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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김영덕의 <인혁당의 사람들>

박영택


김영덕, 인탁-인혁당의 사람들, 1976, 마포에 유채, 130.3×130.3cm


지난 4월 3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1975년 유신독재정권의 악명 높은 사법 살인 사건인 ‘인혁당 사건’ 희생자를 기리는 4·9통일 열사 4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그야말로 조용히, 조촐하게 치러진 행사였다. 인혁당 사건이란 우선 1964년 8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 사건’(1차)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2차)으로 나뉜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자 재야세력은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고 이에 맞서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이 조치에 위반한 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했다. 당시 1974년 4월 3일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에 의하면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고 규정되었다. 이후 1974년 4월 25일 1차 인혁당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정부 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고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으며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다음 날 4월 9일 형을 집행하였다. 채 20시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죽은 이들은 거의 30대에서 40대의 나이였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 사건은 유신 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하였고,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2005년 12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와 인혁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조작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재건위 사건’ 희생자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김영덕의 1976년 작인 이 그림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이 <인탁-인혁당의 사람들(숙부의 초상)>이다. 당시의 압제적인 독재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망자들에 대한 애도와 비애의 감정을 진하게 담고 있는 그림이다. 그는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여기거나 이미지 자체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 시키고 있다. 그에게 그림은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겪는 모든 상황에 대한 언급, 비판적 언술이자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드러난 사상이 되는 셈이다.

그림은 몇 개의 층위로 구분되는데 화면 상단은 눈부시게 하얀빛으로 물든 공간에 흰색의 한복을 입은 망자들이 이제 막 산 자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설핏 보여준다. 화면 중앙은 십자가 책형을 당한 예수의 몸을 연상시키는 양쪽으로 벌려진 팔, 손바닥에 꽂힌 못과 시뻘건 피가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다양한 얼굴, 표정, 팔들이 방사형으로 확산되고 있다. 화면 우측 하단에는 군모(철모)가 봉분처럼 솟아나 있다. 슬그머니 배치한 이 카모플라쥬 문양의 철모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핵심을 지시하고 있다. 잘 짜인 문장 같은 그림이자 다양한 의미소들이 공간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그림으로 개성적인 형상과 강렬한 색채, 역동적이고 긴장감 어린 화면 구성에서 힘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미술인 대부분이 서구의 전위미술이나 단색조회화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이 참혹한 사건을 형상화한 이가 바로 김영덕(1931- )이란 작가다. 그러나 이 그림을 기억하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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