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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⑬-1

이영철

인도네시아의 현대미술


“우리에게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미술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는 벤야민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 짐 수팡캇


1990년대에 들어와 인도네시아 미술계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제화와 상업화를 통해 역설적인 발전을 했다. 국제 교류가 뒷전으로 밀려났던 현대 미술의 실천을 장려했던 것과 동시에, 상업주의의 진행이 열기를 더해 갔다. 이같은 모순된 발전은 현대 인도네시아 미술이 국제화 그리고 고도로 상업화되었던 첫번째 시기로서 인도네시아 미술에 그 의미가 깊다. 상업주의는 1985년 -일본의 엔화 가치가 미국 달러의 2배 가까이 올라가면서 일본 경제가 급성장을 보였던 해- 일본에서 시작됐던 국제 예술 붐에 영향을 받고 나타났다. 그렇지만 당시 인도네시아의 예술 작품 수집가들을 유럽 대가의 작품을 수집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고국의 작품 수집을 하였는데, 굉장히 높은 가격에 사들였었다. 이러한 가격의 갑작스런 폭등은 얼마 없었던 인도네시아 미술 화랑의 수를 수백 개로 증가시켰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소는 싱가포르에 있는 지점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이 아닌 ‘인도네시아 거장’들의 작품을 경매하였다. 이러한 폭발적인 관심과 전시장의 폭증으로 인해 대도시에서는 예술전시들이 많이 개최되었다. 예술, 특히 회화의 경우에는 그 역사상 이례적으로 폭넓은 인지도를 보여주었고 예술 관람객들의 수는 어느 때보다 증가하였다. 이러한 쇄도는 실제적인 진보는 아니다. 예술 시장의 폭발은 모든 전시회들이 오직 회화, 특히 아름다운 회화만 전시하려는 경향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고(故) 사네토 유리만(Sanento Yuliman)은 이러한 예술계의 붐을 황폐화에서 온 미술의 일용품화의 징후로 보았다. 1970년대 갖가지 설치와 멀티미디어가 소개된 이후 인도네시아의 예술이 도약했던 것과 비교하여 사네토(Saneto)는 회화 그 자체가 아니라 회화의 새로운 지배력을 오히려 예술계의 퇴보로 보았다. 그러한 인도네시아의 현대 예술 조건들로 인해 작품들은 판매불가능한 것이라는 관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여졌다. 미술 시장의 주류 경향에 그들의 시각을 맞추는 비평가들은 예술이 평온과 아름다움 그리고 유쾌한 기분들을 표현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하며 팔기에도 적합해야 한다. 이러한 평론가들은 현대 예술은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처럼 너무 자주 충격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미술의 붐 이후에 바로 일어난 국제 예술계와의 만남은 뜨거운 화제 거리가 되었다. 사실상 국제적인 교류를 만들어 낸 것은 당시 주류였던 (보기 아름다운 미술) 작품이 아닌 현대 미술이었다. 사실상 제 3세계의 현대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의 고조를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조우는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 작가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돌파구는 오랫동안 국제 예술계에서 무시되어왔던 인도네시아의 예술의 중요한 현상으로서 전 분야에 걸쳐서 보여졌다. 인도네시아의 1990년 이전 국제적인 교류를 살펴보면 1940년에서 1990년까지 50년의 시간동안 단 한번 국제적인 행사에 참여했을 뿐이다.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저명한 화가인 아판디(Affandi)가 그의 작품을 1953년 제 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전시했을 때였다. 국제적인 인지도 상승에 의해 현대 미술은 당시 인도네시아의 주류를 대표하던 주류 미술계에 의해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되었다. 예술 시장의 빠른 성장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던 인도네시아 예술에 대한 출판물들은 현대 미술의 발전도 포함하였다. 많은 현대 예술 작가(화가)들은 심지어 미술 시장에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예술은 완전히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회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화랑과 비평가들은 예술의 경계를 정함에 있어 암묵적으로 설치와 행위 예술을 제외시켰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의 현대 예술과 예술 시장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 회화는 사랑과 증오의 병렬 관계에서의 발전으로 분석될 수 있다. 즐겁게 만드는 아름다운 회화와는 너무도 다르게 현대 예술 작품은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지녔다. 작품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현상을 대표하였고, 그 표현들은 충격을 주는 것을 의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존재하였던 인도네시아의 현대 예술의 계속된 발전이었다. 초기에는 인도네시아 예술계의 담론에서 오랫동안 논쟁되어왔던 국가적 정체성의 탐구에 대한 반응의 결과였다.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담론은 인도네시아의 현대 예술 발전에 지배적인 견해였던 모더니티의 개념과 관련된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현대 예술의 작가들은 사회적 현상들을 고려해야만 하는 사회학적 정체성에서 새로운 국가적 정체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주류의 정체성이 아닌 인도네시아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탐구 뒤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원리에 근거를 뒀다. 그 견해에서는 힘있는 엘리트 그룹에 의해 억눌림을 당한 가난한 사람들이 주류였다.

1990년대 초기에 국가적 정체성 탐구에 대한 반응은 단지 정체성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점에서 나왔다. 국가적 정체성 또는 사회학적 정체성은 절대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c)을 따르고 있었다. 두 가지 견해에 중심을 둔 정체성은 국가적 영웅주의에 영향을 받은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대 예술에서 이러한 믿음은 민주주의의 신봉을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향은 하르소노(Harsono), 셈사르 시아한(Semsar Siahaan) 그리고 모엘요노(Moelyono)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사회 계층적 접근을 통해 그들의 작품은 정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는 탄압적인 부패 세력으로 묘사하며 비판하고 있다.

1990년대 중기에 또 다른 경향이 나타났다. 새로운 경향의 작가들은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들은 이상주의의 범위 안에 어떠한 탐구도 배척하였고 사실주의의 범위 안에서 그들의 탐험을 실행하였다. 작품들 속에서의 표현들은 사회적 현실에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다. 그 표현들은 단지 사회적 현상들에 비판적인 시각들을 표명하는 감정적인 표현들을 덧붙인 감상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경향 속에 ‘다수(majority)‘의 의미는 사실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를 구분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검토를 줄이는데 그 평가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다수(majority)는 현대 세계와의 제한된 교류를 하는 일반 대중들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내려졌다. 그들은 서구적 개념에서 볼 때 교육을 덜 받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그들은 경쟁적인 현대 사회의 실패자 그리고 학대의 피해자들이 되었다.

헨리 도노(Heri Dono), 다동 그리스탄토(Dadang Christanto), 티스나 산자야(Tisna Sanjaya), 하루나 호시아( Hanura Hosea), 아라마이아니(Arahmaiani), 미얀토(Diyanto), 이자 페르카사(Isa Perkasa), 아궁 쿠르니아완(Agung Kurniawan), 아구스 하리 하야르드조와 아구스 수와제(Agus Hari Rahardjo and Agus Suwage) 와 같은 작가들은 가난과 불공평함 그리고 억압이 반영되는 사회적 현상들을 탐구하였다. 그 표현에 있어서 이들 작가들은 국가 개발 뒤에서 행해진 정부와 엘리트 집단의 부패와 실수들, 권력의 악용 그리고 속임수들을 폭로하였다. 데데 에리 수프리아(Dede Eri Supria), 이반 사지타(Ivan Sagita), 아구스 캄(Agus Kaml), 에펜티 (Effendi), 멜로디아(Melodia), 추신 세티아디카라(Chusin Setiadikara), 유스완토로 아드히(Yuswantoro Adhi) 와 같은 작가들은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을 그들의 비판 도구로 사용하여 불합리함을 표현하였다. 그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은 경제적으로 세계화에 따른 진보의 모순된 영향력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로 브리콜라주(Bricolage)적인 표현 기법들이 무질서를 가리키게 되었다. 작가들은 왜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성장이 부패와 속임수가 나타나게 된 조건이 되었는지에 대해 묻게 되었다. 그들의 작품들에서 반영된 사회의 조건들은 폭동 속의 사회가 아닌 근대화의 과정에서 무시된 사회에 대한 반영이었다. 반면, 아누사파티(Anusapati), 닌디토 아티푸트노모(Nindityo Adiputnomo), 헤디 헤르얀토(Hedi Heryanto), 니요만 에라완(Nyoman Erawan), 멜라 자르스마(Mella Jaarsma), 크리스나 무르티(Krisna Murt)i(p130),마그달레나 파르데데(Magdalena Pardede), 은탕 위하르소(Entang Wiharso)와 나시룬(Nasirun)과 같은 작가들은 민중 삶의 전통을 탐구한다. 이러한 작가들은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담론 속의 전통문화라는 개념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이 찾고자 하였던 반응처럼 그들의 견해로는 실제 전통 문화는 사회적으로 무시 받아왔다. 그들은 비판적인 견지에서 그들이 표현하는 부분에 개입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 표현의 모든 개념에 대한 질문을 이끌어 낸다. 현대미술이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c)의 생각에 머물러 있고 역설적인 변화를 탐구할 때, 그 주류는 국가 정체성과 국가주의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였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주류가 엘리트의 힘 있는 그룹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비난에 저항하는 항변의 장치이다. 이러한 비난은 사실상 부정할 수 없다. 정부 고위 관리자들은 민족주의를 주류로 간주한다. 성장하는 예술시장에서는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발전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들의 시각에서 작업은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료적 승인 때문에 아름다운 회화의 전시는 부유한 사업가와 정부 고위관리들의 사회적 모임으로 자라게 하였다. 주로 사치스러운 호텔 로비에서 열리는 이러한 전시들은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 결과로서 아름다운 회화는 폭넓은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좋은 예술로서 사회에 보여졌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사회정치적인 생각들을 의사소통하려는 현대 미술 작품들은 힘이 들었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그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한 작품은 민족주의의 침식을 보여준다.’나 ‘그러한 작품은 서구적 사고의 나쁜 영향을 보여준다.’ 같은 반응은 그러한 작품들에 의해 사회적 당혹을 일으키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명백하게 발생한 이러한 현실은 예술시장 장치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는 현대예술이 빈곤한 폭로와 기반사이에서 효과를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에 분쇄당한 현대예술 작가들은 예술의 모임에서 떨어져 나가고 예술이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효과를 낼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정치적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모엘요노(Moelyono)와 셈사르 수한(Semsar Suahaan), 티스나 산자야(Tisna Sanjaya), 다다당 크리스티안토(Dadadng Kristianto), 마리탄 시르헤르(Marintan Sirair), 안드라 마니크(Andar Manik)와 같은 작가들은 비정부단체NGO에 가입하였다. NGO의 주된 활동은 그들의 권리를 알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그룹의 옹호하는 단체를 지원해 주는 것이다. 자바 동부의 주변 지역에서 여러 해 동안 공동체와 함께 일해 온 모엘요노 (Moelyono)는 정치적 힘과 같이 병약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예술을 주창하였다.

정부에 의한 부패와 공모, 친인척 등용의 암합은 1990년대 중반 이래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융 위기가 일어나 아시아를 휩쓸었던 1997년 말, 인도네시아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던 국가 중 하나였다. 사실상 공모는 정부가 경제적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을 극복하는데 실패한 근거였다. 루피아는 이전 수준이었던 1998년 1월 달러 대비 2.500 선에서 17.000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러한 실패는 1998년 초반 자카르타(Jakarta)와 욕야카르타(Yogyakarta)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의의 탄생을 낳았다. 학생들의 정부 비난은 전반적인 정치적 재건을 거리에서 요구하였다.

1998년 5월 자카르타 (Jakarta)에서의 집회에서 4명의 학생이 죽은 이후 집회는 인도네시아 모든 대도시에서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였다.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일어난 이러한 집회와 폭동의 힘으로 수하르토(Soeharto) 대통령은 32년의 재임에 이어 사임하게 되었다. 그의 후임이 그의 대리인에 의해 세워짐으로서 그의 정권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변화는 즉각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났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침해당했던 언론과 사회정치적 비판 표현의 자유는 허가를 받았다. 20여 년간 침해받지 않은 공모와 친인척 등용의 경우는 대중 매체에 의해 대중들에게 폭로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재건의 완수는 아직 먹리 있으며 따라서 재건의 움직임은 대도시에서 지속되었다.

정치적 격변은 의심할 바 없이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영향은 무척이나 낯설다. 사실 정치적인 변화는 현대예술을 지배적인 미술 담론에 대항하는 개념을 강조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엘리트 그룹과 미술 시장에 봉사해 왔던 미술담론은 침묵했을 뿐이다. 이전의 예술 활동이 재건의 움직임에 의해 멸시 받는 엘리트 그룹의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사실은 모든 화파의 거의 모든 인도네시아 작가들을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은 심지어 현대미술 작가들이 “그” 인도네시아의 미술 담론으로서 지배적인 미술 담론을 인정한 것에서 보여진다. 이것은 거의 모든 작가들 사이에서 확신 부족의 결과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그것은 1998년 6월과 7월 사이에 자카르타(Jakarta)와 반둥(Bandung), 요기야카르타(Yogyakarta)에서 열린 토론을 반영한다. 이러한 모든 토론의 결론은 간단하다. 예술은 무용하며, 사라져야만 한다. 이러한 사멸은 어떠한 반미술 개념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편견 면제의 덫에 빠진 결론이다. 이미 정치적 모임에 가담했던 현대미술 작가들은 예술은 정치와 비교했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선언으로 그 결론을 강화했다. 이러한 믿음으로 작가들은 집회와 재건의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그들의 거의 선전활동의 형식을 띄고 있는 예술 작품을 집회나 공공장소에서 시연했다. 정치적 재건이 진행 중인 한, 정치적인 문구는 아마도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의 주류적 흐름이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현실로 그 표현을 가져가는 자각을 기반으로 한다면 그 작업은 흥미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것들은 작가들이 어떠한 예술적인 개념을 이행하는 것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어떤 것이 효과가 있거나 정치적이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 모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저항이 예술적이거나 아니거나 별로 상관하지 않는 반면 정치적 범주의 외부에 있는 미술 비평가들은 정치적인 암시나 정치적인 전문 용어를 기반으로 한 미학의 어떠한 것도 보지 않았다. 현실은 정치적 결말을 위한 예술의 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업 때문에 이해되고 있다. 작업은 예술적/미학적 측면의 단순한 감소가 아닌 철회를 보여준다. 이것은 주로 작가들 사이의 확신 부족에서 기인한다. 결과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미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을 떠올린다. 다시 말하자면 그 작업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비평가이자 독립큐레이터인 짐 수팡캇은 말한다. “그것은 작가들이 역사적 변화가 가능한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미술이 역사적인 사회 정치의 격변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안된 일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명확한 예술적 논의와 예술의 올바른 기초구조와 집회 없이는 예술작품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예술적인 측면을 감소시킨다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의심의 여지없이, 영향은 엄밀한 비평적 자각과 의사소통에서 시작된다.

ELISON
Transmission전송 (퍼포먼스 이벤트 프로그램)

각 세대는 이전 세대의 창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뿌리가 있다는 것은 미술과 음악 역사의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술의 형태와 문화적인 지리를 넘는 합동작품은 참가자들마다 이해하려는 시도와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표하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며 지나치게 공손한 상호간의 조절에 의해 주로 특징 지워지는데 이는 이들 둘의 희석과 타협의 결과를 가져온다. Heri Dono와 나는 서로를 오해하기로 약속했다.

transmisi는 네덜란드 말로 인도네시아가 식민지하에 있을 때 다시 철자가 쓰인 단어이다. 우리의 프로젝트에서는 정보, 생각 그리고 전통을(문화들 사이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전송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에 동반되는 적응, 왜곡 그리고 오해- 극복해야 되는 장애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라고 봐야한다. Wayang kulit[인도네시아의 그림자 인형극]와 전자 음향 앙상블 악보는 가장 속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동료밖에 될 수 없지만 그들의 조화는 비디오를 통해서, gamelan의 소리와 구조를 향한 간접적인 접근과 그 자체가 개인적인 에너지를 산출하기 위해서 빈 발전소를 남용하는 소리-퍼포먼스/이미지 설치를 통해서 한층 더 세분화된다.

Sonorous bodies는 정적(부재)의 잠재력과 접촉의 범위(존재)를 탐구하는 퍼포먼스와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중국의 음악적 미의식(미감)은 접촉의 개념과 더 확장하면 미각, 후각, 시각과 청각을 실험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촉감의 원리는 음악을 감상하는데 소리에 동등하고 서로 의존하는 의미를 가진 qin(지터)음악에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촉각과 근각을 강조하는 것은 소리의 물리적인 명시를 넘어 음악의 정신적인 범위를 확증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Sonorous bodies’라는 제목은 악기를 물체의 재료(돌, 금속, 실크, 대나무, 가죽, 바가지, 흙)로 분류하는 중국적인 방식을 나타낸다. qin음악에서(Chen의 The Sixteen touches of the Zither) 사용되는 제스처의 코드(기호)를 사용하여 작가는 만지고 소리가 나는 행동을 둘러싼, 거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진동의 영역을 연구한다. 각자의 제스처는 거대한 공명을 상상한 풍경으로 통하는 일시적인 출입구 역할을 한다.
작품은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1. 어두운 공간에 8개의 연속되는 비디오 프로젝션. 비디오는 접촉의 잡히기 어려운 ‘순간들’을 담은 시리즈이다; 예를 들면, 돌이나 물위로 그림자가 떨어지는 순간, 숨이 불꽃을 뿜는, 또는 pawpaw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맛.

2. ‘Sixteen Touches of the Zither의 기보법(악보)이 실현된 것을 Satsuki Odamura라는koto연주가에 의해 소리와 침묵의 퍼포먼스로 보여졌다. 침묵의 바다 안에 이와 같이 소리나는 사건들은 진동이 터져나오다 없어지는 알기 어려운 지역의 다른 표현이다. 보표는 전통적인 일본 서법으로 써졌다.
고대와 현대 사이의 퍼포먼스 실행의 결합과 두 형식들 사이의 친밀한 포옹과 아끼게 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합작은 공허와 침묵, 제스처와 소리의 개념들을 해석하여 거울에 비추어진 각자의 예술형태를 연구하도록 우리들을 도전한다. 우리들은 작품의 구성요소들을 직접적으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주제를 둘러쌓고 있는 알기 어려운 울림의 영역에 주목하여 나란히 전개시켰다. 우리들의 합작은 ‘옆으로 흘긋 훔쳐보거나’ 또는 ‘열심히 눈을 돌려 응시로부터 ’ 생기는 시를 찾는 것이다.

다당 크리스차노(Dadang CHRISTANTO)
Dadang Christanto는 Yogkarta의 Indonesian Art College를 1978년에 졸업하였고 지난 20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사회적인 이슈들에 관련된 미술작업들을 해왔다. 그의 활동 초기에는 W.S. Rendra라는 인도네시아의 시인이 설립한 문학, 음악과 공연예술의 경계를 넘어 다니며 사회와 정치적인 이념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예술 단체에 속해있었다. 그의 작품은 인도주의적인 철학과 인간의 고난과 사회적인 상처, 특히 탄압을 당한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에 근거한다. 그는 회화,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를 통해서 모든 대륙에 있는 관객들과 지역사회에 감명적으로 호소하는 작품들을 창조하다. Christanto는 첫 번째 아시아-태평양 트레니알에 For those: who are poor, Who are suffer(ing), who are oppressed...1993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기념하여 꽃과 시를 남기는 행위에 주로 호주사람들로 이루어진 관람객들의 참여를 초대하였다.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전시장 바닥이 그러한 증정물들로(역사적, 현대적 그리고 세계적인 이슈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쌓였다. 이 작품이 전시될 때마다 -지금은 Queensland Art Gallery에 소장된-그와 비슷한 반응이 일어난다. 1996년도에는 자카르타의 바로 옆에 위치한 Ancol의 Marina Beach(해변)의 놀이 동산 안에 있는 물 속에 유리 섬유로 주조한 형태들을 넣어 제작한 ‘1001manusia tanah(1001명의 흙으로 만든 사람)’을 선보였다. 실물 크기의 남자와 여자가 항변하는 듯한 제스처로 손을 뻗고 물에서 나오는 모습으로 표현된 인물들은 난민들을 상징한다. 놀이 공원을 찾은 관객들, 가족들과 낚시꾼들이 이 작품을 접한 반응을 보면 공통적인 슬픔을 반영하는 특별한 감정의 인간애를 통해 일반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는 그의 의도를 성취하는 작가의 능력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Christanto는 제3회 아시아-태평양 트레니알에도 그의 변함없는 전세계적인 인도주의를 구현하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오늘날 거의 200만 국민을 가진 나라 인도네시아의 40만명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고 현재 세계 2차대전 이후 어느 나라와도 비교되지 않는, 사회의 모든 중심세력을 흔들어 협동, 정치적인 조직, 군사의 역할, 민주주의, 종교적 포용력과 사회적 정의를 뒤흔드는 가장 나쁜 경제난을 겪어야 하는 비극을 또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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