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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008 미술계에 바란다

강태희

새해 초에는 희망과 덕담이 넘쳐나고 연례행사처럼 개인적인 다짐과 맹세도 어김없이 되풀이 된다.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인위적인 매듭을 짓고 타성의 사이클에 작은 충격과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도 판을 다시 한 번 깔아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의 지혜일 터이다. 마침 이 시점은 우리네 일력으로는 양력과 음력의 시차로 공식적으로는 2008년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심정적인 진짜 설이 아직 오지 않은 특이한 겹치기 시간대에 속한다. 한편으로 나라에서는 곧 들어 설 새 정부가 정치·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기도 해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문자 그대로의 과도기이자 겹치기의 시대이다.


그런데 이런 거국적인 공과 사의 구분 또는 그 이중성의 과도기는 이점이 있어 보인다. 연초 이래 이미 허물어진 개인적인 맹세를 다시 한 번 추스르는 계기가 되고 해가 바뀌기 전에 완결하리라 작심했던 일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이중성은 공사의 구분이 허용되는 모호한 시기이기보다는 최종 마감을 연기하는 일종의 유예이자 축복의 시간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뇌리에서 많이 지워졌지만 2007년도 미술계를 대변하는 단어들은 부정적인 것들로 점철되었다. 그들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다짐과 기원이 안타깝게도, 새해 벽두부터 박수근 위작 시비로 시끄럽다. 이 사건은 문제제기를 한 측에서 미술품감정 위원회의 감정결과를 승복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과학적인 감정이 필요하다는 개인의견까지 제기되어 결국 법정다툼으로 번질 모양새이다. 물론 위작시비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늘상 있어 왔던 일이고 렘브란트의 경우처럼 유명작가나 고가의 작품일수록 더욱 빈번하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법이다. 명성이 자자한 세계적인 미술관의 소장품도 이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진실을 밝히는 양심선언이 폭발력을 지닐수록 최후의 판정은 어려워지고 유보되는 경향을 띨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위작여부는 아니지만 보다 끈질기게 진행되는 고전적인 케이스는 세익스피어의 정체성 시비일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신 동시대인인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의 모든 작품을 썼다는 그럴싸한 ‘썰’은 그 자체가 ‘고전’이 된지 오래고, 최근까지도 그의 정체성을 다룬 서적과 영화가 줄을 잇고 있다. 최근 한 일간지에는 ‘진짜냐...가짜냐...그것이 문제’ 라며 그 유명한 햄릿의 독백을 패러디한 제목의 기사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당선인이 특검의 대상이 되어있는 기이한 상황을 맞고 있지만 이 역시 기존의 수사발표를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기에 제도권에 대한 신뢰 문제에서 박수근 파동과 닮은 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 불신이 싹터있다면 그 어떤 공적인 판결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성역이었던 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헌재의 존재가 익숙해지고 그 판결과정이 낱낱이 공개되면서 지금은 헌재 역시 사람의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그렇기에 최고심급의 어떤 결정도 심정적으로 승복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박수근의 <빨래터> 매듭이 필요하다

나는 몇 년 전에 1년여 동안을 미국과 일본에서 지내고 귀국한 경험이 있다. 돌아온 직후 한동안 우리나라의 뉴스를 보면서 크게 놀란 것은 외국의 사회면 뉴스가 살인, 강도 등에 치중되어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사기사건이 훨씬 많이 보도된다는 발견이었다. 두 나라는 우리보다 사회규모가 훨씬 크고 사건사고도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범죄 발생빈도와 보도 사이에 어떤 수적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 이런 현상을 문제시하든 개선의 필요를 역설하든 진짜 가짜 시비가 상대적으로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박수근 화백의 큰아들은 근자 <빨래터>는 분명한 부친의 작업이라는 의견서를 한 일간지에 보냈다. 작년에 이중섭 위작 시비를 거친 기억이 생생한 우리 미술인들로서는 이제 아들의 증언까지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 일방의 주장을 지지하기 보다는 모든 시시비비들이 합리적으로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지만 크게는 당선인이 재검증을 앞에 두고 있는 나라 현실이나 작게는 새해를 이어지는 위작시비로 여는 미술계나 하루빨리 사태를 매듭지어 더 이상 진위 논쟁으로 귀중한 시간과 열정을 소모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희망이다. 이들이 양력과 음력 사이의 과도기 안에 해소되어 말끔한 기분으로 다시 한 번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강태희(1947- )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미술사 박사. 서양미술사학회 학회장 역임. 현 한예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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