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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왕산제색도> 앞에선 L.A.의 김병기

이석우

북으로 간 작가, 그들만의책임이었던가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사람, 그것도 먼 이국 땅에서 만났을 때 우리 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본인은 우연이란 숨겨진 얼굴의 필연이라는 생각을 더러 하게 된다. 화가 김병기와의 만남도 그런 것이 아닐까.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거인답게 92세의 나이에도 의연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전(1916) 평양에서 출생. 할아버지 김진모는 평양의 대지주, 갑부로 평안도 가산군수를 지냈다. 그 아들이자, 김병기의 아버지인 김찬영(1893-1960)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1917)한 이 나라 고희동, 김관호에 이은 근대미술의 선구세대. 김동인, 김안서, 주요한 등과 함께『영대』,『 폐허』등의 문예동인지에도 참여했다. 김병기는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金東元)의 사위로 해방당시 밀서를 가지고 서울을 드나든 인물. 해방 후 그는 북조선미술동맹의 서기장, 월남 후에는 방부 종군화가단 부단장,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을 지냈다. 연구소 역할 중의 하나는 좌익 성향의 미술인들이 월북하거나 지하로 잠적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그 뒤 서울대 교수(1951-58), 한국미협이사장(1964) 이었다. 1965년 상파울로 국제미술커미셔너 및 심사위원으로 도미했다가 미국에 머물고 말았다.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1986년 (71세). 이후 한국에서 20여년간 미술활동을 했다. 건강상 이유로 미국에 간 것은 2006년. 본인이 그를 만난 것은 2008년 1월과 2월 두 차례였다.

그의 화실은 L.A.의 Los Felitz Blvd. 작업 중인 캔버스가 널려 있었다. 햇빛 잘 들어오는 투명한 유리창 밖. 한국의 산처럼 황량한 그리피스(Griffith) 파크 산이 눈에 곧 들어왔다. 창밖의 산을 그리고 있다는 그였지만 그 산은 한국의 산을 미국의 캔버스에 옮겨 논 느낌이었다. 어느 경우는 한 작품을 10번이나 바꿔 그리고 1년이나 걸린 것도 있다 한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한국이 생각의 근원이 되고 더욱 선명히 다가온다고 말한다. 인생을 적극적으로 사는 길“그것은 사랑하는 것, 그것 밖에 없다. 예술은 가르친다고 끝날 일이 아니예요. 그 과정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길이 예술”이라고 그는 선언하듯이 말했다.

21세기의 과제는 정신성의 회복이다. 이는 예술에도 해당된다. 그린다는 일의 정신성, 내용을 잃고 형식만이 남아 있다는 게‘20세기 말의 미술현상’을 보는 그의 눈이다.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위기는 모든 것의 상품화(Commercialization)이다. 최후의 저항보루여야 할 종교마저 거침없이 상품화 시키고 있다. 설교자도 TV에 나가면 배우, 세일즈맨을 방불케 한다. 미남에 패션을 갖춘 배자들, 화려한 장식의 건물,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 그곳에 수만명이 모이는 것은 왜인가? 그 이유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영혼의 갈증 때문이다. 예술도 어떤 형태로든지 이들의 목마름에 생명의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예술책무론이다.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동행했던 한국의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논하지 않은 것을 김병기는 크게 질타했다. 그들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논하지 않으면 누가 제기할 것인가? 예술가는 그 시대의 인간문제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자신이 북에서 고초를 받은 월남화가이기에 이 문제는 에게 아주 절실했던 것 같다. 종교나 예술이나 정신성을 잃었을 때 타락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상기시켰다. 나는 굳이 그가 왜 미국에 머물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에게 분단이란 무엇이었던가. ‘모든 모순을 집약하고 있는 허리 잘림’이었다. 가혹한 이데올로기의 대결, 동족간의 총부리 겨누기, 학살과 대결, 문화보호법에 갇힌 창작내용의 자유 없는 조국이 오히려 그를 밀어 내지는 않았는지.




한국적 리얼리즘을 찾아내야 한다.

북으로 간 작가들은 그들만의 책임이었던가. 수많은 재능들이 북으로 가서 사라지고 말았다.“ 김환기는 반우익 반좌익. 남관은 좌우익을 모르며 이쾌대는 좌익이지만 양심적인 좌익. 남한이 편협한 반공주의를 가지고 보냈다고 봐요. 장택상 이후에 지하로 가던지,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간 것이 아니라 남한이 보낸거나 다름없어요. 이국에서 묻는 한 노인이 있다고 말해 주시오. 나는 한 번도 좌익을 해친 적이 없어요. 대북 방송도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형식이었어요“. 그는 남북한미술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에서 그리는 그림은 자기 그림이 아니고 북한 정부가 요구하는 그림이다. 남한은 어떤가“형상이 없는 단색 추구, 아무것도 없는 담벼락, 벙어리 같은 아류 그림들. 미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행복한 눈물>이나 팝아트는 미국에 가치 있는 것이지, 한국에는 설익은 것이에요. 그 점에서 남한이나 북한이나 예술이 아닌 것을 가지고 예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적 리얼리즘을 찾아내야지요.”




그와 이야기 나누는 동안 벽에 걸린 <인왕산 제색도>는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즐겨 그린 인왕산은 경복궁, 서울, 우리의 역사, 정치, 전쟁과 질곡을 묵묵히 지켜봐 왔다. 그는 인왕산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그 앞의 서울은 선으로 겨진 듯 여백 처리를 했다. 다만 좌측 하단의 붉은 색과 초록이 어딘가 소망을 버리지 않게 하고 있다. 삶은 여전히 역설의 집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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