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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천과 천을 이어 캔버스로 사용한 작품

김광섭

우리나라가 오늘날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한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고 수출은 4,7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날을 되돌아 보면 우리도 어려운 때가 있었다.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민족에게 정신적·재산적 큰 상처와 피해를 주었다. 사회전반의 시설이 파괴되고 어려움 속에 있었다. 미술에 종사하는 직업도 대단히 생활하기가 곤란했다. 피난시절 화가들은 남하하여 임시 수도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부산은 남한 미술의 중심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생과 사를 넘나들던 혹독한 피난시절 화가들은 참담한 굴곡의 삶을 영위하며 작품활동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그리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였다. 혼란한 와중에도 화가들의 전시회는 계속 개최되었다. 문제는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캔버스와 물감 등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세계에서 최빈국 중 하나였다. 국민당 1인 소득이 100달러 이하였다. 굴욕적인 일제 36년 치하에서 우리나라는 자원과 식량을 약탈당하고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지로만 사용하고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기반시설은 전혀 없었던 때이다.



그림들은 대부분 소품으로 제작되었다. 캔버스로 대용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원조물자의 포대자루를 잘라 사용하였다. 밀가루, 쌀자루, 군용텐트를 캔버스로 사용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좀 크다 싶으면 포대자루를 이어 사용하였다. 우리 연구소에 이러한 그림이 간혹 수리 의뢰가 들어와 수리하곤 했다. 소개하는 미술사학자 이성미 선생이 서울대 시절에 그린 그림(사진)도 여러 조각의 천을 이어 제작한 그림이라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 사진의 작가의 제작에 대한 글을 인용하면 “1960년 필자를 포함한 많은 화학도(畵學徒)들이 비싼 유화용 캔버스를 사서 쓰는 대신 각자가 재량껏 만들어 사용하였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미군용 모래 포대를 사다가 실을 뜯어 평면으로 만들고 그리고자 하는 크기에 따라 재봉틀로 이어 큰 헝겊을 만드는 일까지 필자의 몫이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생활환경과 작업여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훌륭한 작가들의 그림을 미술을 사랑하는 많은 애호가들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보존되어야 할텐데. 천을 이어 제작된 그림들 중에 오래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작품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더러 있다. 물감층의 균열이 심하고 천이 열화한 경우 새 캔버스로 전체를 지지 보강하여 양호한 상태로 오래도록 수명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천을 이어 제작한 작품은 화면에는 이은 표시가 나타나지 않으나 작품의 이면은 재봉틀로 이은 천과 천이 불쑥 나와 있다. 이 작품(사진)은 화면이 찢어지고 뚫린 부분에 부분적으로 보강했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는 물가가 오르고 아랍권 산유국의 민주화로 유류가가 올라 서민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미술활동하는 대부분 작가들의 작품이 거래가 원활치 않아 생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들이 미술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하여 먹고 사는 생활에 걱정 없이 오직 작품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는 따뜻한 봄날은 언제 올 것인지 그날이 마냥 기다려진다.



김광섭(1954- ) 숭실대 환경공학 석사. 서울시립미술관 미술품보존수복연구원, 일본 동경예대 대학원 객원연구원 역임. 현 김광섭미술품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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