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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나혜석의 <별장>을 들여다보며

강종권

100년 전 근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전업 화가였던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그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박래경 선생은 그녀가 생전에 400여 점이 족히 되는 작품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현존 작품 중에 8점만 진품이라고 말한다. 그 8점 가운데 <별장>(1935, 뮤지엄 산 소장)이라는 제목의 캔버스 유화작은 나혜석의 절정기에 그려진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채색 물감을 두꺼운 붓질로 겹겹이 쌓아 윤곽을 뚜렷하게 한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된 <별장>은 이국적인 건물을 화면 중앙 전면에 배치한 풍경화다. 이 작품의 특징은 건축물 외형의 선명한 윤곽 처리, 원근에 따른 유기적 공간감, 짜임새 있는 구성력 등을 들 수 있다. 다갈색 벽돌 건물은 유럽식 저택처럼 생소하지만, 건물 뒤 배경이 되는 산의 형세가 꽤 낯익었다. 화가의 단일한 시선에서 대상을 포착해 사생(寫生)한 그림이겠으나 어쩌면 예기치 않은 혹은 화가의 의도적인 개입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 더 치밀하고 신중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나혜석, 별장, 1935 ⓒ 뮤지엄산 소장


종로구 옥인동 일대는 빼곡하게 들어선 다가구 주택으로 시야가 막혀있지만, 작품의 모델이 된 별장터를 찾을 수 있었고, 88년 전 활터인 백호정 언덕에서 그렸음을 어렵게 추측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나혜석은 왼편 거대한 인왕산은 풍경에서 제외하고 멀리 있는 보현봉(714m)과 문수봉(727m)을 눈앞으로 당겨 그리면서 중앙의 송석원(松石園)과 오른편 북악산(342m) 기슭을 서양화 도입 시기의 공통된 기법인 일점투시법과 색채원근법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최초의 유럽식 건물의 주인은 누구이며 나혜석은 왜 그린걸까? <별장>의 모델인 벽수산장은 대한제국 옥쇄를 일본에 넘긴 매국노 윤덕영이 은사금으로 사들인 옥인동 절반에 해당하는 부지에 프랑스 귀족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지은 저택이다. 완공 시기 『동아일보』(1921.7.27)는 “세상 사람은 이 아방궁(阿房宮)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온지 그 까닭을 더 이상히 생각한다.”라고 꼬집기 시작했고 『조선일보』(1926.5.23, 1926.5.31)와 『동아일보』(1966.4.5)의 화재 소실 기사에도 줄곧 ‘별장'으로 지칭된다.



옥인동 47번지 벽수산장 ⓒ 사진: 서울 육백년


나혜석은 익선동에서 당시 창성동에 진명여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5개월을 제외하고 교사로서 운니동에서 연지동에 있던 정신여학교로 출근했으며 인사동 신혼집에서 임신한 몸으로 매일신보사(現 연합통신사)에서 첫 전시를 했다. 중국 안동 근무와 세계여행 후 1930년 11월 20일 이혼을 하면서 수송동 일본식 목조 건물 2층에 미술교육기관인 여자미술학사(現 OCI미술관)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렸다. 아나키즘과 유미주의 기치하에서 인왕산 기슭의 벽수산장을 오랫동안 지나쳤던 전업화가는 제목을 <별장>으로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밝아진 색채에 넓은 붓질로 잘 표현된 <별장>은 언제 그려졌을까? 나혜석이 재기를 꿈꾸며 근작 소품으로 준비한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의 대규모 전시(1935.10.24)는 초라한 판매로 인해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 전시를 준비하며 희망에 한창 부풀었을 나혜석에게 ‘송석원이 가을빛으로 울긋불긋 물들었다’며 『조선일보』(1935.9.22) 기사로 담은 벽수산장의 가을풍경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것 같다. 건물 주변을 붉힌 가을 단풍과 벽수산장(碧樹山莊)이란 이름처럼 푸른 상록수를 두른 풍경은 1935년 9월쯤이 아닐까? 화면 안의 명암과 색채의 변화를 고려해 보면 오후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듯하다.


- 강종권(1955- ) 고려대 및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LG생활건강 근무, 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겸임교수 역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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