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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백년, 인사동 라인에 서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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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개요
전  시  명 장욱진 백년, ‘인사동 라인에 서다展’
장      소 인사아트센터 제1전시장(B1) - 제3전시장(3F)
주      최       가나문화재단,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일      시 2017. 7. 24 (월) – 2017. 8. 27 (일) 
오  프  닝       2017. 7. 24 (월) 오후 5시
출품  작품 장욱진 유화 및 먹그림 100여점, 최종태, 윤광조, 오수환 3인의 조각, 도자, 평면 40여점


전시 내용

 가나문화재단은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욱진 탄생 백년’을 맞아 그의 예술혼을 시대적으로 분류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장욱진은 서양화가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1990년대 현대 미술이 번성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적인 소재와 주제로, 소박하며 단순함과 절제미의 조형단어로 서정적 이념을 표현한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어 그의 예술정신을 따르던 후배작가 3인 최종태, 윤광조, 오수환 작가의 작품세계와 함께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자 위대한 화가였던 장욱진의 삶과 예술세계를 되짚어 보면서 그의 백년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가족_19.3x22.7cm_Oil on canvas_1975



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지금은 세종시 연동면인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에서 났다. 경성사범 부속초등학교 시절에 ‘전일본소학생미전’에서 일등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30년 경성 제2고보에 입학하지만 일본교사의 왜곡된 행동에 항의한 끝에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림 공부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집안 어른의 질책을 받아 수덕사(修德寺)에서 정양을 해야만 했다. 거기서 만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1886-1948)으로 부터 “좋은 화가가 되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스무살이던 해에 겨우 양정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고,  바로 얼마 뒤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집안 어른의 후원을 받아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당시 일본 미술계는 서양미술이 대거 유입된 여파로 인상파류 그림이 횡행되는 사이로 일본화풍이 강조되는 시절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일본미술을 습득하기 보다는 스스로 책과 미술관 자료 등을 통해 서양화 본방의 추세를 독학하려했다. 그 결과, 고향에 대한 향수로 한국적인 것 곧 민화풍으로 자신의 표현 의지를 담아내려했다.

유학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취직을 하지만 2년 후 사직하고 창작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짧은 교수생활을 지내고, 국전심사위원으로 위촉되지만 사회적인 명성을 뒤로 했다. 백우회와 신사실파 그리고 앙가주망 동인으로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공적인 활동 없이 창작에 전념해서 생전에 아홉 차례 개인전를 열었다.


소_15x23cm_Oil on canvas_1953


장욱진의 작품은 까치, 가족, 새, 나무, 마을, 아이 등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순수함과 선함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초연한 예술세계를 정립하였다. 이런 소재들은 시대가 변하여 화풍의 변화가 있다 해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바라보는 시각적인 전경의 향토적인 풍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몸과 마음을 체험하고 느낀 정서가 응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장욱진 화백의 곁을 지켜준 가족과 아이 그리고 자연 등은 그의 삶 자체이며 자전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심플하다’라는 작가의 말은 단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대상의 생명의 본질로써 환원하는 과정이며 상징적 형상의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련미를 나타낸다. 장욱진 작품의 모티브는 자연적이며, 상징적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모든 요소가 압축되고 요약된 시적이며, 정적인 세계라 볼 수 있다.



무제_26.7x21.3cm_Oil on canvas_1979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세계를 화가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덕소 시절 (1963-1975), 명륜동 시절(1975~1979), 수안보 시절(1980~1985), 신갈 시절(1986~1990)의 네 시절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크게 네 차례 아뜰리에를 옮기면서 그만의 유토피아를 형성해 나갔으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성향도 달라지는 작품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장욱진의 화풍으로 말하자면은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는 향토성 짙은 소재를 주관적으로 형상화 하였으나 1950년대 이후부터는 원시 미술이나 고분미술에서 볼 수 있는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

이후 1960년초 덕소시절은 6.25 전쟁 이후,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스스로 방식을 찾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다. 마티에르의 질감을 비교적 강렬하게 표현하며 사실적인 형상을 통해 향토성을 뛰어 넘어 이상적이며 평화로운 공간을 표현하였다.

서울 명륜동 시절의 색상은 더욱 간결하고 선명하며 강한 평면성을 보이는데, 화면의 단순미가 더욱 도드라지며 기하학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색 층이 점차 얇아지고 수묵화처럼 물감의 느낌이 묽어지기 시작하며 수묵으로 캔버스 위에 그리는 ‘먹그림’을 시도하며 수묵화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이후 수안보시절은 명륜동 시절의 영향으로 일필휘지로 단번에 그어 내거나 묽고 스며들게 처리하는 등 초기의 마티에르가 강렬한 느낌과는 달리 더욱 담담하고 소담하게 표현하였다. 고정적인 성격을 보이던 형상들은 먹과 모필에 의한 일필로 나타나며 자유롭고 편안한 공간배치를 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으로 변모한다.


겨울_호도_36.5x26.5cm_Oil on canvas_1982


장욱진은 화면의 도상들을 자유롭게 변화시키고 간략하게 단순화 시킴으로써 견고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마지막 신갈시절은 작가의 마음의 평온함과 작업의 확연한 방식을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정신적인 해방감을 반영한 듯 자유롭고 편안한 선염기법의 화풍이 돋보인다. 신갈시기는 선으로부터 벗어나 사상적 구상과 색채의 조화가 이루어진 장욱진 화가의 화풍이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욱진 화가의 먹그림도 함께 소개된다.

“그림에 동서양이 있을 수가 없다”는 그의 말은 수묵화를 ‘먹그림’이라 부르며 유화와 함께 작업했다. 그의 먹그림은 오랜 유화작업을 통해 다져지며 그려온 형태들이 일휘필지의 순발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어 그려졌다. 먹물의 농담과 붓의 움직임, 결의 모양에 따라 모필의 일회성을 표현함으로써 장욱진 화가의 특성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작가소개

장욱진 (張旭鎭, 1917-1990)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2세대 서양화가에 속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몸을 온통 새까맣게 칠하고 눈만 하얗게 그린 까치로 최하점수를 받았으나 일본인 미술선생의 배려로 까치 작품을 “전일본소학생미전”에 출품하여 1등상을 받는다. 그는 부상으로   수여된 유화물감을 가지고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1937)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였고, 1939년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길로 들어선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54-1960)로 일하였으나 6년 만에 작품창작을 위해 스스로 그만두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동화적이고 심플한 선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선보였다. 1963-1975   덕소, 1975-1979 명륜동, 1980-1985 수안보, 1986-1990 용인 마북리의 화실에서 작품활동을 하였고, 1990년 12월 27일 74세로 선종하였다. 장욱진은 “나는 심플하다”라는 그의 말대로 체면과 권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평생을 아이, 어른 모두 좋아하는 단순한 그림을 그렸다.




무제_28x21.5cm_Oil on canvas_1986




장욱진 백년, 인사동 라인에 서다 
김형국 |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한해 계획은 농사짓기에 십년 계획은 나무 심기에 그리고 백년 계획은 인재 키우기에 있다 했다. “백년 인재”라니, 비록 백세시대이긴 해도 아니 수명의 장단(長短)과는 관계없이, 그 인덕(仁德) 그 예덕(藝德)이 백세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올해는 장욱진 탄생 백년이다. 그는 비록 일흔 몇 해 이승을 살다 갔지만 그의 예술정신이 우리 현대사회에서 줄곧 높이 평가 받아왔음에서 진정으로 인생 백년을 이룩한 경우라 할 것이다.

나는 장욱진 평전도 적은 사람이다. 『그사람 장욱진』(김영사, 1993),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열화당, 1997)인데, 두루 좋은 평가를 받았다. 훌륭한 서평도 나왔다(“여기 진실한 두 인간이 있다,” 『20대에 읽어야 할 한 권의 책』, 2005). 

그런데 화가의 성취를 책으로 말하는 것은 그건 달을 보라 했는데, 달 대신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을 잡고 왈가왈부하는 꼴이기도 하다. 장욱진 탄생 백년을 기념하는 이번 가나문화재단 전시는 한마디로 화가의 달덩이    같은 그림을 바로 보여주려 함이다. 마침 전시장의 지덕(地德)도 “내 라인은 인사동!”이라며 생전에 명륜동   집에서 이곳을 오가며 풍물을 즐겼던 장욱진의 행적을 기억하기에 맞춤하다.

장욱진 그림의 미덕은 우리의 과거와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음이라는 게 내 감상평이다. 우선 전통시대, 농경시대의 우리네 목가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끼를 많이 낳은 돼지, 아침을 알려주는 닭, 농사일의 기둥인 우공(牛公)이 오가는 정경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그만큼 추억의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그 한편으로 자연과 하나 된 도인들이 화면에 계속 등장한다. 거기에 부처의 경지에 다가간 개도 도인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다. 비록 전자정보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고 장차도 그럴 것이란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완성은 결국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에 있을 것임이 분명한 이상, 그 경지를 장욱진이 앞서 그려 보여주고 있다. 

장욱진은 일본유학 제 3세대에 속하는 화가다(오광수, “박고석과 그의 시대,” 『박고석과 산』, 2017). 1910년대에 일본으로 갔던 1세대는 서양화의 경지에 제대로 들지 못하고 모두들 중도하차했다. 그 2세대는 프랑스 유학 일본유학생들의 화풍을 따라 그리는 게 고작이었다. 

집안이 바로 서자면 삼대 적공(積功)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삼세번’이란 말도 있다. 1930년대에 일본으로 유학했던 3세대에 이르러서야 우리 화학도(畵學徒)들이 그림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우리 현대미술사에 독자적 화풍 정립해준 전위들이었다.

그 대열에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장욱진이 있었다. 이들은 “그 사람에 그 그림”이란 옛말대로 높은 인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하늘에 살았던 신선이 발을 잘못 디뎌 지상으로 잠시 내려왔던 사람들이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와서 닿는 그런 위인들이었다. 그들이 미술에 바친 열정이 거름이 되어 오늘의 우리 현대회화가 국민들의 사랑이 될 수 있었다. 

이들 유명 화가들은 그들의 예술세계를 담박에 대변해주는 말하자면 대표작들이 있다. 그런 그림이 어느 화가보다 많다는 점이 장욱진의 경우이지 싶다. 그의 탄생 백년에 확인된 바로 자화상(나락밭), 진진묘, 모기장,   가로수, 까치 등 우리에게 언제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림들이다.

장욱진 백년은 장차 또 다른 백년을 예비한다. 장치의 백년을 당신이 많이 그렸던 나무에 비유하고 싶다. 우리나라 높은 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했는데, 장욱진의 예술세계 나무도 장차 백년을 우선 기약하고 있다고 올 2017년, 장욱진 백년을 맞은 우리의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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