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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한국미학의 선구자, 고유섭 회고

이경성

나는 1940년대 개성의 부립박물관장으로 계시던 고유섭 선생과 서신 왕래를 통해 지도를 받고 있었다. 고유섭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동경에 있었을 때로, 인천의 후배인 동경상대 유학생 이상래가 고 선생의 처남인지라 선생이 필요로 하는 여러 책을 동경 간다에 있는 헌책방에서 찾아서 보내드리는 심부름을 나와 함께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선생과 서신상의 지우로 알게 된 것이다.
그때 고 선생에게 보내는 첫 편지의 서두에 썼던 문구를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존경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잘못일까요?”
이렇게 해서 나와 고유섭 선생과의 관계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언젠가 한번 틈을 내서 개성에 오라고 하시기에 일차 개성을 방문하고자 계획했으나 전쟁 말기의 부산한 분위기와 직장 관계 때문에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1944년 애석하게도 선생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유섭 선생의 가족들은 그 선대에 평안도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큰아버지인 고주철은 의사로서 인천 사회에서 이름난 사람이었다. 고 선생도 인천에서 태어나 창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서울의 제일고등보통학교를 통학하였다. 말하자면 경인 통학생의 개척자인 셈이다. 그의 유고 속에 경인열차를 타고 지은 몇 편의 시가 있고 또 인천의 바다를 주제로 읊은 시도 있다.






그후 그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진학해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미학미술사를 전공했다. 유명한 얘기지만, 당시 미학미술사학과는 강좌를 개설했으나 학생이 없어서 강의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고 선생이 입학을 지원하자 면접시험 때 일본인 시험관은 대뜸 그의 집이 부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학문은 돈과 출세와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집안이 넉넉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학미술사학과에 들어가고 보니 학생은 고 선생과 일본인 학생 단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그곳을 졸업했으나 그 선생의 말대로, 막상 취직할 길도 없고 해서 얼마 동안을 대학의 조수로 있었는데, 개성에 부립박물관이 창설되었을 때 그곳은 워낙 한국 사람들의 단결심이 강한 곳이라 박물관장으로 앉힐 한국 사람을 찾다가 고 선생이 물망에 오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고 선생은 초대 개성부립박물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름이 박물관장이지 워낙 박봉인지라 생활은 몹시 곤란했던 것 같다. 이 무렵 박물관을 찾은 세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은 개성부청에 근무하던 최순우이고 또 한사람은 동경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황수영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명치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던 진홍섭이었다.
이들은 전공은 달랐지만 고유섭이라는 인격에 이끌려서 박물관에 모여 여러 가지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고적답사를 하는 등 고미술에 대한 동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고고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개성의 삼인(三人) 학자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주) 이 내용은 이경성 지음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시공사│1998년) 33-35쪽 이다. 올해는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있었으며 미술세계, 월간미술에서 8월호에 특집기사가 실렸다. 개성 3인 학자는 최순우(崔淳雨 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황수영(黃壽永 1918-) 동국대교수 역임, 秦弘燮(진홍섭 1918-) 이화여대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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