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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12) 김창열 b. 1929

변순철

 


1933년

나는 할아버지 밑에서 천자문을 익혔다. 붓으로 한 획 한 획 글자를 만들어 갈 때마다 칭찬에 인색치 않으시던 할아버님의 말씀이 어찌나 귀에 달던지, 나는 종이가 아주 새까매질 때까지 쓰는 연습을 계속 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한시를 곧잘 암송하시곤 했다. 나지막하면서도 낭랑하시던 당신의 음성은 아직도 내 귀에 살아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의 생활방식을 나는 늘 자랑스러워했다.

 

1957년

현대 미협을 창립할 때 우리가 가졌던 첫 번째 의도 중 하나는 서구 현대 미술사를 우리 모두에게 걸맞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인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그룹의 활동에 미술사의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구의 미술 운동을 논의의 주제로 삼았다. 서구 미술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모두 우리에게도 틀림없이 그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각자의 의견이 토론의 목적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세잔느와 입체파에서 다다로, 초현실주의에서 추상 예술로 단계별로 토론의 장을 발전해 나갔다.

 



1961년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는 상태다. 어제와 이제, 너와 나, 그리고 사물들의 전부가 철철 녹아서 한 곬으로 흘러 고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산산이 분해된 나의 제 분신들은 여기 저기 다른 곳에서 다른 성분들과 부딪혀서 뒹굴고들 있는 것이다. 아주 녹아서 없어지지 아니한 모양끼리 서로 허우적거리고들 있는 것이다. 이 몸짓이 바로 나의 창조 행위의 전부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정된 모양일 수 없다. 이동의 과정으로서의 운동 자체일 따름이다. 파생되는 열과 빛일 따름이다. 이것이 나에게 허용된 자유의 전체인 것이다. 이 오늘의 절대는 어느 내일 결정(結晶)하여 핵을 이룰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덥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이다.

 

1965년

뉴욕에서의 나의 삶은 거의 한국 전쟁 때만큼이나 힘들었다. 전쟁 기간 동안 나는 숱한 주검과 비참함을 목격했다. 하지만 뉴욕 화단의 그 압도적 기세의 유행은 나로 하여금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초라한 아시아인이라는 느낌만을 주고 있었다. 꼭 꿈에서 가위눌린 상태의 계속인 것이었다. 당시 뉴욕에서는 팝아트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팝아트가 아닌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곳이 그곳이었다. 서울에서 그리던 그림을 가지고는 누구에게 보아 달라고도 할 수 없는 곳이 그곳이었다. 나는 한없이 울어야 했다. 나의 좌절감은 내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겪었던 모든 고통과 슬픔보다도 더 컸다. 나는 너무나 냉혹하고 너무나 기계적인 현대 사회 속에서 방향감을 상실한 채 막막함을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9년

파리는 뉴욕과 달랐다. 파리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뉴욕에서 팝아트가 유행할 때, 모든 사람들은 마치 다른 장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팝아트의 경향을 따라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몇몇의 작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작가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지만 파리는 달랐다. 파리엔 다양한 경향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파리의 분위기는 내게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1973년

내게는 그림을 그리는 절차가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물방울의 형태만큼 실질적인 필요가 있었다. 나는 바라는 만큼의 통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매우 많은 유형의 본을 만들어 놓고 분무기를 사용해서 작품을 제작했다.

 

1975년

작업량이 자꾸만 불어났는데, 나는 이것을 불교의 법왕 기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생각을 버리게 될 때까지, 무(無)에 이를 때까지, 고통의 피안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기도한다. 나는 전쟁의 기억들을 떠올리곤 했고, 물방울들이 망자(亡者)들을 위한 진혼곡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고, 불교에서 정화 의식을 거행할 때 나쁜 영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는 행위와 거의 마찬가지였다.

 

1988년

파리에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서구 예술과 동양 예술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아시아인인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근원으로 삼고 있는 서구 예술은 나의 지향점이 아니다. 나는 나의 그림이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는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거나 그러한 욕망을 갖고 있다. 나는 흔히 고통을 달래주고 기억을 순화시킨다고 하는 극동의 풍경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물방울을 주제로 선택했다. 그게 바로 내가 이런 풍경화들을 정성 들여 그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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