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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백악을 맴돈 최순우의 서울생활

이경성

1948년 개성박물관 유물과 개성분관의 간판을 등에 지고 서울에 올라온 최순우(崔淳雨 1916-1984)는 삼청동 어느 골짜기 차도 안 들어가는 단칸방에 집을 마련했다. 이 집은 남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자그마한 정원이 있고 거기에 놓여진 꽤 넓은 툇마루가 있고 방 두 개가 동쪽을 향해 문을 내고 있었다. 말하자만 일종의 조촐한 하꼬방이다. 거의 피난민과도 같은 신분으로 개성에서 서울로 와서 자리를 잡은 것이 삼청동 이 집이었다. 이 곳을 대여섯 번 드나들었는데 아직 살림살이가 잡히지 않은 터이라 가구 같은 것도 없고 책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다음에 최 형이 산 곳은 경복궁 내 자경전 뒤쪽에 있는 박물관 관사였다. 궁인지라 꽤 큰 나무와 분위기가 좋았고 바로 이웃에는 꽤 잘 지은 한옥이 있었는데 이곳이 경안당이라는 편액이 있고 거기에는 관장 김재원이 살고 있었다. 최 선생이 살고 있는 집은 군정 시대에 경복궁 관계의 사람들이 살았던 임시 건물이었다. 삼청동으로 빠지는 조그마한 문이 성벽에 뚫려 있고 그 양쪽으로 건물이 여러 채 서 있었다. 최 선생이 살고 있던 건너편에는 황수영, 김원룡 등 박물관 직원이 관사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경전에 들렀을 때 이 집에는 별로 가지 않고 그곳에서 일을 보는 바람에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고, 다만 6.25 때 서울에 올라와 그곳에서 하루 저녁을 잔 적이 있다.

이곳을 바탕으로 하여 최 형은 1.4 후퇴 때 덕수궁 서관에 모아놓았던 서울 시내의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소개하고, 1953년 서울을 수복하고 나서는 궁정동에 새로 아담한 집을 마련해서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것이 최순우의 궁정동 시대의 시작이다. 이 집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도 전통적인 조선조 말의 민가로서 그것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는 바람에 꽤 살기 좋은 집이 되었다. 이것 역시 궁정동 큰 길에서 골목길을 한참동안 올라가면 조그만 대문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자그마한 앞마당이 있어서 규모는 크지 않아도 아기자기한 건물이었다. 왼쪽에 있는 안방과 부엌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대청마루 그리고 오른쪽에 바이 두 개 있는 첫 번째 방이 한칸방이고 두 번째가 그것보다 약간 넓은 사랑채였다. 뒤뜰이 있어서 답답한 맛은 없고 거기에 심은 여러 가지 나무 때문에 시원스런 느낌을 준다.

이때는 최 관장이 생활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가끔 친구들을 불러서 개성 만두과 술을 대접했고, 집 치장도 마루에 놓인 사방탁자, 깨진 백자를 놓고 그 앞에 소반에는 꽤 잘생긴 푼주를 놓고 그곳에는 산수유, 매화 등 계절의 꽃을 한국식으로 꽂았다. 말하자면 가난하지만 격조 높았던 조선시대의 선비 생활의 분위기가 그곳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문에 걸레질을 말끔히 한 부인의 솜씨에 놀랐던 것이다. 매년 연중 행사로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술이나 과자를 사들고 세배 삼아서 아침 11시쯤 그곳에 가면 얼마 있다가 박물관 식구들이 세배차 몰려오고 점심 때가 되면 미술당 모임 식구들이 집에 모여서 정초의 잔치를 열었다.

이러한 세시 풍경이 몇 년 동안 계속되던 어느 해, 최 관장은 성북동에 있는 꽤 넓은 한옥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역시 옛적 선비의 집으로서, 앞뒤의 마당도 제법 넓었거니와, ㄱ자로 이어진 집의 모습이 옛날 선비의 집의 스케일을 그래도 따서 아담하고 분위기가 나는 그러한 집이었다. 큰 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약 50미터 가면 일부러 쌓아 올린 여덟 계단의 주춧돌이 있고 그것을 왼쪽으로 보면 대문이 서 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다음 중간 문턱이 있고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이어지고 왕모래를 깐 정원 너머로 돌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 아담한 한국식 건물이 ㄱ자로 전개된다. ㄱ자의 양 모퉁이와 가운데에 방이 세 개 있고 그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다.





<최 형의 방은 그 왼쪽 맨 끝 쪽의 한 칸짜리 공간을 둘 이어 놓은 방인데, 그것 역시 사방탁자, 문갑, 장롱 등 목가구로 채워서 완전히 조선조적인 풍취가 나는 분위기였다. 방 안에는 도료가 깔려 있고 그 앞에 아담한 서안이 있어서 그곳에서 원고를 썼는데, 그 머리맡에는 장욱진이 그린 모기장과 박수근이 그린 고목 등 1호짜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서안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원고를 쓰는 최 형에게 보다 편한 의자에 앉아서 원고를 쓰시면 어떠냐고 충고했으나, '여보, 편한 것만이 행복은 아니라오'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방문을 오른쪽으로 돌면 뒤뜰이 있는데 그리 넓지 않는 마당에는 이름 있는 화초와 나무를 심고 뒷집으로 이어지는 높은 담새에는 담쟁이를 올려서 푸르게 하였다. 방을 에워싸고 앞뒤로 툇마루가 있고 툇마루에는 수집한 벼루 수십 개와 깨진 백자 파편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데, 그것은 전체 정원 속에서 꼭 있어야 할 물건들로 기억된다.

이 집에서 최 관장은 꽤 오래 살았는데 역시 정월이 되면 미술당이 모여서 잔치를 하고 또 무슨 날이면 거기에 모여 개성 만두를 비롯해서 부인이 장만한 음식으로 맛있게 먹은 추억이 생각난다. 규모도 크지 않고 그리 풍성하지 않지만 사람 사는 생활의 기쁨이 담긴, 꼭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그 공간 처리는 미술사가 최순우의 산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 이 집은 이조의 가난한 선비가 살았던 집과 같아서 남지는 않아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신적인 만족을 주는 생활 공간이었다. 이 집에 들어설 때마다 역사의 현장에 들어서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던 우리들 조상들의 멋과 맛을 일깨워 주는 그러한 생활 공간이었던 것이다. 최 형은 이 집에서 병이 나서 서대문에 있는 고려병원에 입원하고 그곳에서 들락날락 약 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집으로 돌아와서 그리운 공간에서 선종했던 것이다.

백악 남쪽에 전개되는 삼청동, 궁정동, 성북동 등 변두리에서 30여 년간 생애를 마무리한 최 형은 백악의 정기를 타고 국립박물관장이라는 우리나라로서는 제일 중요한 일을 해낸 사람으로서 비록 그의 무덤은 용인에 있는 묘지에 있으나 그의 영혼은 백악 남록의 변두리를 오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한국미의 건재를 위해서 하늘에서 돌보고 있을 것이다. 이 성북동 고택은 2004년 4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문화재 1호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증, 기부, 임대 및 모금운동을 통하여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 및 문화유산을 확보한 후 이를 시민 주도 하에 영구히 보존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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