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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민화에 어린 꿈과 사랑을 좇다 조선민화박물관·한국민화뮤지엄 오석환

윤태석


조선민화박물관개관식, 2000(관장 우측5번째)



오석환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북 순창에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한두 명의 머슴을 놓고 농사와 더불어 미곡 중개상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정이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온정을 베푸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가 민화와 박물관을 통해 고품격 문화향유활동에 나선 것도 어쩌면 그런 어머니를 닮으려는 노력의 한 과정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대입을 준비하던 큰 형을 따라 인천으로 올라온 석환은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성적 또한 우수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는 집안은 물론 아들의 미래까지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정도의 큰 시련이었다. 석환은 이를 이겨내기 위해 도서관에서 기거하며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는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결과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때의 역경이 삶의 자세와 목표를 다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실업계인 인천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간 석환은 3학년 때 인천시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졸업 후 바로 임용된다. 그리고 군복무 중 휴가 때 만난 지순자(池順子, 1957- )와 전역 후 결혼했다. 그는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알기에 당대에서 이 빈곤의 사슬을 꼭 끊고 말리라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50세 이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따라서 1981년부터 아내는 부업을 시작했고, 특유의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여러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오석환은 공직 생활의 격무까지 더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일쑤였다. 이를 해소한다며 친구들과 어울려 며칠씩 폭음을 하는 일을 일상처럼 반복했고 이런 시간이 10여 년간 지속되다 보니 위궤양 등 건강까지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음마저 크게 쇠약해 질 무렵, 곁에서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던 아내가 어느 날 “건강을 생각해서 술만은 끊어 달라. 술을 끊기 위해 취미생활로 분재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진지하게 권했다. 

그때 석환의 아내는 남편의 힘든 일상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생활과 함께 분재를 먼저 시작한 상태였다. 석환은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여 분재에 빠져들었고, 불과 몇 년만에 최고수준의 분재와 수석 수백여점과 중투, 호피, 사피 등의 희귀 난을 소장하며 이 분야에서 제법 이름 있는 준전문가가 되었다. 그의 나이 30대 후반의 일이다.

이 무렵 수석과 난을 전시할 때 쓸 고가구를 보러 고미술가게를 드나들면서 운명처럼 민화를 만나게 된다. 민화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도 늘 보아왔던 그림이기에 우선 친근감이 있었다. 감상을 주목적으로 하는 일반 그림과 달리, 민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라는 꿈과 사랑, 벽사(辟邪)와 기복(祈福) 그리고 교훈적인 내용, 사물의 상징성, 신화, 소설, 민담, 고사 등과 연계해서 담고 있는 ‘뜻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민화에 대한 사랑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아내의 사업은 더 번창해 제법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야외 결혼식과 회갑연 등을 할 수 있는 큰 연회장(예일공원, 인천 서구) 사업이 성업 중에 있었다. 석환은 이때 이미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생활과 더불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생활을 할수록 서서히 삶에 싫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연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깊어질수록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며 “아니다”라고 자답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또 몇년이 지났다. 오석환은 1997년 4월 어느 날, 퇴근 후 아내에게 내일 사표를 내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왜 사표를 내려고 하느냐?” 깜짝 놀란 아내의 물음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후회할 것 같다” 석환의 명료한 반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당신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그렇게 하세요” 말리기는 커녕 더 명료한 아내의 답변은 아이러니하게도 석환에게 진한 회한의 눈물을 흐르게 했다.


1997년 5월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석환은 민화박물관을 본격적으로 해볼 요량으로 아내의 사업장 3층에 사무실을 꾸몄다. 민화 수집을 계속하며, 마침내 조선말 방랑시인이며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63)이 잠들어 있는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 계곡에 박물관 부지를 매입했다. 부지를 매입할 때 어려움도 많았다. 사정상 민화를 수집하며 알게 된 동생 같은 고미술상인의 명의로 부지를 샀는데 실제 가격보다 무려 5배나 비싸게 구입했고, 박물관에 전시할 좋은 그림 몇 점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표구사에 특별히 맡겨주겠다는 말만 믿고 맡겼다가 연락을 끊어 일부는 찾고 나머지는 아직도 찾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민화뮤지엄개관식, 2015


영월에서도 첩첩산중에 박물관 부지를 정한 것은 김삿갓이 서민들의 삶을 시로 대변했다면, 민화는 서민들의 삶과 꿈, 사랑이 담긴 그림이기에 시화일체(詩畫一體), 즉 김삿갓의 시와 민화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시기 오석환은
이미 꽤 많은 민화를 소장하고 있었다. 마침내 착공식(1998년 5월)과 약 2년여 만에 공사를 거쳐 2000년 7월 29일 국내 최초의 민화 전문 조선민화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박물관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사업체를 정리하였으며 전 재산을 투입해 약 4,500여점의 민화를 수집했다.


오석환에게 민화의 새로운 역사를 쓸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왔다. 2010년도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초청 ‘석지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특별전’ 때 고려청자로 유명한 전남 강진군으로부터 민화박물관 분관 설치를 제안받았다. 이를 계기로 건축비 약 63억원이 들어간 초현대식 한국민화뮤지엄이 2015년 5월 2일 강진에 문을 열었다. 한국민화뮤지엄은 개관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5만여 명이 찾는 강진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명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내 사업장 예일공원의 민화전시장에서, 1999


오석환은 민화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민화의 대중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이를 위해 전국의 현대 민화작가들을 대상으로 2000년도부터 국내 최초의 민화전문 ‘김삿갓 문화제 전국민화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한국민화뮤지엄에서는 전국민화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대한민국민화대전’을 여는 한편, 작년부터는 민화공모전 본상 수상자들을 해외아트페어에 진출시키는 등 민화의 세계화와 현대화에도 힘쓰고 있다.

민화는 오석환에게, 오석환은 민화에게 어떤 소통을 꿈꾸는가? 이제부터가 더 궁금해진다



- 오석환(吳錫煥, 1954- ) 전북 순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 졸업. 인천시청 근무(1974-97), (사)영월박물관협회장(2012-15), 영월동굴생태관장(2013-15), (사)인천광역시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 회장(2012-), 조선민화박물관장(2000-), 한국민화뮤지엄관장(2015-),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2015-),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 이사(2015-). 한국 속의 한국인 선정(세계일보, 2010). 상공부장관상 4회, 강원도지사상(2010),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2013), 강원도교육감상(2014), 2016 자랑스런 박물관인상(중진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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