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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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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구-반복, 무의미, 쾌락


나무

심수구는 나무를 일정한 피부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보는 이의 시선에 정면으로 걸려들 때는 평면으로 보이지만 벽에 붙어서 바라보면 높이를 지닌 입체임을 확인한다. 그의 작업은 싸리나무의 잔가지를 횡단면으로 켠 토막들로 화면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심수구는 나무를 심는다. 뿌리가 잘리고 몸통에서 분절되어 나온, 토막난 줄기들이 일정한 크기로 잘려져 빈 공간에 꽂혀진다. 그는 대지에 심어져야 하는 나무를 평면의 틀 안에 가득 채워 넣는다. 빼곡히 사각형의 화면을 채워나간 이 나무는 나무이면서도 나무를 은연중 지워나간다.
일정한 평면의 피부 위에 자잘한 나무토막들이 직립으로 꽂혀있다. 나무 몸통의 단면, 잘려져 평면화 된 부분만이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둥근 원형이자 평면이다. 화면을 철저히 땅/지표로 여기고 그 위에서 실재하고 있다. 나무는 그렇게 기이한 대지에 뿌리 박고 서있다. 흡사 모심기를 하듯이 그렇게 나무들을 일일이 심어 넣은 것도 같다. 언뜻 보아서는 잘 가늠이 가지 않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다름 아닌 생생한 나무들이다. 치밀하게 채워진 이 나무 조각들은 일종의 공간 공포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쑤시개나 성냥개비, 밴드나 약봉지 같은 것들을 화면 가득 메꿔 나간 작업들은 보았지만 작은 싸리나무를 3cm정도로 잘라서 건조시킨 후 포르말린 처리를 해서 패널 위에 일일이 손으로 붙여나가는 이런 지독한, 엄청난 작업은 낯설다. 우선 수공의 혹독하고 집요한 노동의 시간, 수행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작업, 평면과 입체 사이의 경계에서 진행되는 회화적이면서도 부조적인 작업, 철저하게 물질만으로 물질의 실존과 물질체험을 통한 또 다른 연상과 감상의 자리를 확보해주는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다가온다.





작업공정

산이나 들에 있는 싸리나무를 낫으로 잘라 묶고 리어커나 자동차로 운반한다. 운반된 나무들은 6개월 정도의 건조시키는 기간이 필요하며 보통 작품에 필요한 길이(3cm정도)로 잘라서 건조시킨다. 자를 때는 작두로 잘랑 나무 면이 깨끗이 되므로 조금씩 손으로 수작업을 하게된다. 잘 건조된 나무는 나무벌레 퇴치용 약품(포르마린)을 처리하게 된다.(포르마린은 장롱등 목공예 제작 때 쓰이는 약품)
이렇게 작품제작용으로 짧게 자르고 말린 나무들은 쌀자루 포대기에 넣어지는데 여기까지의 과정은 모두 야외에서 진행되며 마당과 창고가 있는 작업장에서 하게 된다. 포대기에 넣어진 나무들은 실내 작업실로 운반되어 본격 작품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판넬 위에 손으로 하나 하나 붙여 나가는 수작업으로 작품은 이루어지는데 나무를 붙이는 본드는 목공용 나무본드를 사용하게 된다. 불에 태운 작품이나 색채처리를 하게 되는 것은 붙이기 전에 하나하나 처리하여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작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마지막으로 벌레나 곰팡이 제거용으로 투명 락카 처리를 하게 된다.
나무 작업은 사용할 나무를 고르고, 원하는 길이로 자르고, 말리고, 변색을 방지하는 공정을 거치는 것에서 이미 시작된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마련된 토막을 마치 일상처럼 하나씩 하나씩 붙여가면서 우연의 사건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무는 물질이다. 우리 삶의 환경을 이루는 것이 흙이고 돌이고 물인 것처럼 나무도 하나의 물질로서 삶의 토대를 형성한다. 나무라는 삶 속에 돌이나 꽃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생겨나고 그것들로 인해 이야기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그가 주로 사용하는 싸리나무는 예로부터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있었다. 자연스레 우리 삶이 되어있었다. 초가집의 울타리도 되고, 마당을 쓸어주는 빗자루도 되어 드러나지 않게 우리네 정서 속에 녹아 있는 바로 그 나무다. 무엇보다도 이 싸리나무는 작업을 하기에 알맞은 곧기와 부피를 가지고 있기에 즐겨 사용된다. 혹은 그와 비슷한 복숭아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등을 섞어 쓰기도 한다.
그는 우연히 시골의 처마 밑에 쌓아든 장작더미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자연스레 이뤼진 장작더미와 돌탑의 형식미로부터 어느 정도 그 계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처음에는 옆으로 붙여나가기를 하다가 쌓여진 장작더미의 모양새에서 착안하여 현재의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 비록 하잘 것 없는 나무토막들이지만 그것들이 수없이 많이 모였을 때 새롭고 큰 함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본 것이다. 작가는 나무토막을 하나의 물질 그 자체로 본다.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시선으로 나무토막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하잘 것 없는 물질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물질들은 마치 반복적인 호흡이나 걸어 다니는 걸음걸이처럼 일상에서 미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 모여서 삼라만상을 이루며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작가는 보고 있는 것이다.





조각적 회화

반복과 집적의 구성이나 거대한 스케일을 극히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고려한다면 미니멀리즘의 공공적인 사이트 스페시픽한 작업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모아진 오브제의 구성은 관객의 시야를 확장해 이전 미술작품의 시각에 전격적인 도발을 보여준 미니멀리즘의 스케일과 유사하다. 구성면에서 미니멀리즘의 주요 특징은 작품 내부 요소들간의 관계가 상하좌우 그리고 전후로 거의 없거나 일정하게 제한된다. 그 제한이라는 것은 수학적 구조 방식에 근거를 둔다. 주로 사용된 수학적 구조 방식은 모듈적 방식과 연속적 방식이다. 모듈적 방식은 같은 크기의 단위적 형태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연속적 방식은 같은 형태를 반복하기는 하지만 그 형태의 크기나 위치 등을 일정한 규칙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형상과 배경의 관계가 설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니멀리즘은 또한 예술 장르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래서 조각적 회화가 등장하기도 하고 회화적 부조나 벽면조각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경계의 파괴는 모더니즘 정신에 위배되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과 맞닿아있다.
미니멀리즘은 작품의 의미가 작품의 바깥에서 결정될 여지를 열러놓았고 따라서 감상자는 작품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물리적, 심리적 위치에 따라 작품의 의미를 구성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심수구의 작업 또한 관객의 시선과 신체가 일종의 가늠자가 되어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과 관객의 거리가 변하며 그 거리에 따라 작품의 이미지와 전시장의 관계가 끊임없이 변한다. 감상면에서 미니멀리즘의 특징은 작품 내부의 구성요소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주변환경에 감상의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데리다의 ‘차연’개념을 통해 확립된 해석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견해를 연상시킨다. 작품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나 작품 내부의 형식적 구조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미니멀리즘과도 겹쳐지는 부분이다.
심수구 역시 작품이 놓인 위치, 감상자의 관람 위치, 벽이나 천장과 같은 다른 구조물과의 관계, 조명 등이 감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이러한 미니멀리즘 조각의 현상학적 논리를 공유하면서도 결정적인 균열을 부여하는 데 바로 보는 이의 기억과 시간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보다가 거리가 멀어질수록 지금까지 보았던 기억들이 지워지고 기억이 가물거리면서 또 다른 낯선 상황이 전개된다. 종국에는 무수한 점의 진동으로만 감지된다.





반복

나무작업은 반복과 차이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오고 있다. 개체들간의 개별적 차이가 존재하는 반복(쌓여짐)은 식상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변화하고, 또 어느 것 하나도 두드러진 의미를 가진 것이 없이 중심과 주변이 없이 그렇게 하나로 어우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작업을 할 때 조형적이거나 개념적인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걸어가듯이 숨을 쉬듯이 그냥 그런 과정 중에 일어나는 사건과, 일어날 지도 모를 돌발적 우연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차이와 반복으로 모여지는 전체가 되는 그의 작업은 결국 의미 없는 하나 하나가 모여 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진 전체 또한 지시되는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이 반복은 원본성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한 의도적인 무의미에 해당한다.
화면은 일종의 소단위(모나드, 단자)들로 축조된 집합의 한 형태를 만들어 보인다. 집합은 어떤 소재를 쌓는다는 행위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무수한 시간이 누적되어 물질을 쌓는다는 것은 동어 반복적인 자기나열과 등가를 이루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내용을 배제한 순수한 형식미 또는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행위 자체에 도달하려는 모더니티의 실현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인식된다. 반면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차이, 다름(굵기, 색깔, 모양 등)이 균질한 피부 속에 은닉되어 있다. 동어 반복적인 자기나열 곧 동일자의 논리의 이면에는 비동일자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화면을 만들고 채워나가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동일한, 혹은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이접적 관계로 짜여지면서 파생하는 우발적 사건들을 하나의 사태로 다큐멘트화 하고자 한다. 나무라는 물질은 화면에 붙여 나가는 시간 가운데서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건들과 조우하면서 일종의 ‘사태’(affair)들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에 나타나는 수많은 나뭇가지가 반복과 차이를 통해 지어내는 의미작용의 복수화 과정은 실은 단일한 의미, 주제, 이야기구조를 지우고 해체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오랫동안 예술에서의 반복행위란 곧 원본성(originality)의 결여를 의미했다. 그것은 부정적이며 치명적인 것이었다. 반면 작가는 원본성의 부재 증명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반복한다.









나가는 말

나로서는 이 작가가 오랜 시간을 자연과 함께 보낸 삶의 체험과 자연관의 짙은 그늘들이 이러한 작업세계로 나가게 한 것 같다. 동시에 이미 70년대 초부터 당시 한국현대미술운동의 주된 이슈였던 단색화, 입체, 개념미술, 물성, 일루젼 등등에 대한 일련의 모색과 방법론의 추구 속에서 형성된 미술관이 여전히 강고하게 작업세계를 규정하는 척추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면 동양적인 자연관과 70년 대식 현대미술논리가 만나 지금의 작업을 형성한 것 같다. 관념이나 사유의 자리에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이 채워져 있고 그 하찮은 물질들이 모여 세계, 사물을 이루고 그로인해 철학이나 사상도 가능하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울리는 듯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나무 조각들을 채워 넣어 만든 화면에 슬쩍 슬쩍 장난 같은 제스처를 가미해 그것을 어떤 풍경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물성만이 적나라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이야기에 대한 갈망, 서술적인 문맥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는 그렇게 나무 조각들을 가득 채운 화면에 돌을 끼워 넣거나 지점토로 또아리를 튼 뱀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부분부분을 태워서 시커먼 자국을 남겨놓기도 하고 다른 종류의 나무를 집어넣고, 높이를 달리해 환영을 만든다. 자연의 한 장면이 갑자기 연상되다가 이내 나무의 물성을 확인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다가 또 다시 일정한 거리의 확보 속에 출몰하는 그런 기이한 장면들이 번갈아 출현한다. 환영과 실재 사이에서 놀이하는 작업이다. 기억과 망실이 교대해서 줄을 잇는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보는 이의 시간과 거리를 요구한다. 유머스럽기도 하고 소박한 장난끼도 들어있다. 아마도 나무 조각들을 가지고 노는, 그런 놀이적 체험이 상당히 강하게 검출된다. 사실 작업이란 작가가 어떤 물질들과의 행복한 만남, 놀이, 자기 감각의 물질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체험은 이번 작업에서 놀라울 정도로 만끽된다. 그런가하면 그의 작업은 철저하게 순간에 몰입한다. 전체적 형태 속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부에 탐닉하고 현재의 쾌락에 몰두한다. 엄청나게 많은 자잘한 나뭇가지들을 만지고 붙여 나가다 보면 종국에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조차 망각된다. 이념, 사상, 거창한 논리, 개념이 불식되고 지워지고 오로지 헛되고 소모적인 시간과 노동으로 메꿔진다. 그것은 기존에 작업과 관련된 모든 틀들을 해체한다. 전복한다. 심수구의 작업을 무겁게 보자면 그런 전복적 사고가 드리워져있다. 하나의 명료한 언어나 형태를 향한 매진이 아니라, 현재 속으로의 무한한 침잠이며 쾌락의 추구이다. 여기서 무수한 세부들은 각자가 모두 독립된 작업이며, 이 무수한 작업의 단편들은 비유기적이고 통합되지 않은 무한한 병렬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우연적이고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무의미와 수고로운 노동과 순간의 쾌락이 역설적으로 상투화되고 관습적인 미술의 틀들을 유쾌하게 모반해나가는 것이다. 나로서는 심수구의 작업의 핵심이 바로 이 지점에 놓여있다는 생각이다.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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