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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최진욱의 조선 총독부(1992)

이석우

조선총독부건물 - 근현대사 수난의 파노라마




찾아간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건물은 여전히 없었다. 북악산 뒤의 파란 하늘과 널찍한 공간감이 나를 붙잡았다. 근정문 앞뜰에도 노랑, 파랑, 빨강의 현란한 깃발 아래 수문지기의 교대식이 호기롭게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12년 전만 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화장석의 조선 총독부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경복궁과 북악은 이것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았다.

경복궁은 태조4년(1395)에 세운 조선의 법궁이다. 1894년 일제는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바 있었다. 명성황후가 시해(1895)된 곳도 경복궁의 건청궁에서 였다. 일제는 한때 궁 전체를 철거하려는 계획(1916)을 했었다. 법궁 앞에 참 너무도 오만하게도 그리고 옹졸하게도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그것은 이조 500년, 대한제국 국권의 파괴일 뿐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처사였다. 설계자는 총독부의 요청을 받은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 1872-1914)였다. 2년에 걸쳐 기본 설계를 마련했으나 (1912-14) 그가 사망하자 나머지는 일본인 건축가들에 의해 1916년에 완성되었다. 그 건물의 주된 의도는 “위풍적이고 둔중”한 권위를 들어내는데 두었다. 양식사적으로는 제국적 ‘바로크 양식’이라 불린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모방한 것이 영국의 식민지 인도의 뉴델리에 세운 인도총독부라 한다. 본인이 방문했던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의 일이다. 영국 식민지 지배의 권부 ‘커스텀 하우스’(Custom House)에서 조선총독부의 인상을 받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다.

청사의 위치는 근정전과 광화문의 중심선에서 그 바로 중앙에 위치토록 했다. 일부 일본 건축가들은 부지를 지금의 대학로, 구서울 문리대 자리나 서울 시청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는 조선의 맥을 끊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그 자리를 택하도록 명하였다. 기실 일본 건축가들의 말을 따랐더라면 우리가 굳이 그 건물을 철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다른 면의 아쉬움이 있다. 남의 나라를 지배하더라도 어떤 의미의 톨레랑스(tolerance)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1916년 6월 25일 착공 1926년 10월 1일 준공했으니 만 10년의 공사이다. 철근 콘크리트, 바깥은 모두 화강석으로 쌓았다. 5층의 건물은 크게 세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진다. 돔을 갖춘 중앙부분, 기둥벽과 베란다의 날개부분과 건물 네모서리에 서 있는 우각이다. 공중에서 보면 일(日)자형이란다. 소요경비는 그 당시 화폐로 700만원, 쌀 한 가마가 4원 시절, 쌀 169만 가마의 값에 이른다. 이렇게 지어진 총독부는 그들의 사용한 기간 19년. 나머지 51년을 해방 후 우리 현대사와 같이 한 아이러니. 한 건물은 역사를 만들어 내는가. 조선총독부는 근현대민족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함께 흘렀다.

해방 후 3년 동안 (1945-1948) 캐피털 홀(Capital Hall)이라 불려졌고 미 군정청이 들어섰다. 미군은 9월 9일에 서울에 입성, 제1회의실에서 미군 제7군단장 하지 중장이 일본 총독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에게서 항복문서 서명을 받았다. 태극기 아닌 미국 성조기가 올려지는 날이었다. 48년 5월 10일 미군정당국의 선거관리 아래 총선이 치러지고 5월 31일 제헌국회의사당으로 개의한 곳도 중앙청에서였다. 그 앞뜰에서 48년 8.15 해방 기념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됐다. 성조기가 내려지고 앞뜰에 태극기가 계양되는 순간이었다. 1950년 한국전발발은 이 건물의 주인을 다시 바뀌게 했다. 중앙청 정면에 김일성과 스탈린의 커다란 초상이 걸렸다. 북괴는 퇴각하면서 불을 질렀다. 6.25후 불탄 채 버려진 이 건물을 복구한 것은 5.16 군사정부였다. 그 후 20여 년간(1962-1982) 정부청사로 중앙청의 역할을 했다. 다시 중앙청은 개축을 거쳐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탈바꿈하였다. 기구한 건물의 역사이자 운명이다.




총독부란 어떤 곳이었던가. 1910년의 경술국치 병합조약 1-2조는 주권을 완전히 일본천황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통감정부는 총독부로 바뀌었다. 1910.9-1919.8월 까지 총독부의 총독지배 특징은 ‘무단정치’였다. 총독은 조선의 ‘정권과 병권’을 장악한 일본이 파견한 군주와 같은 존재였다. 총독은 법률규정을 명할 수 있었고, 식민지배도구로 헌병경찰제도까지 실행시켰다. 1910년 3월부터 1918년 11월에 걸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이에 익숙지 않은 농민을 하룻밤사이에 조상 때부터 지켜온 토지를 잃게 했다. 1918년 통계에 의하면 전농가 호수의 3.3%인 지주가 소유한 토지는 전농지의 50.4%였다. 자작농은 겨우 19.6%. 완전 또는 부분 소작인은 전농가호수의 77%에 육박했다. 혹자는 이 토지조사사업을 근대적 토지제도의 출발이라 하지만 이것은 수탈체제 구축과 일인토지소유의 길을 터놓음에 다름 아니었다.

교육은 어떠했는가? 총독 데라우치가 발표한 교육령공포(1911.8)는 일본교육을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본 천황에 충성을 바치는 국민을 양성 하는것,숭실학교와 이화학당에 병설된 대학이 폐지 된 것도 이때였다.1919년부터는 교과서도 총독부가 편찬한 것, 총독의 검정을 받은 것이어야 했다. 총독부의 모든 목적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동화 편입 시키는 것이었다.

3.1운동은 총독부의 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을 바꾸었을 뿐이며 목표는 같았다. 반일의 결집된 힘을 분산시키자는 의도 였다. 저항자로 부터 협력자를 분리시켜 협력자에게는 사적이익이나 계층이득을 추구하도록 유도 했다.그들에게는 삶의 자기충족 방도와 그 공간을 열어주는 책략이다.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이었던 이광수의 전향이 ,3.1운동의 중추적 역할 자였던 최린, 최남선 등의 회절이 그런 것이었다.

일본 식민 통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우리 근대사의 큰 쟁점이 되어왔다.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의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꺾어버렸다. 자력갱생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오히려 조선을 예속시키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식민지화 됐기 때문에 근대화가 진전되었고, 일정 부분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도 있다는 논지이다. 제국주의는 상호작용으로 보아야지 일방적 가해자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는 고종을 비롯한 외세 대응세력들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완강한 저항 속에서 광무개혁과 같은 내재적 발전을 도모했다는 얘기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제발전론이나 문화 성장론도 지배 권력의 문제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조선왕조가 망가뜨려진 것은 내재적 모순과 무력성 때문이지 외세만의 작용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 점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가 ‘수탈과 저항,’ 대 ‘근대화와 협력’이라는 두 대립적 틀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높다. 김기봉 교수는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을 넘어서 한국사에서의 그 어두운 시기,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역사가 늘 그렇듯이 주관성과 사료의 선택, 가치관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조선 총독부는 건물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주는 시사가 많다. 그것은 대한제국주권의 박탈이자 문화와 역사를 흡수시키고 적어도 일본에 동화시키는 권부였다는 점에 주목해야겠다. 그리고 그 위치가 서울의 어느 다른 곳이 아니다. 경복궁을 훼파하고 그 맥을 가로막는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제국주의의 확실한 목표는 조선의 재배와 소멸이었다. 마치 경복궁이 사라지고 있듯이...

최진욱이 총독부를 그렸던 시기(1990-1994)는 그의 작가로서의 화력에서 독특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제 4회 개인전 (이콘 갤러리. 94.6.9-18)에서 발표한 그림의 주제들은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역사의식, 적어도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 박노해가 등장한 ‘웃지 않은 사람들’(1992), 거북선과 일본 자위대를 등장시킨 ‘400년 후의 강변’(1992), 동학 혁명지도자 손화중의 은신처와 백산 봉기 지역을 그린 ‘시간을 찾아서’를 내보였다. 그리고 운동권의 대표적인 노래 ‘아침이슬’을 그림 제목으로 한 80년대 격변의 사건들을 담은 길이 5m짜리 화폭에는 운동권 걸개그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병렬시켰다.

내가 이 그림들을 여기에 일일이 언급한 이유가 있다. 최진욱은 이 전시회 이전에도 그리고 이 전시 이후에도 이 같은 역사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필자가 줄곧 의문을 가졌던 것은 왜 이 시기에 그의 역사화(?)가 등장했는가에 대해서였다. 이 말은 최진욱의 역사와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림적 관심이 그 후 지속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이전까지 최진욱의 그림 주제는 주변의 일상, 자전거나 자화상, 화실 안의 풍경들이었다. 그것들만으로도 그림의 리얼리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히려 연극적 요소나 스토리적인 주제는 작가와 그림, 보는 자 사이의 소통을 저해한다고까지 생각했는 듯하다.
그가 바깥세상으로 시간 속으로, 역사 속으로 열려진 풍경 속으로 뛰어는 첫 시도가 ‘조선총독부’라고 추정해보고 싶다. 80년대를 화실과 그림 속에 묶여 있던 자신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어떤 자의식을 느꼈을 듯도 하다. 그는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1956년생) 경기고등학교를 나왔으니, 버스 통학 길에 하루에 두 번 정도 늘 중앙청을 지나 갔었으리라. 그러나 그림 소재로 그의 의식을 일깨운 것은 1992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것은 역사적 실체로 보다는 그림의 리얼리티적 소재로서가 먼저였을 듯하다. 파란하늘 아래 육중스런 하얀 석조건물은 강렬함 그 자체였다. 마치 달려오는 거대한 코끼리처럼 자신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여러 캔버스 위에 총독부 건물을 엇갈리게 그리며 역사의 운동감 같은 효과를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거친 터치로 생략하듯 그리면서도 실제의 총독부 기둥의 숫자 벽장식 베란다 등을 정확히 그렸음이다. 건물 하단 좌에서 우측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일본인 관광객이다. 우에서 좌로 걸어가는 젊은이들은 중앙박물관을 관람하러 온 한국 학생들이다. 그들이 정지되어 있는 건물과 대비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리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다. 베란다 창문에 무언가를 그려 넣어야 하는데 붓이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저 파란 하늘 그것은 왠지 다시 칠하고 더 다시 칠해야했다. 이 무렵부터 작가는 회화는 무엇으로 정당화 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의 늪에 빠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그림은 주제보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느낌도 주제도 생각도 동시에 망실된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마치 삶은 국수가 퍼져버리듯이 붓과 자기와 느낌과 생각이 풀려버린 상태 같았다. 이 같은 그의 갈등은 90년대 중심이 해체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지고, 문민정부 출범이후 사회 정치적 긴장은 그 대상을 잃고 풀어졌다. 더구나 문화면에서 21C 기계, 전자 이미지 시대에 밀린 회화의설자리는 어딘가에 대한 위기의식 같은 것에 시달렸다. 역으로 그가 역사적 소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이런 주변 사정의 변화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그는 끊임없는 실험과 자기 응시로 이의 통로를 찾으려는 정직하고 진지한 노력의 작가이다. ‘조선총독부’도 그런 모색의 과정 중에 놓여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는 회화에서 신체적 행위를 개념이나 객관성만큼 중시한다.. ‘회화는 대상 세계와 인간의 눈 -머리- 손의 긴밀한 피드백 과정에서 탄생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기계적 이미지들과 대결하는 그림의 마지막 무기는 오히려 신체와 생각, 눈과 인식이 만들어내는 차이에서 온다고 믿는 것 같다. 그가 ’캄캄한 공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은빛 그네, 그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사진과 같은 회색 모노톤을 쓰면서도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계속 거칠은 붓을 쓰고 있는 것 아닐까.

조선 총독부 철거는 해방 이후 줄곧 제기되어왔다. 찬반론쟁과 여론 조사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도 그 건물을 완전히 철거해 버린데 대한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역사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역사의 실체를 파괴하고 배반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그 어떤 역사적 증거보다 가장 확실한 일제의 엄혹한 지배의 실체였다. 누가 경복궁 복원을 반대하랴. 하지만 총독부 중앙 부분이라도 살려 동편에 옮겨 세워 복원된 경복궁과 대비시켜 세워 놓았더라면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 되지 않았겠는가. 잃었던 공간은 되찾았다하더래도 역사 증거 인멸의 책임은 두고 두고 면치 못할 것이다.



참고문헌
문화체육부 국립중앙박물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보고서(상) 1997
김정동,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대원사, 2000
김윤수 외, 한국미술 100년 ①, 한길사, 2006
유승열, 2006년의 일제 강점기 (1910-1945) 연구현황과 과제, 역사학보 195 (2007.7)
강재언, 한국근대사, 한울, 1995
월간미술, 19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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