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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건축, 디자인의 공공성 - 도시 개발에서의 한 실험

이영철

예술, 건축, 디자인의 공공성 - 도시 개발에서의 한 실험
제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도록 서문




초석
APAP는 1년에 걸친 연구 조사를 통해 성사되었고, 그 배경은 상당히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격렬한 토론과 시장의 용의주도한 결단, 적지 않은 시비와 방해를 극복해가며 프로젝트는 궤도에 올랐고, 일본의 큐레이터 프람 기타카와의 진취적인 시각, 풍부한 경험과 아낌없는 조언이 일의 추진에 있어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시작도 끝도 아닌 과정이다. 과정에서 생성이 일어나고 그 선들을 따라가며 모두가 점점 깊숙이 일에 빠져들었다. 하루는 일과는 곧 천국이자 지옥인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이다. APAP에 참여했던 예술가들, 건축가들, 그리고 그들을 불철주야로 도왔던 코디네이터들, 갈등과 협력 속에서 마지막 고지에 올랐던 시공무원들의 노고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APAP가 창설되기까지 1년이란 준비 시간이 있었지만 실제로 집행에 들어간 것은 사무국이 오픈한 2005년 2월부터였고, 3월 중순부터 참가자들을 접촉하기 시작해서 7개월 안에 전체 프로젝트의 90퍼센트를 완성시켰다. 이런 과정은 그 자체가 묵시록적인 전쟁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독립 큐레이터로서, 나는 거의 모든 작업의 구상 단계와 진행 과정에 세밀하게 관여했다. 협동 작업에는 늘 새로운 발견이 기다리고 있다. 극소수의 한국 작가들이 고집피우고 저항했을 뿐 모든 일은 급속하고도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오프닝 전날 새벽까지 랜턴을 들고 산을 누볐고, 스태프들은 거의 탈진했고, 더러는 ‘패닉’ 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다시는 이런 프로젝트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비관적인 모습도 있었다. 초석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쉽게 되어서도 안된다. 문제는 그 후에 모든 것이 피상적으로 흐르고, 더 이상 수직적인 힘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창조와 생성의 힘은 오로지 과정 중에 있고 그것은 길을 떠나는 자의 세계일 뿐이다.


장소의 감각
APAP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정치가, 시공무원들, 자문위원들, 지역 주민들, 시의원, 시공업자) 사이에 협상, 교섭, 갈등, 그리고 ‘애정어린’ 충돌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것은 개발 도중에의 과감한 개입이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할 스스로 선택한 곤경이었지만, 오로지 ‘생성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목적에 바쳐진 미션이었다. 계획과 행정에서는 보편화된 ‘문화’의 렌즈를 통해 도시 발전을 찬양하는 반면, 예술의 입장에서는 과정과 생산의 관점에 충실하려는 능동적인 실험이었다. 참여자들의 선정은 미리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절차 중의 픽업’이었고,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의 그림맞추기였다. 유원지의 거의 전 구역을 장소 감각을 살리는 작업들로 배치하면서 다양화의 놀이는 좀더 세밀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의 개수를 늘리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작품들이 생성하는 관념들 사이에 ‘인간의 알 수 없음’과 ‘헛점’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APAP가 인간의 헛점에 대한 명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틈인 동시에 일종의 파열(rupture)이다. 20세기의 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영상으로 만든 2시간 짜리 DVD를 녹색의 창고 안에서 상영하고, 밀라노 대성당 안에서 졸고 있는 노인을 찍은 앙리 살라의 몰래 카메라 비디오 작품을 홈리스 피플들이 서성거리는 유원지 주차장의 15미터 타워에 설치하였다. 오프닝 2주전 까지도 프룩서스 멤버의 한 작가인 로베르 필리유의 5천개의 주사위 작품(모두가 1번이 나온다!)을 초청하여 파라다이스 안양에 우연성의 사건을 암시하고자 했으나 돈이 모자랐다. 이 안양프로젝트는 내용적으로 어떤 종류의 계몽과도 상관이 없다. 차라리 좀더 오래 많이 걷고 걷다가 앉아서 쉬고 다시 걸으며 생각하며 ‘장소의 감각’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요긴하다. 장소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은 도시 공간을 더 이상 이미 구획된 공간 배치의 중심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서의 ‘위상학적 감수성(topological sensibility)’를 부여해주는 일이 된다. 공간, 배치, 대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험은 근대적 공간 인식(중심과 주변의 조형적 구분)을 전복시킨다. 사람이 장소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움직임의 자유를 누리는 열려진 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날 도시발전에서 예술이 요구되는 이유는 예술이 도시의 장소(location)들을 새롭게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장소들은 예술이 스스로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곳임과 동시에, 예술은 장소의 모습 자체를 새롭게 재정의해 준다. 도시가 자본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게 되고 공공과 사적인 영역의 확고한 경계가 무너지는, 삶이 충만한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혼성 공간이 되는 것이 오늘날 공공예술 프로젝트들의 공통된 관심사일 것이다. 안양유원지는 온통 먹거리 일색의 조야한 개발 풍경 속에 약자의 소리를 담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공공 예술 대신에 일상의 삶-권력(bio-politics)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생성의 공간을 만들려고 했다. 일반적 의미에서 공공예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공공 예술은 사회적 프로그램을 모방하는 것인가?
그것은 정부의 정책들을 지원하거나 낡은 지역의 가치를 높혀주기 위해 부동산 시장을 돕는 것인가?
공동체를 지향하는 프로젝트들 속에서 예술가들은 교육자의 역할을 다시 발견한 것인가?
미적인 것의 수호자로서 문화라는 이름 아래 사회 공간들 내의 권력 관계를 감추는데 이바지하지는 않는가? (권미원, 'Im Interesse der Oeffentlichkeit,' Springer II/4, p.30)


안양유원지는 정상적인 주거 공간이 아니라 무분별하게 무허가 상행위가 이뤄지며 행정의 사각 지대였던 그린벨트 구역이었다. 규제에서 벗어난 슬럼화된 구역은 어느 도시에나 있게 마련이다.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인구의 1/3이 슬럼화된 버려진 지역에서 살고 있다. 한국은 1995년 지방자치제의 실시 이후 서울의 인근 도시 주변의 슬럼화된 구역들을 지방 정부에서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안양 시민들에게 소외되고, 저급한 수준에서 경쟁적인 상행위만 존재하는 변두리 구역, 잠재적인 부동산 투기 지역으로 고려되는 장소에서 예술을 통해 공동체 논의를 하는 것은 이 프로젝트의 준비 기간의 부족함을 떠나 일단 실효성이 약해 보였다. 이런 조건에서 지역의 일부 시민 단체예술가 모임은 APAP가 지역 공동체와 주민들의 삶을 등한시했다고 손쉽게 비난하거나, 보수적인 미술 협회에서는 회원 작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에서 지역 작가들을 소외시켰다는 소문을 유포하여 APAP에 흠집을 내곤 했다. 잡음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런 잡음들은 이 지역 내 전문가 집단의 카르텔 구조 속의 공모와 협잡에 악용되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 지역은 자본의 유입과 함께 상호부조의 정신이 증발하고 이미 생존의 격투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경쟁과 이권이 얽혀있는 재개발 구역에서 이상적인 프로그램은 시공무원들 보다 오히려 민간인 전문가들에 의해 좌절을 겪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 지역 내 무허가 건물들의 신축 과정에서 지역의 건축사들과 일부 심의위원들의 반발로 인해 민간 상업 건물 일부에 대한 알바로 시자의 설계가 중도에 포기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역적 정체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복잡한 이권의 문제는 도시의 상상력(Urban Imagination)과 결부된 초지역적 문화적 프로그램을 차단하며, 글로벌 시대의 초지역적 교환 행위를 지연시킨다. 이는 지역 주민들의 요구라기 보다는 지식인 전문가들의 선입견과 카르텔 구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공공 예술의 가치 실현은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국내외 전문가들의 협동과 의욕,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참여 없이는 도시 공간의 장식화, 미관화라는 함정으로 지속적으로 밀려들어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적은 필요가 큰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아야 한다.


풀의 지혜
APAP의 구상에 있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인간이 아니라 풀이었다. 유원지에 설치된 장소 특정적인 작업들은 각각이 풀인 동시에 소용돌이 바람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의 질서에의 욕망에서 빗겨가며 균형을 깨뜨린다. 이런 착상에서 Tipping the Balance라는 제목을 정했다. 창작은 기성 질서와 가치에 파고들어 균형을 깨는 것. 실험은 소용돌이 꼴로 말리는 나선적인 것이다. 그것은 스펙터클이나 과다 디자인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스스로 절제를 하며 스스로 소용돌이 꼴로 말리기. 사이에, 한복판에, 인접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회선(回線)이다. 헨리 밀러의 말 처럼, '풀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자란다. 꽃은 아름답고 배추는 유용하고 양귀비는 당신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지만 풀은 넘쳐 흐른다. 풀은 도덕의 가르침이다.' 나는 도덕의 가르침으로서의 잡초. ‘그냥 풀’ ‘무명초’의 정신에 공감하는 예술가들을 초청하고 싶었다. 풀은 ‘사이’에서 자라기 때문에 늘 양가적(ambivalant)이며, 상대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는 절대적 속도의 존재다. 대지를 뚫고 올라온 작은 침이기도 하며, 그것은 지면에 조용히 소용돌이 바람을 일으켜,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생명의 도주선(line of flight)을 그려낸다. 등고선 테이터를 이용해 만들어진 MVRDV의 회선형 전망대, 주차장과 하천을 따라 뱀 처럼 늘어진 비토 아콘치의 터널, 호노레 도의 불규칙적으로 작동하는 분수, 알바로 시자의 비대칭적인 곡선형 건물, 이승택의 용의 꼬리, 빛의 난반사를 이용한 볼프강 빈터의 박스형 구조물, 천대광의 긴 벤취, 4원소를 회전형으로 배치한 사미 린탈라의 Folly 형 구조물 외에도 거의 모든 작업들은 모두가 경직된 사고와 도시 개발 방식,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 소용돌이 활력을 일으키는 풀이고 바람이고 침이다. 이것들은 모든 것들 사이에서 스스로 회전하며 전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논산 훈련소에서 청와대까지 똑같은 형태를 보여주는 관제 조경에 대응하여 ‘침술 조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좋아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에 개입해 들어가 어떻게 침을 놓아 에너지의 흐름을 만들 것인가였다. 작품이 만들어내는 길은 확고하게 점을 찍거나 홈을 파기 좋아하는 선분들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선이다. 이런 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종종 바람을 이용해 파도를 타는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에 대한 은유가 되기도 한다. APAP는 명품을 장소에 박아넣은 것이 아니다. 작은 집들을 마주하며 물길, 숲 속의 공터를 따라 유연한 곡선을 만들기. 이승하, 앙리 살라. 세자리오 카레나, 테루야 유켄, 세리 삼바, 홍명섭, 왕두, 파브리스 지기의 작품들은 스펙터클한 개발 풍경에서 벗어나 길가나 숲 속의 모서리에 묘소 자리에 외롭게 있다. 올루 오퀴베의 <신들을 위한 유리 의자> 처럼 숲 속의 벼랑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들은 숲 속에서, 물길을 따라 한줌의 신선한 바람,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저항적인 대중 가수인 밥 딜런의 시 가운데 한 소절을 인용하자면, '.... 바람 속의 건반들은 내 마음의 자물쇠를 열고, 내 골방 속 생각들에 뒤뜰의 바람 한 줌을 건네준다오....' 베트남에 퍼부어진 폭탄들에 맞서 밥 딜런의 마음에 공감하기. 각종 오락과 유흥, 온갖 종류의 먹거리 홍수와 결합된 자본의 포화 속에 흠뻑 빠져드는 방문객들에게 작품들은 마치 바람 속의 건반들이 되길 원했다. 예컨데 아트 시티의 건축 심의가 경제 논리와 행정 사이를 중재하여 민간 건축물의 설계안을 통과시킨 엄청나게 거대한 복합 상업 건물(하천의 자연수 보다 더 자연스러움을 짐짓 가장하는 대형 인공 풀장 건물)은 그것 만으로 유원지 풍경 1/3을 위험에 빠뜨린 대형 폭탄이다. 몇개의 작은 폭탄들을 지나가며 오키나와 출신의 젊은 작가 테루야 유켄은 마술 게임 처럼 연속으로 펼쳐지는 로드 사인판을 만들어 유연한 지그 재그 곡선을 그리며 노래 부르듯 새롭게 공간을 열어준다. 그는 마른 나무 쪼가리를 모아 숲 속의 나무들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싯귀를 새겨넣기도 했다. 천안문 사건 당시에 투옥되었던 프랑스 체제 중국 작가 왕두은 곧 모조리 사라지고 말 무허가 상점들의 모양을 그대로 축소한 10점의 미니어처 조각들을 만들어 하천에 흩어져 놓았다. 왕두의 이 백색의 대리석 조각은 너무나 평범한 것을 독특한 것으로 바꿔내 아주 작은 규모로서 거대한 대형 폭탄 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그의 조각들은 하천을 따라 ‘기우뚱한 균형’을 만들이 장소의 감각을 회생시키려 하며 아주 멀리까지 시간의 흔적을 가져 가려고 한다.


벨기에의 고도(古都) 겐트에 살고 있는 호노레 도는 유동성, 변화무쌍함, 예측할 수 없음, 일시성의 개념으로 작업해온 상황주의 예술가이다. 그는 1977년 수해로 산에서 하천 속으로 굴러떨어진 두개의 거대한 돌을 주춧대로 이용하여 물고기 형태의 분수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과격한 근대식 도시 개발 현장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고,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귀엽게도“물고기의 눈물이 강을 이루다.”라고 했다. 13개의 노즐에서 각기 다른 형태와 강도로 물이 뿜어져 나온다. 그는 시간의 가차없는 흐름 속에서 물의 영원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다. 코리언 아메리칸 비디오 아티스트 레이먼 한은 60년대 말 미국의 가수 조니 미첼이 호노룰루를 방문하여 관광 개발에 놀라서 작곡한 노래(‘대형 노란 택시’)를 인용하여 안양유원지를 위해 만든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였다. 그는 모형비행기를 이용해 공중 촬영을 했고 이미지들에 그 번역된 가사를 붙였다.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아스팔트를 깔고 주차장을 만들었어
그리고 러브 호텔, 빌딩들, 라이브 카페를 지었지
너는 네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모르는 것이 아니니?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아스팔트를 깔고 주차장을 만들었어

이봐, 농부, 농부, 농약을 치워
나는 사과에 썩은 데가 있어도 상관없어
나에게 새들과 벌들을 제발 남겨줘
너는 네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모르는 것이 아니니?
그들은 파라다이스의 도로에 아스팔트를 깔고 주차장을 만들었어
이봐,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아스팔트를 깔았지
안 될 거 없지

난 버리고 싶지 않아
왜 넌 포기하려 하지?
왜 넌 모든 걸 던져버리려 하니?
이봐, 이봐, 넌 주고 싶어해
나도 주고 싶어해야지
자 넌 모든 걸 던져버리고 싶어 해

이봐, 아스팔트가 깔린 파라다이스에 주차장을 만들어
아스팔트가 깔린 파라다이스, 주차장을 만들어



절대적인 민주주의(충만한 자유!)
학자들은 도시를 아는 데 관심이 있고, 공무원들은 도시를 하나의 대상으로 관리하는 데 관심이 있고 예술가들은 노래를 짓거나 도시에 새로운 ‘틈 공간’을 여는데 관심이 있다. 여기서 정부의, 계획자의, 학자의 도시는 ‘만들어진 인식’에 기초한다. 반면에 예술가들의 의식은 예측할 수 없는 발견에 기초해 있다. 안양은 보편화된 문화의 렌즈를 통해‘아트’ 시티를 표방하고 있지만, 도시 발전에 있어 예술이 대체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좀더 사려깊은 관찰과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배적 사회 공간 질서가 부여된 구조나 공간에 맞게 자신들의 행위를 개조하고, 그 구조와 컨텍스트를 자신들의 문화적 행위에 맞게 개조한다. 따라서 도시민은 다수의 문화와 다른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상당수는 객관적으로 그려지는 힘있는 자들의 메타 이야기 아래에 깔려 억압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있어 큐레이팅이라는 것은 전문화된 영역으로서의 미술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 <저항> <조정>의 과정을 거쳐 다중(multitude)의 바다로 나가는 민주주의 학습의 장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이런 생각에 토니 네그리(Atonio Negri)의 말을 좀더 보태 설명하자면, 그것은 절대적인 민주주의(충만한 자유!)에 대한 겸허한 학습이라 말할 수 있다. 이때, 민주주의는 정부 형태라기 보다 변형을 꾀하는 사회적 활동으로서의‘영원하게 되기’이다. 영원성에 대한 열렬한 긍정 하에 도시 개발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파라다이스 안양를 회생시키는 시도(안양은 불교 용어로서 극락정토,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가치의 장을 구축해가는 능동적인 행위를 가르킨다. 공공성을 주장하는 예술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및 시민 사회와 관련하여 그 <개방성>, <투명성>, <연속성>을 통해 생존한다. “도시의 상상력과 공공 영역에서의 현대 예술”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던 2006년 부산비엔날레 국제 심포지움에서 미카 하눌라는 명료한 말을 했다. “공공 영역은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경쟁하며 대립하는 것이다. 공공 영역은 절대로 그냥 주어지거나 중립적 혹은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는 과정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공공 영역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접합, 재방문, 재생되어야 하는 공간이며 ‘상황’이다. 그것은 진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의 경계를 끊임없이 바꾸는 공간이다. 그것은 나타나는 동시에 생성되는 공간이다.”생성되는 공간은 매순간 ‘전략적 상황’을 관통한다. 예를 들어, APAP의 책임자의 한 사람은 공공 영역에서의 예술 개념에 대해 사적인 관점을 공식화하는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었다. 서문에서 보듯이 1회 안양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출발이 있기 전에 먼저 시작된 공공예술 작품이 있는데, 광장의 인공폭포, 야외무대와 신축된 두 개의 교량이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앞의 두 개는 자신이 다지인했고, 나머지 둘은 조경 회사에서 설계했다(디자이너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경위에 대해 언급할 마음의 여유는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공공을 위한 문화적 목적을 띤 예술성있는 작품이라고 주장되는 점이다. 여기서 그것이 공공 예술 작품이냐 아니냐의 논의는 소모적이다. 오히려 도시계획과 행정 권력, 그에 밀착된 보수적인 관점은 보편화된 ‘문화’ 렌즈를 통해 도시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인식을 관철시킬 수 있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공공 공간에서는 질서의 규칙과 통제가 예술 보다 우선권을 갖고 있다. 이런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로 인해 공공 공간에서 예술은 장식(decoration), 미관화(beautification) 그리고 조화를 만들어내는 방편으로서 예술에 대한 통상적인 평가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 전시나 국제 비엔날레 같은 곳에서는 무엇을 하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질서 유지를 기본으로 하는 공공의 공간에서 예술 프로젝트는 자주 이런 어려움에 부딪힌다. 시공무원들과의 대화나 토론에서 너무도 명료하게 인식되는 대목이다. 이것을 잘 지키는 작가 혹은 그런 분야에서 대용(peudo) 예술 작품 같은 공공 키치를 만들어낸다. 예술에 대한 통상적인 평가로 인준되는 것은 현대 예술의 실험에서 볼 때, 20, 30년 뒤쳐진 경우가 많다. 환경 구조물 심의 기준에서 중요한 평가 항목은 형태, 기능, 장식성, 미관화, 주변과의 조화 등이다. 거리의 조각, 조각 공원 들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 왔고 몇몇 전문 예술가들은 사업가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 작품은 더이상 명사/물건이 아니라 동사/과정이기를 원한다. 나는 APAP에 많은 건축가들을 초청했다. 공공시설물의 질을 높이고 그것을 비주얼 필드의 한 요소로서 통합하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안양유원지라는 동일한 장소에 개입되어 있는 두 개의 다른 부서들 간에 각기 다르게 책정되어 있는 예산의 효율적인 배분이었는데, 그 과정이 몹시 힘들었다. 관련공무원들 역시 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함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경험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건축은 그 통합적 성격으로 인해 예술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모든 영역이 심하게 분화되어 버린 것이다. 건물 안에, 건물 주변에, 건물 위에 그 어디에 놓든간에 예술을 건축에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하면 그 자체로서 자기 모순에 빠진다. 건물 그 자체는 아트가 아니라고 스스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오늘날에 한국에서 건축물을 예술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건축가가 거의 드물고, 법규도 그렇게 되어 있다.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물의 경우 공공 공간에서의 예술 개념을 충족시키는 건물을 보기도 어렵다. 건축 심의를 통과하거나 수상을 획득한 건물 마저도 조악한 형태에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인위적인 풍경 속에서 예술작품들이 그것들과 한 장소에 동거를 하는 것이 APAP의 특성이자 새로운 시도이다.


활력(Vitality)
이 프로젝트에는 다른 선이 개입되어 있다. 건축이 일종의 선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과정의 성격, 이야기의 구성, 인간 내면에 대해 유연하고 심도있게 접근하는 다른 선으로서 개입하는 것이다. 선분이 좀더 행정 권력과 밀착되어 있는 반면에 열려진 선은 탈권력적 방향성을 띤다. 예술은 권력도 아니고 대항 권력도 아니며, 권력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힘, 그것의 긍정적 표현인 활력(vitality)을 생산한다. 반면에 권력은 활력에서 비롯하지만 활력을 통제하는 사물화된 힘으로 작용한다. 예술은 그 자체가 활력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예술가들이 활력을 생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는 권력에 굴복하거나 비겁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활력을 생산하는 한에 있어 예술은 창조적이고 해방적이고 협력적인 운동이다. 토니 네그리(Toni Negri)의 용어를 빌자면, 예술은 삶을 (재)구성해내는 '존재론적 활력'이다. 이 존재론적 활력은 자율적이며 시간 속에서 영원하다. 예술 활동은 시간적 영원성을 추구하는 행위이고 그 가치를 개체화할 수 있어야 공공 공간에 자율과 자치의 지대를 만들 수 있다. 실제 현장에서 부딪히는 것은 사회의 상층에서 작용하는 권력이 아니라 명분, 토론, 합의, 통합의 다층 구조를 통해 삶 깊숙이까지 내려가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 영향을 끼치는 삶-권력(bio-politics)이다. 예술은 사회 정치적 공간 안에 개입하여 자율과 자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협동 이면에 많은 전투와 박탈 감정과 배반을 전제한다. 공공 공간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우리는 종종 질문을 받는다. 약자를 위해 무엇을 했는냐? 고. 이런 질문은 대부분 스스로를 좌파로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부터 나온다. 좌파 혹은 좌파로 분류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불행한 이들을 대변하고 희생자,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언제든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안양시에서도 학생들과 젊은 작가들을 위주로 낡은 재래 시장에서 펼쳐지는 석수 시장 프로젝트 그리고 안양천변에서 이뤄지는 안양천 프로젝트들이 있다. 젊은 작가들이 예술과 사회의 연관을 사고하고 다양하게 실험하는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좀더 우리는 겸허해질 필요가 있겠다. 공공 예술에서 공공은 하버마스 처럼 하나의 통합된 공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찬가지로 예술이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까닭은 예술이 반드시 약자를 위해 애를 쓰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APAP는 울타리가 없는 열려진 공간에서 이뤄졌다. 그것은 도난과 파괴에 노출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 안에는 이 장소와 인간이 결합되어 있던 그 자취와 맥락을 기억해내고 누구나 휴식과 해방감, 그리고 어떤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어떤 상태,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일 수 있는 리버럴 공중(liberal public)을 생각하며 구상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배제적인 메카니즘도 내부에 작동하지 않았다. 나빈 라완차이쿨은 안양 거주 주민들, 학생들, 유원지의 점술가, 영화 제작소 등을 찾아가 연구에 기초한 작업을 했다. 그는 기존의 평범한 파빌리온 천정 내부에 태국과 안양(한국)의 파라다이스 개념을 결합한 현대 풍속도를 그려넣었고,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소가 있던 안양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새겨넣은 간판을 제작했다. 한국의 설치 예술가 김용익은 공사 중에 모아진 많은 돌들을 이용하여 함몰된 땅에 넓은 쉼터를 만들었고, 한국 내 거주하는 여러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의 언어로'우리들의 안양'이라는 글을 받아 새겨넣었다. 오늘날 자발적인 연대와 더불어 시민 사회는 부르조아 공중을 위한 양육 터전이다. 한국 내의 마이너리티 집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지극히 취약하다. 그리고 박애주의적 혹은 문화적 공동체들의 진정한 네트웍을 구성하려는 노력은 개인들의 이익과 이해관계로 인해 자주 좌절되고 만다.
‘파르헤지아’(진실의 용기)
콜레주 드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 2년(1983-84) 동안 푸코의 마지막 강의 제목은 ‘파르헤지아(Parrhesia; 진실의 용기)’였다. 고대의 그리스 공동체에서 파르헤지아는 민주주의 토대로서 정직한 말을 사용하며, 타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민의 고유한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그러나 의회에서 듣기 거북한 진실들이 폭로되고, 온갖 계책과 음모들이 개입하면서 진실말하기는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파르헤지아는 아무 것이나 말하기, 모든 것과 그 반대의 것을 말하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과도한 소통과 정보가 홍수 처럼 흘러넘치는 사회인 오늘날이 그런 사회가 되었다. 진실을 말하는 행위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의 용기이다. 상대방을 동요시키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의 진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선언한 원칙 보다는 그가 감수하는 위험을 중심으로 주체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것이 파르헤지아가 용기있는 말이 되는 이유이다. 삶과 진실의 관계는 긴밀하고 동시에 분쟁적이다. 하나의 담론에 따라 자신의 삶을 규칙화하거나 정의의 관념을 옹호하면서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나라한 진실의 현란하고 야생적인 현존을 직접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파르헤지스트(진실의 용기를 실천하는 자)와 공모자/협잡꾼을 구분하는 지점이 있다. 공모자와 협잡꾼들은 기성 질서를 유지하거나 그것을 보수하여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현실적 이유와 변명들, 혹은 합리성과 객관성이란 단어를 좋아하며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에 대해 상투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푸코는 이런 질문들은 던졌다. “왜 진실과 삶의 결합은 종종 선동의 형태를 취하는 것일까? 왜 항시 진실된 삶은 동시에 스캔들을 일으키는 삶이 되는 것일까? ”우리의 자아가 비가시적이고 심리적인 내면으로 후퇴하는 진실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정치적 외부성과 결부된 그런 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해가는 도덕을 기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따르고 거짓을 고발하는 윤리를 요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APAP 2005가 어려움을 돌파해가며 끝내 성취될 수 있었던 근본 바탕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향후에 얼마나 어떻게 지속될런지는 모른다. 다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연속성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결국 또다시 스스로 기초를 만들고 출범시킨 배의 내용적인 난파를 목격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애당초 이 프로젝트의 출발은 협의의 미술도 아니고 단순히 작품의 야외 전시도 아니요. 공공 영역에서의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도시에 개입하여 그 내부를 수술하려는 계획을 80년대 중반 부터 꾸준히 실행해온 비토 아콘치가 공공예술은 도시를 ‘탈디자인(de-design)’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계(스캐폴딩)’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의 스캐폴딩 개념의 유연한 개입, 일시적이고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감각을 통한 윤리적 미적 정치적 개입을 가르킨다. 출구는 없으므로 우리는 삶을 더듬어가며 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니콜라 부리오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현대 미술의 실천은 한 사회 안에서 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APAP를 위해 자문역을 맡아주었던 네덜란드 SKOR의 창립자 톰 반 게스텔은 현대 미술은 사회 안에서 기생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APAP는 기존의 도시개발에 대한 스캐폴딩, 틈, 기생과 같은 것이었다. 1회 APAP는 말 그대로 거칠고 임의적인 토목, 조경 중심의 도시 개발 과정에 예술, 예술, 디자인으로 엮어진 스캐폴딩이었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고르지 않은 <삶의 권력장> 안에서 하나의 윤리이자 미학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교차하는 접점들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또다시 문화의 영점지대에서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던 파운더의 견해 자체는 무시되었고, 2회를 준비하는 모든 결정은 위원회 내부의 각본에 의해 신속히 이뤄졌다. 그것이 전문가, 공무원들이 함께 일하는 현장에서 이뤄지는 리얼리티이다. 1회 APAP와의 네트웍은 단절되었다. 이는 10년 역사를 지닌 광주비엔날레의 운영이 그랬고, 미디어 시티 서울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스캔들이 되어 창립 취지에서 아예 벗어나 버렸다. 한국 사회라는 우물 안에서 국제 행사는 늘 악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공공 영역에서 예술의 역할은 일차적으로 그 역할을 부여받거나 그와 연결된 사람들 각자의 <윤리 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 본인은 2회 예술감독 선정 과정의 아마추어리즘과 정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임 예술감독은 행정 권력의 시녀 처럼, 1회 기획자와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안양유원지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신이 정한 작가들을 추가 배치하는 비상식적 일을 하고 말았다. 공모와 협장이 깊숙이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미술을 택한 전문인들은 어떤 공공성, 어떤 윤리성, 어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성 이전에 정직성이고 공공성 이전에 윤리성이 아닐까. 후자들 앞에서 전자들은 발디딜 틈이 없는... 그런 상태에 대한 자기 인식. 우리는 우리 자신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위원회는 비판이건 동조이건 침묵이건 문제 상황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양식과 공적 책임을 지닌다. 공공 영역에서 예술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공공성의 의미에 대한 가치론적 질문에 있는 것이지 도시 개발에 피부를 입혀주는 기능주의적 관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 윤리, 방법, 절차가 각자의 삶과 판단에 있어, 그리고 공공 영역과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언제든 문제다. 이 질문에 정말 떳떳하다면, 어떤 변명이나 헛소리는 걷어버리고 우리에게 간단한 화두를 던지고 떠난 박이소의 작품 처럼 정직성이 울려퍼지는 그 무거운 콘크리트 배를 따라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Dont look back)”. 그것이 각자의 그리고 우리의 희망이다.





Florian Matzner (ed.), Public Art - A Reader, 2003
Antonio Negri & Frederick Hardt, Empire, 2000
조정환, Autonomia, 2003
Gilles Deleuze and Claire Parnet, Dialogues,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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