보展(4.1~14)」과 외국작가 「소토展(4.22~5.5)」을, 성곡미술관(T.737-7650)은「우리시대의 초상 아버지展(4.16~5
.31)」을 각각 개최할 예정으로있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2)

가장 독창적인 한국의 작가, 박수근(朴壽根)

지난 1995년 갤러리현대에서 박수근 30주기전이 열리는 기간 동안
그의 예술을 재조명하는 학술발표회가 출판문화회관에서 있었다. 도판 자료집과 대형 화집 2종의 책도 나왔다. 사후 유작전 한 번으로 끝나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10주기전, 20주기전이 열리고 많은 관람객이 모이고 날이 갈수록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소더비 크리스트 경매를 통해 한국작가로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지금도 작품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작품을 내놓는 사람이 없어 거래가 안되는 작가이다. 화가 지망생들이 꿈꾸는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하였다. 1932년 선전의 서양화부에 수채화를 출품하여 입선을 시작으로 36년부터 43년까지 지속적으로 입선하였다. 6.25동란때 월남하여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연명하기도 했다. 국전에서는 1959년 추천작가,62년 심사위원을 지냈다. 말년에는 백내장으로 왼쪽 눈을 실명하고 간경화로 51세에 타계하였다. 많은 고생을 겪고 가난과 신체적 고통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현재 첫딸 인숙씨는 미술교사로 있고 아들 성남씨는 화가로 활동하다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시절 프랑스의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 원색 도판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그림에 더욱 열중하여 밀레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며 작가로 성장하였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의 그림 소재는 시장, 행상, 노점, 골목 풍경, 노인, 여인, 소녀 등을 즐겨 그렸다. 나무도 항상 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등장하는데 소설가 박완서 <나목> 줄거리 이기도 하다. 작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과일이나 물건을 살 때도 한 곳에서 사지않고 일부로 노점 몇 곳을 돌아 사가지고 온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화폭에 우리나라 서민들의 삶을 기록하여 갔다. 소박하고 끈질긴 생활의 진실을 때로는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마을 사람들을 사랑으로 담아 내었다.
간결한 윤곽선, 억제된 색조로 소박하면서 바위처럼 견고하게 표현하였다. 때로는 생략된 선에 의해 경직된 화면이 보일 때도 있다. 화강암 표면이나 흙고물같은 마티에르의 독특한 기법을 구축하였고 바탕은 짙은 쑥색의 암갈색이었다. 기존의 표현방법과 양식을 벗어나 독창적인 박수근 그림이 탄생되었다. 상투적인 사실주의적 묘사 작품이 지배하던 우리 화단에서 서양의 매재를 소화하여 한국인의 모습을 찾아내는데 성공한 셈이다.

정규 미술학교 교육마저 제대로 받지못한 박수근은 자신의 조형세계를 만들기 위해 고난의 연속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합집산하는 미술계의 정치적 풍토를 외면하였다. 입신 출세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은 자립적인 작가였다. 한국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경을 독특한 시각과 조형언어로 형상화 하였다. 독자적인 한국의 인간상을 그려냈기에 가장 한국적인 작가가 되어 오늘날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5월에 볼만한 전시회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전시회가 열린다. 용인 호암미술관이 야외조각장을 1년간을 거쳐 한국 전통정원으로 개조하고 개원기념으로 <호암미술관소장 금속유물특별전>을 개최한다. 선사시대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의 금속유물 400여점이 출품된다.서울 호암갤러리(T.751-9995)에서 5월1일부터 25일까지 열고 6월10일부터 용인 호암미술관으로 이어진다. 동아일보사에서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원로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정리 조명하는 기획전으로 일민미술관(T.721-7772)에서 <이상욱회고전(5.21-6.8)>이 있다.1950년대말 추상작업에서 88년 작고할 때까지 그의 유화 판화를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 휴일 나들이를 겸해 과천 서울대공원 안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T.503-7744)에서 열리는 <대한민국미술대전(5.10-25)>도 찾을 만하다. 신인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젊은 열기를 느끼면서 미술의 최근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예술의 전당 미술관(T.580-1612)에서 개최되는 <‘97 화랑미술제(5.23-28)>가 있는데 국내 82개 화랑들이 참가해 푸짐한 미술장터를 열게 된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3)

한국 인상주의 최고봉이며 선비형 화가, 오지호(吳之湖)

지난 85년 10월 덕수궁에 있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지호회고전>이 열렸다. 그 전시는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작품 34점을 중심으로 초기부터 절필작품까지 151점이 전시되었다.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였고 3년후에 화집도 발행하였다. 작품 기증이란 쉬운 일이 아닌데 용단이었다.

<빛의 약동! 색의 환희! 자연에 대한 감격- 여기서 나오는 것이 회화다. 만개된 복숭아꽃, 오얏꽃, 그 새로이 파릇파릇 움트는 에메랄드의 싹들! 섬세히 윤택히 자라는 젊은 생명들! 이 환희! 이 생의 환희!....>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 1938년)
2인화집에 실려있는 <순수회화론> 글중 일부분이다. 이 미술에 관한 글은 매우 획기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지금도 평가한다. 젊은 시절 자신의 회화관의 일부로 명료하고도 단호하고 정열에 가득 차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색화집에는 두 사람의 각 10점씩이 수록되어 있고 그속에는 오지호가 과수원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은 김주경의 작품이 들어있다.

오지호는 한국 서양화가로는 처음으로 이 땅의 빛과 대기가 지닌 투명함과 명랑성의 인상파적인 눈을 떴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했던 작가이다. 알다시피 인상파화가들의 주장은 물체에 고유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광선에 의한 변화로 보고 실외에서 직접 캔버스에 제작하였다. 그는 인상파적 기법이 뚜렷이 드러나는 <과수원풍경> <사과밭> <5월풍경> <초추> 등 풍경화들을 남겼다. 이 그림들에서 인상주의 그림 특성대로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색채를 분할해서 공간을 해체하고 한순간의 표정들을 분명한 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전 생애동안 햇빛이 풍성한 고향 빛고을(광주)를 떠나지 않으면서 우리 산하에 내리비치는 찬란한 빛과 색채의 하모니를 제작하였다. 1950년대후 작품은 자유분방한 붓터치에 의한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복잡하고 섬세한 묘사보다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색덩어리로 처리하여 자연이 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가 즐겨 다룬 과수원 항구 설경 온실 정물 등에서 햇빛과 색채에 대한 추구는 계속되었다. 1974년 유럽 여행후에는 <함부르크항> <노르웨이풍경> <북구의 전원> <베니스풍경> 등 이국 정취를 담은 작품도 많다.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 태생으로 193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28년 녹향회 창립회원으로 38년에는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발간했다. 1948년 광주에 정착하여 이듬해부터 60년까지 조선대교수를 역임했다. 호남미술 발전을 주도했으며 서양미술의 계몽 민족적 미술의 개척을 위하여 많은 글들을 발표했고 이를 실제 작품으로 실현해냈다.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회원을 역임하였고 1982년 77세로 작고하였다.

구한말 전남 보성군수를 거쳐 한일합방으로 자결한 우국지사의 아들이었다. 한국화가로 드물게 선비정신과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구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론을 겸비한 작가였다. 피카소를 비판한 <피카소와 현대회화>, 구상회화와 비구상미술은 별개의 예술임을 주장한 <구상회화 선언>등의 논문도 있고 1968년 <현대회화에 대한 근본문제>를 출판했다. 한글만으로 교육하면 천재도 천치가 된다는 신념으로 한자교육 부활에도 노력하였다. 3대로 화업을 잇고 있다. 아들 승우씨는 예술원회원이며 서울, 승윤씨는 전남대교수를 역임했고 광주에서 크게 활동을 하며 부친이 살았던 초가집에 살고 있다. 손자 병욱씨는 미술평론가로 원광대교수로 재직중이며 상욱씨는 조각가이다.

6월에 볼만한 전시회
* 고대 이집트문명은 불로장생과 영혼불멸의 이념을 추구하고 이를 실천해 왔던 문명이다. 국내 처음으로 이집트 유물들을 예술의 전당 미술관( T. 580-1612)에서 볼 수 있는 <고대이집트문명전>이 열린다. 6월3일부터 7월20일까지 열리는데 황금마스크를 비롯한 보물급에 해당하는 60여점과 보조전시물 40여점이 전시된다. 대여 포장비 보험료만도 5백만달러를 추산하는 대형전시회로 보기드문 좋은 기회이다.
* 그동안 연례적으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미술의 검증과 모색을 꾸며오던 환기미술관( T.391-7701)이 <지지체로서의 천전>을 7월13일까지 연다. 재래의 캔버스나 종이가 아닌 일상 속의 옷감이나 이불보 또는 생활 속의 천을 활용하여 여류작가 7명이 작품을 출품한다.
* 청담동의 63갤러리(547-0735)는 <회화 속의 문학정신전>을 6월3일부터 14일까지 연다. 작가들이 그동안 읽었던 소설 시 성경 등에서 느낌을 회화로 표현하고 짧은 글도 함께 꾸미는 전시이다. 6명 작가들의 책에 대한 감동을 관람객이 간접 체험하게 된다. 청담동에 있는 화랑들은 6월19일부터 29일까지 <청담미술제>에 참가한다.
* 서울대공원안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T. 503-7744)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 신 니콜라이(한국명 신수남) 특별전을 6월5일부터 7월15일까지 연다. 강제 이주사를 주제로 민족의 고난을 작품으로 형상화 했고 가로 44m 짜리 등 초대형 작품도 나온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 (4)

가장 신화적이고 순진무구한 화가, 이중섭(李仲燮)

오는 7월 1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이중섭 축제가 열린다. 6.25 피난시절에 머물었던 초가를 복원하고 이중섭로 라는 거리 이름이 지정되고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있을 예정이다. 한국근대미술사학회의 다섯번 째 전국학술대회로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재조명한다. 미술평론가들의 주제 발표에 이어 토론회를 갖는다.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태생으로 1940년 일본문화학원을 졸업하고 40-43년 일본 미술창작협회전에 출품하였고 42-43년 한국작가와 신미술가협회를 결성 활동하였다. 처음 다닌 오산학교에서 일찌기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임용련 미술교사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의 꿈을 다졌다. 그가 공부한 문화학원은 다른 학교와 달리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학교였다. 그리고 참가했던 미술창작협회는 당시 새로운 미술운동의 추진체로 서구의 새로운 조형사조를 따랐으며 두 차례의 상을 수상하였다. 46년 공산당 산하의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으나 원산문학가동맹의 해방시집에 그린 표지화가 구상의 시와 문제가 되어 당국으로부터 문책을 받기도 하였다.

6·25 사변에 월남하여 부산 서귀포 통영 등을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5년 1월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이듬 해 40세로 요절하였다. 순진무구한 천성과 작가적 정신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연극, 문학, 전기로도 극화 되었다. 1972년 유작전(현대화랑), 86년 30주기 회고전 (호암갤러리)등이 면모를 살핀 큰 전시회였다. 이중섭을 기리기위해 조선일보사에서는 1989년 이중섭미술상을 제정해 해마다 1명의 작가를 선정 시상해 오고 있다.

그의 생애는 해방되기 3개월 전에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도 마사꼬(한국명 이남덕)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전쟁으로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그 뒤 절절한 고독감과 처자에 대한 그리움, 가장으로서의 무능을 자책하려고 든 병적인 고뇌, 안식처를 못갖고 자학적인 생활로 영양실조에 간장염까지 얻었다.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청량리뇌병원을 거쳐 적십자병원에서 삶을 마치고 무연고자로 3일간이나 방치되어 있다가 뒤늦게 친지들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대표작 <소> 시리즈 연작에는 그의 드높은 화가적 성취와 시대적 절망감이 진한 조형언어로 담겨져 있다. 거친 숨소리라도 들릴 듯이 격렬한 동세를 보이며 저항하는 황소, 분노를 풀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시 질주할 곳을 찾고 있는 듯한 지친 소, 고통과 갈등 절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클로즈업된 슬픈 소가 있다. 그속에서 우리 민족의 울분과 저항이 있었다. 소재로 즐겨 다룬 가족 부부 어린이 닭 물고기 복숭아 속에는 환상적인 농원, 평화로운 자연풍경, 자전적인 요소도 많이 담고 있다. 힘차고 대담한 터치, 단순화된 형태, 강열한 개성으로 인간 내면을 표현했다. 사변으로 재료의 극심한 궁핍속에서 태어난 독특한 그림이 은지화 였다. 담배갑 속의 은종이에 철촉으로 그어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담아내었다. 또한 엽서 위에 많은 스케치와 가벼운 수채화를 남겼다. 뛰어났던 데생력과 풍부하고 자유로웠던 생동감의 필력이 특출하였던 화면 구성과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일제시대, 6.25 사변의 민족적 수난과 가족적 비극 속에서 파란 많은 고통이었다. 초기에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 후년에는 자기 신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민족적 화가로 평화 염원의 간절한 구체적 심정을 담은 인간적 순수함이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남는다.

7월에 볼 만한 전시회
* 인사동 화랑가에는 갤러리사비나(T. 736 - 4371)에서 <숲으로 가는 길 - 인사동 수목원전 (7.2 - 15)>이 열린다. 숲의 향기, 숲의 소리를 담은 숲 그림으로 김명숙 김경열 주태석 명종말씨 등 8명이 출품한다. 갤러리도올(T.739 - 1406)은 7월 8일까지 <임군홍전>이 계속된다. 임군홍은 1912년 서울 태생으로 79년 북한에서 작고하였다. 그가 1930 - 40년대에 그린 스케치 수채화 등 미공개 발표작 60여점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다.
* 그동안 연례적으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미술의 검증과 모색을 꾸며오던 환기미술관(T.391 - 7701)이 <지지체로서의 천전>을 7월13일까지 연다. 재래의 캔버스나 종이가 아닌 일상 속의 옷감이나 이불보 또는 생활 속의 천을 활용하여 여류작가 7명이 작품을 출품한다.
* 서울시립미술관(T. 736 -2025)에서는 <서울서예대전( 7.16 - 8.4)>이 있는데 이름 높은 서예가들의 한문 한글 문인화 전각 등을 보며 묵향에 젖을 수 있다. 같은 곳에 있는 서울600년기념관에는 <창작미술협회전( 7.7 - 27>과 <한성판윤전(7.3 -8.4)> 유물들이 전시된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 (5)

한국화가 중 가장 세계주의적인 작가, 김환기(金煥基)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인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화백이 생전에 소망하던 아담한 미술관이 타계후 20여년만에 세위지고 있다. 지난 1992년 그를 위해 개관한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그가 생전에 그려놓은 설계도 그대로 별관으로 지어지고 있으며 11월에 완공된다고 한다. 그곳은 예술혼을 보여줄 기념관으로 꾸며 관련 자료나 유품이 보존 전시한다. 환기미술관은 한 작가를 위해 만들어진 사설미술관으로는 가장 모범적인 운영을 보이고 있다. 매년 남기고 간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기획전을 마련하고 있다. 여기에 회고전, 10주기전, 탄생80주년전, 20주기전 등 굵직한 전시회로 타계했지만 잊혀지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다.

김환기는 1913년 전남 신안 태생으로 일본대학을 졸업했다. 해방후 신사실파 동인으로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였다. 홍익대교수를 역임했고 1956년부터 3년간 파리에 체류하였다. 1963년 한국미협 이사장으로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출품하여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 1974년 61세로 작고하였다.

그는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이며 한국적 서정을 양식화한 작업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나누어 1963년 도미(渡美)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30년대에는 구성주의적 양식화에 의한 추상을 시도하였다. 1950년대에는 달, 구름, 산, 새, 사슴, 매화, 백자, 여인 등을 주제로 풍요한 색채와 시적인 표현의 양식화된 작풍을 보였다. 이조백자에 끊임없는 애정은 많은 항아리 그림으로 승화되고 시를 직접 화면에 도입하는 시도에 까지 이르렀다. 문인들과 교우가 많았으며 좋은 산문들도 남겨 놓았다. 파리시대에는 더욱 심화되고 원숙함을 더해갔다. 전반기 작품은 한국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형상적 작업이었다. 즉 한국인이 꿈꾸어 온 이상향적 이미지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그의 작품이 완전 추상화된 것은 60년대 중반이었다. 기하학적이며 단순 구성의 추상을 거쳐 면분할의 색점 작업이었다. 처음 미국생활이 국내에 소식이 알려지지 않다가 1970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크게 변모된 작품세계로 드러났다. 이때 대상을 수상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의 마지막 연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가는 무수하게 찍어나가는 점 하나하나가 친구와 친지, 추억이 깃든 각가지 이름을 붙여 보았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작업은 조그만 사각형에 둘러싸인 무수한 색점들이 수평이나 수직, 혹은 곡선이나 원으로 반복해서 행렬을 이루는게 많다. 청색공간을 중심으로 또는 적황색, 회색톤의 놀라운 스케일에 치밀하고 질서 정연한 화면이 압도적이다. 이는 도시의 밤 불빛이나 밤하늘의 찬연한 별빛을 연상 되기도 한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맞닿는 곳으로도 느껴진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민족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하였다. 활동무대도 세계주의적인 작가였다. 사후에도 서울 뿐만아니라 뉴욕 파리 도쿄 에서도 전시회가 이어졌다.


8월에 볼 만한 전시회
8월 휴가철에는 전시회 건수가 줄게 된다. 그러나 미술관을 중심으로 좋은 전시회가 관람객을 부른다.
* 서초동 예술의 전당 미술관(T. 580-1612)에서는 9월 3일까지 <폼페이 최후의 날 유물전>이 열린다. 환락과 퇴폐가 넘실대던 고대 로마제국의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일순간 잿더미 속에 묻혔다. 그후 유적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번 전시회로 고대 로마의 위대한 예술사상과 로마인의 숨결을 느낄수 있다. 전시 작품은 프레스코화, 모자이크화, 황금장식, 조각상 등 150여점이다. 주최측은 현장 발굴사진, 영상 다큐멘터리 자료를 함께 전시 상영된다. 또 같은 장소에서 8월 27일까지 <교과서미술전>이 있다. 이 전시회는 초.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 근현대 미술작품중 교육적 효과가 높은 80점을 선보인다. 교과서를 통해 낯은 익었지만 보기 어려웠던 원작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다.
* 국립현대미술관(T. 503-7744)에서는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사람인 <토니 크랙전>을 8월 2일부터 9월 3일까지 연다. 그는 폐 플라스틱 쓰레기로 만들어진 구상적인 형태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금호미술관(T. 720-5114)은 8월 26일까지 <텍스트로서의 육체전>을 여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의 육체를 해석하는 젊은 작가 19명이 출품한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6)

금강산 실경산수를 그린 대가, 변관식(卞寬植)

지난 5월 서울 관훈동에 있는 노화랑에서는 <박수근 VS 변관식>전 이라는 뜻있는 이색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 근대미술의 대표급 작가인 박수근 변관식의 작품을 비교 감상 할 수 있었다. 박수근은 유화, 변관식은 수묵화로 재료는 서로 달라도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한 거장들이다.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조선시대 겸재 정선을 태두로 진경산수의 의의는 크고 여러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고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과 일제시대에 들어와 맥을 잇기 어려운 비운에 처했다. 이런 환경에서 이상범과 변관식이 등장하여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진경산수화의 전통을 회복시키려 했다. 이상범은 서정성으로 양식화하였다. 특히 변관식은 체험과 관찰 사생을 바탕으로 실경정신은 한국적 자연을 독자적 양식에 의해 주체성을 체계화 했다. 그는 자신의 주관적 감동을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대담한 변형과 복합적 시점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이 실현을 위해 분방하고 거친 필치와 먹을 강하게 사용하는 적묵법과 파선법의 형식을 낳았다. 적묵(積墨)은 먼저 붓에 먹을 엷게 찍어 그림의 윤곽을 만들고 그위에 다시 먹을 칠하는 것이다. 파선(破線)은 진한 먹을 퉁기듯 찍어가는 것이다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은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외할아버지인 소림 조석진에게 사사하였다. 그후 일본에서 5년간 수학했다. 서화협회전과 선전에 출품했고 해방후는 국전에 심사위원도 역임했다. 서라벌예대 강의를 나갔고 1968년 5월문예상을 수상하였다. 1974년 개인전(현대화랑), 75년 동아일보사 주최 회고전(신문회관)이 개최되었다. 그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벗어나 회화적 평가가 드높아가던 1976년 77세로 작고하였다.

그는 일찍 부모곁을 떠나 서울로 와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화업에 입문하였고 초년에 두 살된 딸을 남겨둔 아내와의 사별 등은 고독과 방황이었다. 1937년 금강산에 들어가 커다란 전기를 맞는다.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각 봉우리의 산세, 바위의 형태, 물의 흐름, 나무의 형태를 자세히 살피고 스케치하였다. 금강산에서도 높이높이 치솟은 삼선암, 기운차게 흘러내리고 소용돌이치는 진주담 외에 옥류천, 보덕굴, 단발령을 다룬 작품이 많다. 둔중하고 거칠고도 힘찬 필치로 뻗어나간 산세와 기암절벽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그가 평생에 가장 큰 감동으로 받아 들였던 금강산 풍경을 통하여 진 경산수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한편 우리나라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나의 이상향으로 그린 정형산수가 있다. 이 경향은 <춘색 1944> <무창춘색 1955> <농촌의 만추 1957> 등이 있다.

1957년 국전 비리를 <공정 잃은 심사>로 신문에 폭로하고 화단을 외면한 후 재야작가로 작품을 제작한 반골(反骨)이었다. 적묵에 대해 너무 검다고 평하면 오기로 더 시커멓게 칠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그림속에 죽장을 집고 허위허위 길을 재촉하는 두루마기 입은 노인은 작가 자신으로 이야기 된다.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마저 풍경처럼 객관화시키려는 심정으로 방랑자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소정은 우리 국토의 최대 명승지인 금강산을 한국적 풍토의 갈색으로 귀중한 실경산수화의 맥을 이은 대가로 한국화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 (7)

전통 남종화의 마지막 보루, 의재 허백련 (毅齋 許百鍊)

우리 미술계에 ‘동양화 6대가’ 라는 말이 있다. 이는 1971년 서울신문사 주최로 신문회관에서 열린 ‘동양화 여섯분 전람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의재 허백련, 이당 김은호, 심향 박승무,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말에 태어나 우리의 근 현대를 거치며 1970년대까지 활동하며 이름을 남긴 작가들이다. 허백련은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등의 새로운 방향 모색과는 달리 정통적인 남종화에 뿌리를 두고 그 법통을 지키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동양화에는 크게 북종화와 남종화로 구분한다. 북종화는 아름다운 색채와 대상물의 사실적이고도 객관적인 표현을 중시하였다. 주로 초상화 동물화를 채색하여 그렸고 직업적인 화가들이 많았다. 반면 남종화는 상징적이고 주관적인 화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먹색을 사용하여 농담에 의한 변화있는 표현이 발달하였다.

허백련은 1891년 전남 진도 태생으로 미산 허형(米山 許瀅)에게 사사했으며 일본에도 유학했다. 1913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 입명관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단하고 일본화가에게도 그림을 배웠다. 1922년 1회 선전에서 2등상을 수상했고 27년까지 출품했다. 국전에서 초대작가도 역임하였고 예술원 회원으로 197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1973년 동아일보주최 회고전(신문회관)이 있었다. 1977년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다. 사후에는 큰 전시회로 1991년 탄생100주년 기념전이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되어 작품 세계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사군자 기명절지 화조 산수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으나 특히 산수화에서 기량을 나타내었다. 자연을 그렸지만 사의라는 정신적 표현법과 문기 넘치는 작품을 고집스럽게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산수화는 비현실의 이상적 관념주의에 머문 셈이다. 전반적인 성향은 밋밋하고 펑퍼짐한 호남지방의 산세가 드러난다. 말기에는 농촌의 전원생활을 산수에 넣기도 하였다. 화법에 엄격했고 수묵의 엷은 담채 및 거친 갈필을 뭉개듯이 사용한 기법이 많다. 중묵에 갈필을 위주로 부드럽고 정취짙은 독특한 필치를 보였다. 한학과 중국화론에 대한 깊은 지식은 예술적 풍부성을 보였다. 서예에도 독특한 격조를 보여 남화가의 이상적 조건인 시서화(詩書畵)를 겸비하였다.

의재의 또 다른 면모는 농민운동가로도 족적을 남긴 점이다. 나라를 부강시키기 위해서는 농촌운동이 절실하다는 판단 아래 1946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었다. 한편 다원과 농원을 가꾸며 근로생활을 실천하며 만년에는 무등산 기슭의 춘설헌을 생활 근거지로 도인풍의 면모를 보였다. 1938년 연진회를 발족시켜 후학들을 배출하였는데 구철우 김옥진 문장호 이상재 박행보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해방후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도 활동은 이어지며 한국화의 커다란 맥을 잇고 있다. 그는 남종화에 이상을 실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80여년 동안 예도를 지킨 마지막 거장이었다. 정신적 내면성을 중시하는 독특한 양식을 호남화단에 정착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다.


10월에 볼 만한 전시회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T. 760-4604)은 10월15일까지 <한국미술신세대흐름전 : 대지와 생태>를 연다. 한국미술의 새로운 모색을 목적으로 김명혜 김준 전용석 채미현 황재숙 등 30대 작가 14명이 출품한다. 이어 10월 16일부터 11월 5일까지 <‘97시도미술대전 수상작품전>으로 14개 시도 에서 개최되고 있는 지역미술대전의 수상작품을 중앙에 초대하는 기획전으로 150여점이 출품된다.
* 갤러리현대(T. 734 - 6111)에서는 10월 1일부터 15일까지 서울대교수 중진조각가 엄태정전이 있다. 이어 10월 23일부터는 재불작가 <방혜자전>이 있다.
* 인사동 선화랑(T. 734 - 5839)은 10월 9일부터 18일까지 원로작가 <전혁림전>과 10월 26일부터는 빛을 추구하는 <우제길전>이 열린다.
* 서울시립미술관(T. 736 - 2026)에서는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현대도예의 다양한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서울국제도예비엔날레>가 기대를 모은다.
국 내외 15개국으로 한국 29명. 외국 29명이 출품한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8)

아쉬움 남긴 천재화가, 이인성(李仁星)

일제 식민기간중 1930년대 우리 서양화단은 가장 활발한 그룹활동과 다양한 조형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야수파 표현파 추상미술 등의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전반이 없는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상이한 유파의 혼재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시대상황에 걸맞는 적절한 창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이 가운데 이인성은 17세때 선전에 수채화를 첫 출품하여 입선하고 1935년 최고상을 받았고 일본 제전에서도 준특선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인성은 대구 출생으로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 36년 선전에서 수상 및 연특선을 거쳐 추천작가까지 역임하였고 당대 천재화가로 각광받았다. 해방후 이화여대 강사로 1948년 개인전(동화화랑)을 가졌고 국화회화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49년 1회 국전에 심사위원을 역임했지만 6.25때 39세로 타계하였다. 수복후 혼란중에 순경과 사소한 시비 끝에 총탄을 맞았다. 화가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하여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했으며 죽음마져 애석하게도 비명에 갔다. 사후에는 1972년 유작전(서울화랑)과 77년 미발표작전(문화화랑)이 있었다. 최근년에 이르러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논문들이 나오고 새롭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인성의 형성은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이룩되었다. 일찍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인정받았고 후천적인 교육은 주로 도쿄화단 주변에서 받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상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1931년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일하여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하여 크레용회사에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전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작가의 위치를 높여갔다.

이인성이 정립한 한국미는 향토성의 주제에 형태적인 것과 색감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적 구심감각에 도달한 그의 조형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느껴진다. 색감은 건조된 감각의 조화를 바탕으로 다색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이 역시 향토적인 색감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붉은 색은 우리의 향토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그의 향토적 서정주의는 한국적인 특징을 양식화시켰으며 국전을 중심으로 후배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채화에도 뛰어나 수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유동적인 속도감과 세련된 감각을 여지없이 나타낸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 <창가 1934년>, <가을 어느 날 1935년>, <경주의 산곡에서 1935년>, <사과나무 1939년> 등이 있다.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강하며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 인상주의 회화에 경도하여 감각적인 면에서 수용하였다. 자기 주변의 풍경 정물 인물에서 주제를 택하며 풍부한 색채와 예리한 터치로 감수성이 많은 재기 발랄함을 보였다.


11월에 볼 만한 전시회
*호암갤러리(T.751-9995)는 12월 28일까지 <전환의 공간전>을 연다. 호암미술관 소장 현대미술전이란 부제로 현대미술의 세계적인 작가 30여명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다.
*경복궁옆 사간동 화랑가에는 좋은 전시회가 있다. 금호미술관(T.720-5114)은 개관 1돌기념 <호앙 미로전>을 12월 21일까지 연다. 미로는 스페인 출생이며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림 조각 판화 드로잉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아트스페이스서울(T.737- 8305)은 작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한 작가 <윤석남전>을 조선일보미술관과 동시에 11월15일부터 12월10일까지 연다.
*서울시립미술관(T.736-2025)에서는 11월6일부터 12일까지 <구상전>, 11월 15일부터 22일까지는 <한독미술가협회전>을 갖는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9)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에 공헌, 이응로(李應魯)

지난 2월 가나화랑과 갤러리현대에서는 이응로유작전이 동시에 있었다. 갤러리현대는 문자 추상회화 60여점, 가나화랑은 나무조각 세라믹 판화를 전시하였다. 이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재료의 폭 넓은 작품세계를 다시 보여주었다. 이에 앞서 2월 갤러리현대에서는 고인의 아들인 재불작가 이융세 개인전이 관심을 모았다.

고암 이응로(顧庵 李應魯)는 1904년 충남 예산 태생으로 19세 때 상경하여 해강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연수한 뒤 일본으로 가서 도쿄 가와바다(川端)그림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고 해방후 홍익대교수를 역임하였다. 몇차례 개인전을 갖고 50세가 넘은 나이에 재도약을 꿈꾸며 1958년 도불하여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여 문하생을 지도하였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소환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루었으며 국내 화단과 단절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국제전과 개인전을 통해 왕성한 작품활동을 보였다. 1989년 그리던 고국 호암갤러리에서 모처럼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놓고 파리에서 85세로 타계하였다. 1994년 다시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있었으며 미망인 박인경여사도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전반기의 사실적 탐구와 후반기의 다양한 조형실험으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대나무를 많이 그렸고 도불전에는 사실적인 산수화와 시골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 6개월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밥알을 모아 신문지에 반죽해 오브제 작품을 만드는 등 치열한 작가정신을 발휘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자추상 작품은 신문이나 잡지를 잘게 잘라 캔버스 위에 붙인 콜라쥬 문자추상기(1960 - 65년), 수묵담채와 무채색에 가까운 색채로 문자형식을 그린 서예적 문자추상기(1960 - 70년), 짙은 테두리 선으로 각 문자의 이미지를 독립시키고 글꼴을 변형하며 재료도 나무판이나 융 등 다양하게 사용한 구성적 문자추상기(1970 - 80년)로 나눈다. 말년에는 인간의 춤을 소재로 도식적 운용을 보였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드넓은 광장이나 운동장을 가득 메운채 달리고 춤추고 열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시리즈는 모든 억압에 대한 집단적 항변으로 또는 자유를 향한 영원한 희구의 몸짓을 담은 메시지이다.

고암의 삶과 예술은 정치적 격동기에 한동안 어두운 긴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작품세계는 동일한 양식의 모방이나 반복적 표현기법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정신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리 고유의 전통적 미의식과 표현으로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새로운 예술세계의 모색에 천착하였다.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화면 구성 및 창조적인 작가정신이 넘치던 거장이었다. 일찌기 남먼저 국제무대인 파리로 건너가 동양적 미의식과 서구의 새로운 경향을 접목시킨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으로 우리 현대미술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남겼다.

12월에 볼 만한 전시회
12월은 한 해가 마무리되며 대학 졸업전이 많이 열린다.
* 종로구 신문로 성곡미술관(T 737-7650)은 확장 개관기념으로 <우리 문화유산, 오늘의 시각전>을 12월 28일까지 연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한국의 문화유산 종묘, 불국사. 석굴암, 팔만대장경, 창덕궁, 수원화성 5개처를 소재로 했다. 20명의 작가가 오늘의 시각으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적, 정신적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T 503-7744)은 12월 9일부터 3개월간 <한국근대유화전>을 열며 예술의 전당 서예관(T 580-1513)은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18일까지 <전각. 초서의 오늘전>을 개최한다.
* 인사동지역은 갤러리사비나와 인사갤러리에서 12월17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중견 판화가들이 벌리는 <내일의 판화전>이 있다. 운현궁미술회관은 오랜 전통을 보여주는 한국화 모임인 <연진회전>을 12월10일부터 16일까지, 백송화랑은 12월 17일부터 <아시아의 바람과 흙전>, 동덕아트갤러리(T 732-6458)는 교수신문사가 주최하는 <5회 한국지성의 표상전>을 12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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