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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아아, 정숙한 추녀여

윤철규



네하라 마리(米原萬里)라는 일본의 러시아어 동시 통역자는 탁월한 글 솜씨로도 유명해 국내에도 팬이 많다. 남녀에 관한 아슬아슬한 테마는 주특기 중 하나인데 통역 일에 대해 쓰면서도 통역은 잘해야 본전이라며 그것을 정숙한 추녀와 불성실한 미녀에 비유한 적이 있다. 
정숙하다는 것은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고 불성실한 것은 원문을 벗어난 통역이다. 추녀와 미녀의 구분은 자구(字句)에만 몰두하는지 아니면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지의 차이이다. 이 네 조합 중에서 정숙한 미인이 되는 것은 모든 동시통역자의 꿈이지만 찰나의 순간에 말을 만들어내야 통역의 운명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불성실한 추녀도 존재할 수 없는데 그랬다간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역은 대개 정숙한 추녀와 불성실한 미녀 사이를 왔다갔다하기 마련인데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때와 장소를 따를 뿐 정답이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어디 그런 일이 통역뿐이겠는가. 불성실해서도 안 되겠지만 죽자고 원리, 원칙만 따지다가 못생긴 추녀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얘기는 새겨들어볼 만 하다. 최근에 날로 추녀쪽으로 가고 있는듯한 어느 한 건물을 보면 이 말이 정말 실감난다. 내친김에 그녀를 조금 더 인용해보자.  
이 요네하라씨는 엄청난 독서가에다 필력도 있어 여기저기에서 서평도 청탁받고 본인도 독시일기 같은 것을 썼다. 이 글도 묶여서 책이 됐는데 국내에도 번역(『대단한 책』, 마음산책, 2007)됐다. 
약 400권 가까운 책에 대해 풀어놓은 재미있는 얘기가 다수 들어있는데 물론 러시아어 전문가답게 러시아, 동구 쪽 이야기가 많다. 그중에 러시아 건축을 소개한 책도 있다. 여기에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로 이어지는 마네쥐 광장에 있는 호텔 모스크바(the Hotel Moskva)라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한 건물 이야기도 들어있다. 


이 호텔은 1930년대 스탈린 체재가 자리를 잡는 가운데 세워진 호텔로 건물 전면을 십수 미터의 기둥 12개가 떠받치고 있는 상당히 위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건물에는 두 가지 건축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광장쪽에서 호텔을 보면 오른쪽은 러시아 혁명과 함께 각광을 받았던 말끔한 외관의 구성주의 양식인 반면 왼쪽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이런 이형합체 건물이 지어지게 된 배경을 보면 정말 권위적이다. 당시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슈세프(Alexey Schusev)는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스탈린 권력을 염두에 두고 용의주도하게 종이 한 장에 2가지 시안을 나란히 그려 제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당시 최고지도자는 그만 두 시안의 한 복판에 덜컥 사인을 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바로 구성주의와 신고전주의가 좌우 동거하게된 이 호텔이었다. 위대한 권력이 낳은 장대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는데 요즘 이 광장 지하에는 거대한 쇼핑몰이 생겨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든다고 한다.    




이쯤 얘기하면 ‘어디선가~’하고 감이 올 법도 할 것이다. 한옥 처마는 천만의 말씀이고 오히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시가나와(神奈川) 앞바다에 이는 파도 머리를 흉내낸 것 같은 포스트모던 양식과 1930년대의 국제주의 양식이 짬뽕된 장면이 서울 한복판에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지나간 일이지만 ‘헐자, 말자’하는 와중에 힘을 얻은 ‘문화재’라는 말의 권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 역시 50년 뒤에는 문화재가 되는 게 엄연한 사실 아닌가. 아아, 정숙한 추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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