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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서인혜: 쌓이고 버무려지는 이야기

이문정

서인혜 작가


서인혜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여성들의 삶에서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작업은 작가가 직접 경험했거나 전해 들은 실재하는 삶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고려가요, 고대 신화와 전설, 문학은 영감의 원천이자 서로 다른 시간을 이어주는 고리가 된다. 특히 작업이 전개될수록 상상의 범위가 넓어지고, 작품이 풀어내는 다층적인 의미의 구조, 주제와 재료의 인과 관계가 더욱 탄탄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초기작인 〈버무려진〉(2016-18)은 한지나 비단에 김칫국물 혹은 혈액을 연상시키는 붉은 물감이 스며들고 번지며 만들어내는 비정형적인 형상으로 구성되었는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힘들었던 과거 여성의 삶과 노동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작품 제목에 자주 등장하는 ‘버무리다’는 요리 행위의 하나이자 차이의 어우러짐을 지향하는 서인혜의 태도를 함축한다. 〈버무려진 방〉(2018)의 재봉틀과 〈버무려진 막〉(2019)에서부터 등장하는, 할머니들이 즐겨 입는 일바지의 화려한 문양 역시 여성의 일이라는 주제에 힘을 보태고, 비공식적인 내부에만 머물렀던 여성의 시간을 복원해 의미를 재고하게 이끈다. 이후 서인혜는 수집한 나무껍질에 한지를 구겨 붙여 〈웅상에서 나온 가죽〉(2020)을 완성했고, 병풍을 닮은 대형 설치인 〈몸빼12곡병〉(2020)에서는 한지의 표면이 거칠게 일어나도록 채색해 시간과 노동이 축적된 인간의 피부를 시각화했다. 


2022 수림미술상 후보작가전 《딩아 돌하》 전시 전경, 김희수아트센터 갤러리


이때부터 흐르는 시간과 잊히는 서사를 붙잡으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어딘가에서 떨어져나온 것 같은 꽃무늬가 입혀진 파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온전한 하나도, 중심도 아닌 부분이지만 그래서 상상의 가능성이 커지는 존재이다. 2022년부터는 육중한 바위 같은 색감과 표면을 가진 입체물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절개를 지킨 여인이 바위로 변했다는 한국의 전설들이 떠오르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작가 스스로 “미분음덩어리”라 명명한 이 작품들은 모두 분쇄된 파지와 톱밥 등을 접착제와 함께 버무려 뼈대 위에 발라나간 뒤 표면에 채색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작품들에는 시멘트나 석분이 더해졌는데 고려가요에 등장하는 돌이나 바위 형상을 만들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작가는 이런 작업이 어머니와 할머니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닮았다고 느낀다. 또한 재료를 가장 작고 연약한 상태로 만든 뒤 버무려 공고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작가적 노동의 최대치를 은유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소리도 더해지는데, 골격음이 아니라 장식음인 시김새와 만난 미분음덩어리들은 굳건한 여성, 나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가 된다. 파편 위의 맑은 문양, 검은빛 사이에서 반짝이는 비즈는 생의 찬란함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렇게 평평했던 의미는 풍부한 덩어리가 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곽리자고>, 2023, 스티로폼, 종이, 먹, 비즈, 60×50×80cm


한편 낯선 생명체, 명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상징하는 검은빛의 미분음덩어리는 신과 영웅을 표상하고 영혼과 선조, 정령이 거주한다고 믿어지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M.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에 나오는 고대의 거대한 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복고적 인상은 신비로운 SF(Science fiction)적 분위기로 이어진다. 작가에게 SF란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대안적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제 서인혜는 더 적극적인 스토리텔러(Storyteller)가 되려 한다. 이야기는 복구되고 창작된다. 미래는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기에 먼 과거와 먼 미래는 그렇게 이어지고 지속된다.


- 서인혜(1988- ) 이화여대 동양화 전공 졸업, 동대학원 석사.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2024), 수림큐브(2023), 김희수아트센터(2022), 박수근미술관(2022) 등 개인전 및 단체전.

- 이문정 이화여대 조형예술학 석사, 박사.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 출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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