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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유지영, 서로 얽히며 비분별적으로 확장하는 시공

박지형


유지영 작가 ⓒ 제공 박지형


인간과 우주의 거리는 얼마인가? 우리는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매일을 살면서도 행성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감각할 수 없고, 옆에 놓인 컵에 채워진 물을 이루는 분자 구조를 머리로 이해한들 적합한 장치 없이는 그 움직임을 지각할 수 없다. 세상을 이루는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축은 때로 너무 가깝거나 무한히 멀다. 이 촘촘한 토폴로지 어딘가에 작가 유지영의 시선이 머무른다. 문명이 만든 유무형의 틀이 인류의 이성 작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질문한 작업 초기, 그리드·달력·서랍·숫자·측량의 단위는 컨텐츠를 담거나 한정하는 그릇으로서, 분절된 이미지 조각이 그의 작품 안에서 연쇄적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주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여러 사물의 용도를 무화하거나 틀 안의 내용물을 교체·삭제·반복하는 전략이었다. 기능을 소거 당한 대상은 명확한 논법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작가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그 위치와 용도를 바꿀 수 있는 여지를 얻었다.

작가의 최근 관심사는 인위적이고 규칙적인 것에서 더 불연속적인 자연의 영역으로, 지구 바깥의 별들로, 은하계로, 우주로 옮겨가고 있다. 그의 사유는 인간의 언어와 체계로 충분히 포괄하거나 일반화할 수 없는 자연의 힘, 그리고 그 속에서 신체가 인지하는 시공 간의 낙차 속으로 들어간다. 이 메타적인 시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에서 발동한 것이다. 촘촘하게 짜인 일정과 계획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던 작가는 문득 자신을 움직이고 사고하게 하는 준거가 얼마나 한정적인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자각한 듯 보인다. 시점과 길이, 무게가 상이한 시공의 층위가 부딪히거나 엇갈리며 각자의 리듬대로 움직인다는 자명한 사실은 그의 작업 방향타를 비트는 계기가 된다.



Long-Distance Relationship_Good Morning, Good Night, 2023, 자작합판에 유채 및 아크릴릭, 61×68×80cm


그는 이제 마디로 구분된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빈틈을 파고드는 상상력의 발화에 조금 더 집중한다. 여기에는 여전히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이 관여한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변화하는 해안선과 모래의 굴곡, 지구의 풍경을 펼치거나 축소한 지도와 지구본, 연약한 시곗바늘의 불규칙한 떨림. 열거한 대상은 작가에게 자연의 비연속성과 광활함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장치다. 그리고 작가는 나에게서 떨어져 있는 위치의 감각과 지금 여기의 풍경을 하나로 연결하는 매듭을 짓는데 이 소재를 활용한다. 눈 앞에서 파도거품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매분, 매초의 일상은 그의 작업 안에서 접히고 구부려진 원형 시계의 모습을 띤 부조가 되고, 다른 시간대에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은 물리적 고리와 자물쇠로 연결된 표준 시간대의 형태로 거듭난다. 인위적인 수치와 기준들로 쪼개어져 있던 각 순간들은 그의 작업 속에서 여러 문장을 함축한 시의 한 구절처럼 은유적인 존재가 된다.

인류는 시간과 공간을 객관화하기 위한 과학적, 수학적, 공학적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 무수한 노력 아래에 영원히 규격화할 수 없는 드넓은 우주를 향한 욕망과 불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새로운 시스템과 원리가 고안되어 삶에 적용된다. 그러나 작가는 결코 이 얼개들이 만물의 시점을 모두 아우를 수 없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그는 언어로 미처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곧 현실을 구성하는 부분임을 어렴풋이 지각하는 듯하다. 필연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 너무나 작아 발견하기도 어려운 우연이 겹친 결과이며, 그것이 나의 하루를, 한 달을, 1년을, 삶 전체를 만들어간다. 내가 아닌 타자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으며, 비인간 존재들의 생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셀 수 없이 많은 별의 마주침과 헤어짐, 탄생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매끈한 선형으로 다듬어져 그 이음매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의 표면적 가치 너머에 감춰진 차원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일. 만약 이것이 유지영의 조형 언어가 궁극적으로 가닿고자 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가 하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다차원적 여행에 동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유지영(1991- ) 홍익대 회화과 및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슬레이드 미술대학 졸업. 기체(2023), 리움미술관 룸프로젝트(2022, 서울), 디스위켄드룸(2021), 전시공간(2019), 레인보우큐브(2018) 개인전.

- 박지형(1990- ) 영국 코톨드미술학교 미술사 석사 졸업 및 홍익대 박사 수료.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광주파빌리온 큐레이터 (2024). 코리아 리서치 펠로우 10×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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