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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루함의 충격

서현석

나의 박사논문(2)
서현석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The Shock of Boredom : The Aesthetics of Absence, 
Futility, and Bliss in Moving Images」, 2003


학교의 선택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까지 했던 고민들은 매우 실질적인 것들이었다.
학교를 정함에 있어서 우선 실기와 창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당시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비디오’ 전공으로 예술학 석사과정(MFA)을 마친 상태였고, 딴에는 ‘보다 깊은 내공’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 그리고 작품과 예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생각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창작으로부터 나오는 질문들을 심도 있게 탐구하고 싶었고, 비평적인 담론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싶었다. 단지 이론과 창작을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닌, 두 영역 간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미국 내 학교 중에서 이런 가능성을 지지해 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박사’ 과정이라는 것이 매우 집중된 학술적 연구 과정이고, 창작 역시 연구와는 너무나 다른 능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대학에 ‘창작’ 위주의 예술학 박사학위 과정이 개설되어 있기는 했지만, 내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와중에 진학하게 된 학교는 당시로써는 거의 유일하게 이론 과정과 실기 과정이 동시에 개설되었을 뿐 아니라, 논문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창의성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 곳이었다. 노스웨스턴대학이었다. 박사 과정을 진행하면서도 학교 기자재를 쓸 수 있고, 실기 전공의 교수들과 교류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학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수업을 듣거나 지도교수를 정할 수 있다는 장점은 내게 큰 매력이었다. 
물론 막상 박사 과정을 시작하고 나니, 코스워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애당초 원했던 ‘창작’과 ‘이론’의 결합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지만, 창의적 활동의 가능성이 혼재된 환경에서 학문적 사유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했던 것 같다.

연구 영역의 결정
내가 진학하게 된 전공은 방송영화, 즉 ‘Radio/Television/Film’이었지만, 박사학위 과정에서 내가 연구하고자 한 분야는 영화와 예술의 접점이었다. 미국에서 영화 전공 과정은 대부분 극영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특히 1990년대는 대중문화 연구와 접목되면서 할리우드 영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학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창작을 염두에 두고 있던 나로서는 내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형의 영화와 연계되는 연구 주제를 잡고 싶었고, 그것은 나의 석사 전공이었던 ‘비디오 아트’와 실험영화, 예술영화였다. 이를 위해 내 소속학과 수업 외에도 미술, 문학, 철학, 퍼포먼스 분야의 수업을 지속적으로 수강했다. 
특히 당시에는 거의 모든 전공 영역에서 중요시되던 ‘근대성’이라는 주제를 연결점으로 삼아 시간, 시선, 욕망 등을 다룬 사상가들에 접근했다. 그리고 지도교수 역시 영화 전공 교수를 중심으로 문학과 철학 전공의 교수를 포함할 수 있었다.

논문 주제의 결정
논문에서 다루려던 논제는 영상 작품을 만들면서 늘 가졌던 실질적이고도 기본적인 질문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나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시간과 리듬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다음 쇼트로 넘어가기 전에 한 이미지의 시간을 얼마만큼 연장시킬 수 있는지, 그에 따라 이미지와 관객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1초 빨리 커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의 문제였다. 서사영화에서는 영화의 ‘재미’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찰리 채플린이 하나의 웃음을 유발한 이후 그를 마무리하기 위해 어떤 리듬감으로 연출과 편집을 하는가 하는 문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된 논제는, 어떻게 지루함을 배제하고 감각적으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도리어 지루함을 직면한다는 것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였다. 즉, ‘새로움의 충격’을 추진한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에 반하는 감성과 미학적 태도가 어떻게 작용했는가였다. 이야기 정보와 관련 없는 텅 빈 풍경을 과도하게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극영화로부터, 다섯 시간이 넘게 곤히 잠자는 사람만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이나 한 시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초기 비디오 아트의 극단적 전략에 이르기까지, ‘볼거리’를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미학적 기준을 넘어서는 ‘빈 시간’이 연구 대상이 되었다. 통상적인 ‘볼거리’가 쇠락하거나 배제되는 이러한 순간에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물성이 표면화된다는 가설에 따라, ‘지루함’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주제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활용한 이론적 기반은 프로이트, 보들레르, 벤야민, 하이데거 등 여러 학문 영역에 걸친 다양한 관점들로부터 가져왔다. 즉, 초기 영화, 극영화, 실험영화, 비디오 아트에 걸쳐 영화이론과 정신분석, 철학, 문학이론 등을 적용하는 연구로 논문의 틀을 잡게 되었다. 연구 영역이 시대적, 문화적으로 방대하고, 참고 문헌이 여러 학문 영역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연구는 긴 ‘지루한’ 시간을 요했지만, ‘지루함’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흥미로운 개념적 도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지루함의 충격”이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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